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월요일 IVF 전국리더대회에서 있었던 ‘디제잉 워십’ 동영상으로 인해 페이스북에서 논란이 인 대상인 연세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간사인 한진호 형제님께 드리는 공개서신입니다(현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선 간사님이라고 호칭합니다). 내용이 서신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보내야 마땅하겠으나, 아래의 내용을 통해 제가 몸담고 있는 개혁주의 진영에도 같이 나눌 이야기가 있는데다가, 논란이 이는 주제에 대한 가장 인격적이고 따뜻한 글쓰기 방식인 ‘서신’을 통해서, 찬양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건전한 토의를 나누어보고 싶기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개서신으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진호 간사님. 지금 아마도 힘든 시기를 보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간사님의 페이스북에서 글을 보니 속상하시다는 말씀을 하신 걸로 보아 그러리라고 느껴지네요. 하지만 제 생각에, 간사님의 찬양에 대한 진정성은 전혀 의심스럽지 않습니다. 음악적 감성과 재능에 대해서는 (저는 음악은 잘 모르지만) 존경스러울 정도고요. 누군가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진정성을 의심한다면, 그것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댓글을 보니 이미 많은 분들이 공감과 응원, 격려를 보내주시고 계시네요.
저는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졸업한 게 작년 2월이니 얼마 되지 않았지요. 진호간사님께서 업로드하신 동영상을 보니 제가 3년 동안 예배하고 말씀을 들었던 바로 그 장소가 보이더군요.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늘 어찌 보면 지루하기까지 했던 긴 강해설교를 주로 듣고, 고루한(?) 음률의 시편 찬송을 배웠던 장소에서 사이키 조명이 돌아가고 춤을 추고했으니까요. 기분이 나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그 장소’의 이미지가 달라지는 것 같아서 놀랍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먼저 위로와 격려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과거에는 그런 비슷한 성격을 가진 집회에서 신나게 뛰었던(?) 사람이고(비록 DJ장비로 EDM을 가지고 한 찬양은 아니었지만), 그 때 느꼈던 희열과 기쁨이 무엇인지도 아련하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깊이 생각해보면, 춤을 추고 계속 뛰어대는 상황에서도 제 마음에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자의식과 진정성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모든 재능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믿기에 간사님의 음악적 재능과 열망이 부디 귀하게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그 방식은 찬송이 줄 수 있는 기쁨을 감소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동영상을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그러한 모습의 예배찬양이 옳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고, 특히 장로교인인 제 입장에서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여기서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꼭 이 원리에 대하여 간사님께서 나중에 공부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를 어기는 일이기에 반대하지만, 그러한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찬양이 주는 기쁨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더 안타까웠습니다.
감소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는 진호 간사님께서 DJ장비로 EDM을 사용하여 찬양을 인도하시는 것이 너무 쾌락적이어서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그리고 누릴 수 있는 궁극적 쾌락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혹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금욕주의자이기 때문에 디제잉 워십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락주의자이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왜 그러한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찬송은 단순한 경음악이 아니라, 가사가 붙어있는 노래입니다. 즉 경음악과는 달리 가사가 주는 메시지가 음률에 실려서 감정을 전달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음악은 가사가 주는 메시지를 극대화시키고 감정에 실리도록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사가 주는 메시지와 음악이 어울리지 않는다면(기묘하게도, 인간의 감정은 어울리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기가 막히게 구분합니다) 우리는 어색함을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간사님께서 올리신 동영상에 등장하는 찬송 하나를 생각해 보지요.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이 아름다운 가사를 음미해 보십시오. 아마도 이 가사를 쓴 작사가는 우리 주님만이 자신의 삶에 유일한 기쁨과 만족이기 때문에 주님만을 사랑하며, 다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사랑을 고백한 것이겠지요. 이는 흡사 아름다운 연애편지와도 같습니다. 가사의 표현과 내용은 진솔하고 고백적이며, 내재율과 각운으로 맞춘 음악적 요소는 고백에 아름다움을 더해줍니다.
