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제 이름은 ’영광’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면 ’만나서 영광입니다.’라고 우스개소리를 하곤 하죠. 처음 만난 사람은 내 이름을 모를 테니 이 중의적 우스개소리를 못알아채는 건 함정 아버지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라고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어릴 때부터 제 이름이 영광일 뿐더러, 부모님의 성경적 교육 방침 일환으로 제 인생의 제1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제 인생에 깊은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이냐?는 것이죠. 제 이름이 항상 저를 따라다니듯, ’하나님의 영광’은 제게 항상 의문거리였습니다. 그리고 존 파이퍼를 통해 만난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해 20여년을 고민했던 문제에 해답을 얻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바로 그 미스테리 중의 미스테리,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G.K.Beale의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이 글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귀한 통찰을 주는 최근 읽은 글을 간추려 나누고자 합니다. 바로 G.K.Beale의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입니다. 책은 매우 명확한 한 가지 주제, 곧 책의 원제인 We Become What We Worship이라는 내용을 다룹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것이 된다… 책의 초점은 우상숭배에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인간은 그 우상과 같아진다는 것을 G.K.Beale만의 독법으로 꼼꼼하면서도 통찰력있게 읽어냅니다. (그의 성경을 보는 눈 또한 다룰 만하기에, 다음에는 G.K.Beale의 성경읽기도 다뤄보겠습니다.) 논증해나가는 방식이 상당히 흥미롭지만, 이 글의 주제와 무관하기에 넘어갈게요. 다시 돌아와서, 그런데 우상숭배는 거짓신을 숭배하는 것이기에 사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에게도 동일한 일이 발생한다는 점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을 닮아간다.
G.K.Beale이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전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닮기 위해 하나님을 예배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닮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G.K.Beale은 ’영광’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성경은 세 종류의 영광을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자체의 영광입니다. 이는 표현은 ’영광’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여호와 하나님 자신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저서 도덕적 통치를 보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세 가지 구분 중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기준은 다소 다르지만, 첫 번째 구분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용어를 빌려오자면, 김남준 목사님은 이 영광을 ‘본체적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하나님 존재 자체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지성과 의지를 가지신 하나님의 존재가 지니는 영광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영광은 피조물들의 도덕상태에 의해 영광 받지 아니하니, 이는 마치 땅에서는 눈비가 오고 안개가 끼고 우박이 내려도 구름 위에는 언제나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창조하신 세상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불변하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2]
우리는 사실 이 영광을 볼 수도 없고 지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죠. 우리가 알 수 없고 지각할 수 없는 모습보다 하나님의 볼 수 있는 모습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알 수 없고 지각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성경을 주시고, 볼 수 있게 성육신의 모습으로 오시고,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다니, 얼마나 감사한가? 라고 말이죠.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알 만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결코 ‘알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존재의 탁월함은 너무나 영화로워서 그 영광에 우리는 어떤 것도 보탤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두 번째로 Beale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이 땅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들입니다. 이 영광은 풀어 말하면 발산된 영광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Beale은 이를 표현된 영광이라고 자주 말합니다. 그는 눈여겨봐야 할 텍스트로 출애굽기 33:18-19를 꼽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모세는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때 당신의 본체적 영광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보여주실 것은 “내 모든 선한 것”과 “은혜”로운 모습와 “긍휼”하신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효과로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이죠.
실제로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모세 곁으로 지나가게 하실 때, 그분은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자신이 소유하신 다음과 같은 속성들을 선포하신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성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 (출34:5–7) [3]
이 역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탁월한 비유대로 태양에서 나오는 빛, 열, 광선 등은 분명 태양 자체와 구분되지만 태양의 어떠함이 전달된 것입니다. G.K.Beale은 분석하고 있는 텍스트에 국한하여 논의를 진행해서 그런지 이 이상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논의를 조금 더 확장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전달된, 또는 발산된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이 카테고리에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죠. 창조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어 이루어졌습니다. 구속 사역 또한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죄가 없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실상 표현된, 발산된, 전달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죄가 없었던 에덴은 사실상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 어디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던 곳일 겁니다.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 또한 그렇겠지요.
벌써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이야기를 끌어왔지만, 사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지게 되는 부분은 아무래도 마지막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것은 바로 반영된 영광입니다. G.K.Beale은 이를 소유한 영광으로 자주 표현하고 있습니다.[4] 그리고 세 번째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벅차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단지 자존하심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발산하셨습니다. 바로 두 번째 영광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더 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담지할 뿐 아니라 반영하도록 하셨습니다. G.K.Beale은 앞서 언급한 모세의 사건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난 후 “이 영광의 반영을 지닌 채 시내 산에서 내려”온 것에 주목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하나님의 뒷모습이나 영광의 계시가 수반되었던 영광, 혹은 그분과 모세의 직접적 대화에 수반되었던 영광이 나중에 잔광으로 비친 결과”일 것입니다.[5]
첫 번째 영광을 거쳐 두 번째 영광을 지나 깨닫게 된 세 번째 영광은 G.K.Beale의 명제 “We Become What We Worship”의 핵심을 찌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신적 영광을 반영하지 못하고 송아지 우상을 닮아갔다. 모세의 얼굴을 덮은 수건은 부분적으로, 우상숭배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자가 아니라 사실상 그분의 영광에 의해 심판받을 자임을 나타낸다. 출애굽기 33–34장의 하나님의 ’영광’은 구속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해 펼쳐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속성들(즉 애굽에서 그들을 건져내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들 가운데서 죄인을 심판하신 그분의 정의)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전염성이 있어서, 영광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이들은 그 영광을 반영하게 된다. 마치 모세가 그러했듯이 말이다.[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우리가 예배하는 것이 된다’는 명제를 다음과 같이 바꿔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예배란 발산된 하나님의 영광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체를 향한 갈망을 증진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 및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가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공의롭고 사랑이 넘치게 살아야한다고 다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다면 소리만 요란한 빈깡통에 다름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라고 내거는 슬로건은 결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선양하자는 의미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영광을 보지 않고 어찌 아름답다 느끼겠으며, 어찌 귀하다 여기겠으며, 어찌 탁월하다 하겠습니까. 우리는 예배 안에서 발산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누립니다. 그 안에 충분히 잠긴 사람은 모세와 같은 얼굴로,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어 예배의 자리를 떠날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더 갈망하고 더 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방금까지 보고 맛보고 감탄하며 찬양했던 영광의 근원지가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가 소유하고 반영하고 드러내고 더 전달하기 원하며 무엇보다 닮기 원하는 영광의 원형이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이 기개 넘치게 외치는 바입니다.
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하나님 앞에Coram Deo 서 있어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Soli Deo Gloria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Comments 2
추상적으로 이해되는 영광이란 의미가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좋은 글입니다. G.K.Beale의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라는 책을 읽고 싶게 만드네요.
영광이 정확히 뭔지 궁금해서 찾아보다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오늘 하루도 하나님께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