“정말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1.

저는 인터넷을 켜기만 하면 바로 접속하는 몇 개의 사이트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N커뮤니티는 대학교 때부터 들락거렸으니까 벌써 꽤 오랜 시간 인연을 맺은 사이트인데요. 미국 NBA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이 사이트의 장점은 ’배려와 존중’을 표방하며 의사소통시에 다른 사이트에 비해 월등한 도덕적 기준과 화법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이트를 광고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2.

여튼 이 커뮤니티의 자유게시판은 제가 소위 말하는 ’보통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가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는데 꽤나 많은 도움을 줍니다. 물론 남초사이트인지라 보통 남자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지요^^ 여튼 상당히 다양한 계층의 남자사람들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이야기하는데 꽤나 재미있습니다. 과학에서부터 문학, 심리, 역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들에 대해서 다양한 깊이의 생각들이 덜 논쟁적인 어조로 올라옵니다. 물론 개똥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상에 대한 생각도 빠지지 않는 주요 주제 중에 하나이지요.

3.

그 사이트의 자유게시판에 ’행복하신가요?’라는 제목으로 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아마도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의 남성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올린 글이었는데 요약하면 ‘칼졸업에 원하던 곳에 칼취업도 했는데 나는 행복한가? 이게 진짜 내가 원했던 삶인가?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든다. 신나는 일을 해도 그건 정말 잠깐이다. 다 이런건가? 어떻게 하면 좋지?’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글을 보면서 ‘정말 보편적이고 흥미로우며 반드시 던지게 되고 던져야만 하는, 인생에 대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사실 이 질문은 인생을 ‘진지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던져야만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을 사는 현대인들은 이 질문을 안타깝게도 너무 늦게 던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없게 만들고, 던지더라도 너무 늦게 던질 수밖에 없는 바쁘디 바쁜 구조악(惡)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가 달려가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는 방향으로 정신없이 휩쓸려가다가 간신히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시점이 되면 어느새 질문을 던지기엔 살짝 늦어버리게 된 처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지요. 매우 슬픈 사실입니다.

5.

‘인생의 참된 행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실 철학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인 주제 중 하나입니다. 저는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은 ’그 존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그 존재가 되어야 하는 바가 될 때에 비로소 그 존재는 본여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결국 행복에 대한 질문은 인간 존재 본연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질문, 즉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질문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6.

‘인간의 존재를 무엇이라고 여기는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방향에 따라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점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여러가지 방식으로 그 분리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제가 견지하고 있는 입장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이 분리는 두 가지 관점을 따릅니다. 한 가지는 인간이 신에 의해 지어진 존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말 그대로) 우연히 ‘되어진’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7.

선행하는 입장은 한 편으로는 쉽고 한 편으로는 어렵습니다. 창조주에게 지어진 인간이라고 하면 결국 인간은 창조주가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것이기에 그 창조주가 목적한 대로 살면 됩니다. 물론 여기서 창조주가 도덕적 존재인지 어떤 능력을 가진 존재인지에 대한 생각과 신념에 따라 그에 따르는 규칙이 달라지긴 하겠지만, 여튼 피조물은 그 존재를 만든 자에게 소유된 것이기 때문에 피조물은 창조주의 목적에 따르는 것이 당위적으로는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가 그 목적을 피조물에게 알려주었다면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방향을 설정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이 입장은 비교적 쉽습니다. 물론 피조물이 그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의 난이도가 (세상을 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매우 높다는 것 자체가 난점이기는 하지만 말이죠. 그런 점에서 이 입장은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8.