게다가 마지막 연의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아마도 요한복음 15장 14–15절의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를 반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이 말씀의 배경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나서 제자들에게(아마도 포도밭을 거니시며) 자신이 참 포도나무시며 제자들이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수없이 “내 안에 거하라”(11구절에 10번 사용)고 간청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곧 떠나실 것인데(그래서 요 14–16장을 고별설교라고 부릅니다),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도 그들은 여전히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문맥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계명을 지킬 것을 간청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4)
제자들은 더 이상 억지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종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도구에 불과하며, 이는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기 제자들과 맺기 원하셨던 관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예수님의 명하신 것을 행하는 친구입니다. 1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며,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제자들과 예수님이 맺게 될 새로운 관계에 대한 자랑찬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기 때문에(요 15:13), 그분은 ‘친구’들인 제자들을 위해 십자가로 기꺼이 가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그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된 새로운 관계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이 찬송을 부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신 동시에 하나님이신 그분이, 친구로서 우리를 대우하시고 목숨을 내어주신 것을 묵상하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만족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실한 친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여기서 저는 진호 간사님께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간사님께서는 이러한 고백을 하는데 EDM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까? EDM과 이 가사(그리고 그 이면의 성경 본문 내용)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아니 안 어울리는 것을 넘어서 이 가사가 본래 줄 수 있는 기쁨과 감흥을 비트와 분위기가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너무나도 연모했지만 함께 할 수 없었던 여인을 만나 오랫동안 쌓인 감정과 사랑을 고백하는데 간사님께서는 EDM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새로운, 그리고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에 대한 기대감. 사랑했던 대상과 드디어 마음이 합한다는 공감(共感). 너무나도 탁월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자신을 사랑해 준다는 데서 얻는 황홀감. 어떤 이기적인 요소도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본다는 만족감과 거룩함. 이러한 감정들을 쏟아내는 고백에는 진지하고 따뜻하며 조금은 느리고 잔잔한 선율이 이 감정들이 주는 기쁨을 극대화시킵니다. 이 모든 감정들을 토로하는데 EDM이 등장한다면 감정이 주는 기쁨을 높이기는커녕 방해하고 감소시킬 것입니다.
다른 가사들도 한 번 생각해 볼까요?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산곡감리교회(2014.05.17.)에서의 디제잉 워십 동영상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주 이름 찬양’이라는 찬송을 불렀는데요. 이것도 가사를 생각해 봅시다.
주의 이름을 찬양해 주의 이름을
주의 이름을 찬양해 영화로운 주 이름 찬양
어떻게 보면 단조로운 이 가사에 쓰인 단어들은, 단조롭거나 가벼운 것들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주’, ‘주의 이름’ 그리고 ‘영화로운’이라는 묵직한 단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찬찬히 읽어내려가다보면 여기 쓰인 단어들의 무게감이 얼마나 큰지 더욱 깨닫게 될 것입니다. 특히 ‘여호와’로 계시된(I AM이라는, 자신이 절대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주의 이름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 그 이름이 계시될 때, 그리고 그 영광이 드러날 때의 광경이 얼마나 묵직했는지도 생각해 봅시다.
그 이름이 최초로 계시될 때, 모세는 발에서 신을 벗고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며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출 3:5–6).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그분께 감히 이름을 여쭈었을 때, 여호와의 사자는 자신을 “내 이름은 기묘자라”(삿 13:18)라고 계시하시며 감히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깨달을 수 없음을 나타내셨고, 2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삿 13:17–20). 여호와께서 이사야 앞에 강림하셨을 때, 천사들은 감히 얼굴과 발을 그분께 내놓지 못하고 가리었으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외쳤습니다(사 6:3). 그리고 이사야는 죄에 대한 지적을 받지도 않았는데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울부짖었습니다(사 6:5).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을 때도, 그 위엄과 영화로움은 변치 않았습니다. 그분은 여러 번 자신을 가리켜 ’I AM’이라고 선언하심으로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3 그분의 이름은 압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어서, 로마의 군병들이 그분을 잡으러 왔을 때 단순히 “내가 그니라”(I AM)라고 말씀하신 것만으로 군병들을 쓰러뜨렸습니다(요 18:5–6). 4 사도들은 이 영화로운 이름이 예수의 이름이라는 것을 증거했고 5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압도적인 영광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그 이름의 영광에 대하여 수없이 들었고, 바로 그 강당에서 그 이름을 두려움과 존경심 가운데 목 놓아 찬양했습니다. 압도적인 영광을 만났을 때 느끼는 이 압도적인 감정. 그것을 성경은 ‘경외’(fear)라고 부릅니다. 경외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고 존경스럽고 영화로운 권위를 만났을 때 사랑과 함께 느껴지는 두려움입니다. 마치 영성과 도덕성, 인격, 학문적 권위에 있어서 최고의 명성을 가지고 있는 학자를 만날 때 느끼는 감정 같은 것 말이지요. 그는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함부로 할 수 없으며 마냥 가까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나 구별됩니다. 이 탁월한 감정을 경외라고 하며, 이 감정을 실어서 다시 주의 이름을 찬양해 봅시다.
주의 이름을 찬양해 주의 이름을
주의 이름을 찬양해 영화로운 주 이름 찬양
그 어떤 단어도 가벼운 것이 없습니다! 누구든 이 감정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최고로 영화로운 대상을 만났을 때 느끼는 이 두려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EDM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조차도 오르간과 오케스트라는 제 취향이 아닙니다만, 이 영화로운 왕의 강림을 목도할 때는 오르간과 오케스트라를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위대함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제가 느끼는 경외라는 기쁨의 감정은 극대화될 것이며, 이 때 EDM이 등장한다면 제 경외의 기쁨은 감소할 것입니다.
찬송은 감정의 시작이기보다는 완성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찬송은 기쁨의 시작이기보다는 완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먼저 하나님을 봅니다. 그것이 따뜻한 사랑의 표현이든, 압도적이고 영화로운 권위의 표현이든 간에 피조물인 우리 안에는 전능자를 만났다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C.S. 루이스가 찬양에 대해 “단순히 우리의 즐거움을 표현해 줄 뿐 아니라 완성해 준다.”고 6 말하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은 기쁨은 단순히 혀만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음식 너무나도 맛있는걸!”이라고 감탄하며, 주변 사람들과 함께 맛집공유를 할 때 기쁨은 배가되고 완성됩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사랑한다”나 “아름답다”는 말을 할 수 없다면 연인을 향한 그의 기쁨은 완성될 수 없으며 감소될 것입니다. 따라서 찬양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화롭게 해야 하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기독교적 기쁨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출발하여 음악으로 기쁨을 완성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반대가 아니고요. 특히 시편을 권하고 싶습니다. 성령으로 오류없이 영감받은 시인들의 다채로운 감정을 주의깊게 관찰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이 시인들이 느꼈던 기쁨, 탄식, 괴로움, 회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 다시 만족하는 마음, 하나님을 높이려는 의지, 경외감 등을 면밀하게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고 나서 이 시인들이 표해던 감정의 대상이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간사님의 찬양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해 줄 것이며, 더욱 아름답게 해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가벼운 기쁨에 머무르지 않기를 권합니다. 당신의 ’디제잉 워십‘이 마냥 가볍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위대한 하나님에 비해서 내가 음악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 너무 가벼운 것이 아닐까?”라는 자문을 해보시기를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내가 추구하는 찬양의 기쁨이 원래 성경에서 말하는 찬양의 기쁨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하고 자문해 보십시오. C.S. 루이스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십시오.
복음서가 당당하게 약속하는 보상, 그 엄청난 보상들을 생각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의 갈망이 너무 강하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약하다고 말씀하실 듯합니다. 우리는 무한한 기쁨을 준다고 해도 술과 섹스와 야망에만 집착하는 냉담한 피조물들입니다.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자고 말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상상하지 못해서 그저 빈민가 한구석에서 진흙 파이나 만들며 놀고 싶어 하는 철없는 아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합니다. 7
당신을 지지하지 않지만, 응원합니다.
루이스의 말에 따르면 저 역시도 ‘철없는 아이’임을 겸허하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저는 고신의 목회자이며, 제가 예배 때 부르는 노래들은 주로 찬송가나 시편찬송들입니다. 물론 과거에는 저도 찬양집회에서 방방 뛴 이력이 있지요. 찬송에서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음악을 더욱 기뻐할 위험은 디제잉 워십을 하는 간사님이나 시편찬송을 부르는 저나 모두 빠질 수 있는 위험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죄인이 아니라 말할 수 없으며, 저도 음악의 우상에 빠지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우리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영화로우심 때문에, 저는 성경이 드러내는 하나님을 EDM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노래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경외와 사랑의 예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감정을 표현해 주는 음악 형식이 아니며, 아주 쉽게 하나님에 취하게 하기보다는 음악에 취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것은 음악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지요.
IVF의 내부자로부터 전해듣기는, 전국리더대회에서 간사님이 맡으신 순서는 ‘예배’가 아닌 ‘콘서트’였다고 하더군요. 저는 여러모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든지 문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물론 논란의 여지는 있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한마디씩 하는 이유는 간사님께서 그 시간을 디제잉 워십(Worship)이라고 명명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간사님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간사님께 베푸신 귀한 음악적 재능과 감성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페이스북의 글에서 개혁주의를 언급하셨더군요. 하지만 실상 개혁주의자는 모든 신학 사조 중 가장 문화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풀어내려고 노력한, 그래서 가장 급진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저는 간사님께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 강연’이라는 책을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사님께서 계속 디제이로 일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문화를 즐기며, 또는 문화 컨텐츠를 제공하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며,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훌륭한 디제이가 되시길 바랍니다. 진심으로요. 다만 예배에 이 음악을 사용하는 일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숙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기왕 IVF에 가셨었으니, IVP에서 출간한 존 파이퍼의 ‘하나님이 복음이다’라는 책을 읽어보시기를 간청합니다. 이 책은 예배음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지만, 압도적인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많이 말해줍니다. 가능하다면 저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 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혹시나 제가 쓴 글로 인해 상처를 받으셨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이러한 글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려는 우리의 열정이 위축되지 않기도 구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예배 음악에 대한 불일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장차 고려신학대학원 대강당보다 훨씬 더 좋은 하늘의 예배당에서 우리는 마음을 합하고 소리를 높여 가장 영화로우신 삼위 하나님을 힘주어 찬양할 것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계 7:10)
각주
1: Andreas J. Köstenberger, John,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4), p. 458.