한편 그 다음 입장은 어렵고 다른 한편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우연히 ‘되어진’ 존재는 목적이라는 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또한 목적이 없다면 목적에 합치되는 삶을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자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우연적인 존재가 도덕적인 삶으르 살아야 할 당위는 더더군다나 없습니다. 공공의 선이라는 가치 역시 개인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우연히 지어진 자신의 존재의 선호와 엇나가는 것이라면 굳이 지킬 이유도 없기 때문이지요.) 목적을 상실하였을 때 이런 입장에 선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라고 해봤자 “인생은 원래 그런거야. 그러니까 그 허무를 받아들이고 지금 너의 선호와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어떤 것을 해봐. 그때 느끼는 감정이 네가 있다는 존재의 생생한 감각을 느끼게 해줄꺼야.”라든지 혹은 “인생은 원래 그런거야. 그러니까 스스로를 비워서 허무한 이 세상과 너를 합치시켜서 그 공허한 것 자체를 너의 존재로 받아들여.” 정도의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존재가 지향할 수 있는 행복은 자신의 감각에 기반한 것일 수밖에 없고 그 행복은 감각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이는 없음을 추구하는 것에 다름없는 일인 것이지요. 그러니 눈 딱감고 이 입장을 받아들여서 인간은 우연히 된 존재이고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며 ‘니 인생은 니가 개척해야 한다’ 라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하지만 그럴듯해보이는) 명제를 받아든 ’실존적 인간’의 삶은 힘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9.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자기 인생에 대해서 진지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진지한 자신의 삶의 목적이 어디로부터 기인하는지, 그리고 기인할 수 있는지를 숙고하고 어느 하나를 정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목적을 향한 ‘당위’와 ’가치’를 정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한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옳지 않은 해괴한 가치라고 하더라도 삶을 오롯이 거기에 얹어서 그 삶을 살고 그 가치를 진지하게 좇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울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참다운 행복을 원한다면 자신이 삶을 걸만한 가치를 정해야만 합니다. 그런 것 없이, 특정한 가치와 상관없이 하루하루 그저 충실히 살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엇에 충실할 것이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그 충실함은 무엇에 대한 충실함이냐고. 결국 가치가 없으면 충실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10.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 그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견지해야 하는 태도입니다. 그 진지함으로 목적을 숙고하고 목적에 따라 가치와 옳은 것을 구별해내는 것은 다음 단계입니다. 그리고 옳은 것에 삶을 던져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은 바로 뒤따라오는 단계이며 마지막 단계이자 또 다른 페이지로 너머가는 변곡점이 될 수 있겠지요. 자기가 선택한 가치에 대해 변명하지 않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일차적이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1.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목적은 이미 주어졌고 그 목적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가치도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뭐 이 경우에도 다른 종류로 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긴 합니다만) 영원한 가치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이는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을 지향하며 살 수 있게 해줍니다. 그 목적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삶은 솔직히 경험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목적을 발견하기 전에는 별 생각 없이 살았고 목적에 대한 궁금증과 질문이 생길 때에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서 완전하지는 않아도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발견해 나갔기 때문이지요. (그 과정에서 아무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삶, 그러니까 지향하는 가치를 알지도 못하고 그저 흔들리는 갈대처럼 사는 삶은 너무 곤고하고 힘들고 외로워 보입니다. 허망해보이기까지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요. 존재와 목적과 방향. 어찌 보면 실로 간단(simple)하지만 간편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12.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면 맨 처음 반응은 자신의 존재를 지으신 분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역할을 부여하신 분을 향해 무한한 감사와 찬양을 돌리겠지요. 그리고 다음으로 자신의 존재의 원래 목적과 현실의 괴리를 발견하고 깊이 좌절하고 은혜를 구하며 존재와 행위를 합치시키기 위해 부단히 경주하는 훈련의 단계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참다운 존재의 목적과 합치되지 않는 타인의 모습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을 품게 될 것이고 그 안타까움에 대한 적절한 행위를 고민하며 이 땅에서 살게 되겠지요. 물론 이는 논리적인 순서일 뿐 항상 이런 식으로 과정이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자의적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삶의 이유를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 다른 존재를 향한 반응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게 됩니다. 그것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곤고하고 힘들어 보이고 외로워 보이고 허망해 보이는 그 삶을 향하여 지금 계속해서 사역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구요.

Over de auteur

용진

개혁주의자는 아니지만 참된 개혁주의에 관심있는, 웨슬리안 계통의 학교를 졸업한 복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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