2: ‘기묘’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놀라운, 이해를 넘어서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3: 요 4:26; 6:20; 8:58; 13:19; 18:5, 8 참조.
4: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Eerdmans, 1991), pp. 578–579.
5: 특히, 행 2:21과 38을 대조해 보라.
<
p style=”text-align: justify;”>6: C.S. 루이스, 시편사색, 이종태 역(서울:홍성사 2004), p. 136.
7: C.S. 루이스, 영광의 무게, 홍종락 역(서울:홍성사 2008), p. 12.
Comments 32
감사합니다.
1) 역시나 개혁주의 신학에서 시작해서 개혁주의 신학으로 끝나는 주장이네요.
2) 한진호 전도사님과 이 글을 쓰는 저는 감리교인으로서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과는 별개의 알미니안-웨슬리 전통에 있습니다. 따라서 한진호전도사님을 공격하시기 위해서는 개혁주의 개혁주의보다 알미니안 차원에서 어떤 한계가 있는지 숙고하고 설득하는 것이 옳지 않았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따라서 이 글의 논제의 대다수는 전도사님을 설득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주장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장로교의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 맞게 이루어졌느냐보다 감리교의 예배 규정에 맞는지를 따지시는게 나았으리라는 생각을 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3) EDM Worship은 한진호 전도사님 이전에도 등대선교교회가 채택해 도입했으며, 그 이외에도 일산 조이풀 처치, 일본에서 부흥하고 있는 라이프하우스 처치등이 적극적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터진 사건은 그 전반적인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끝.
저는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이번 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EDM이란 단어도 오늘 처음 들어본 정도이니깐요…솔직히 어떤 음악을 써야 찬양의 본질에 가장 충실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예배라는 것이 단순히 어느 교단의 예배 모범을 따르냐 따르지 않느냐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윗 글의 이해는 제가 보기엔 장로교 예배의 규정에 근거해서 EDM??이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단지 글쓴이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말하고 있는 찬양의 본질에 비추어 봤을 때 EDM은 가장 적절한 형식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글쓴이가 장로교 교단에서 신학을 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 이해 체계에 있어 장로교적 색채가 있겠지만, 이걸 단순히 어느 신학 혹은 어느 교단의 입장에서 공격하는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시면 더 이상 논의가 진전되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깝네요. 자신이 갖고 있는 성경에 대한 관점에서 나오는 생각들을 나누며 이야기함으로 서로의 이해가 풍성해지고 발전해나가는 그런 블로그가 되면 하는 마음에 지나가다 글을 남깁니다.
풉.
이런논리면
예장합동인 내가 볼때
고신이.기독교냐고.말해도 별 무리 없을듯.
C.S 루이스가 일찌기 말했습니다.
“자신의 취향이나 사상,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 만큼 폭력적인 것은 없습니다.”
아니라고 해도 내눈에 보기엔 님 취향을 얘기하는 것 밖에 안보입니다. 그것도 강요하는 식으로.
아! 그리고 중간에 인용한 C.S루이스 글은 님이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핀트가 맞지 않습니다.
진호님의 지지자로서 댓글하나 남깁니다. 이미 교회안에는 오래전부터 edm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2010년부터 일렉음악을 너도나도 edm이라 총칭하지만 결국 edm은 전자세션이나 효과음을 사용한 음악의 총칭입니다.그러므로 edm을 부정 하시려면 교회 내에 모든 전자 악기들을 없애야 할것이고 또한 edm이라해서 시끄러운 음악만 있는게 아닙니다 세부장르만 세세히 나눠도 엄청나게 많은 장르가 존재합니다. 조용한 시끄러운 리드미컬한 장르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가사를 말씀 하셨는데. 외국의 경우 이쪽으로 발달하여 대중가요차트에 랭크된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음악으로 처음부터 작곡한 장르도 따로 있습니다)하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그런 곡들이 없으니 기존 곡에 가사를 입혀 부르니 어색 한것도 사실이지요.그러나 우리가 부르는 기존의 찬송곡도 이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결론은 이번경우 뿐만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edm은 클럽에서 술마시고 부비부비를 조장하는 시끄러운 음악으로만 한정되는 대중의 몰이해가 아쉽군요. 아주 독하게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 뭐하나 들어오면 그쪽 (?)으로만 빠져서 참 아쉽습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걸음마 단계이니 잘발전시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Author
우선 귀한 의견 감사드립니다. EDM이 “전자세션이나 효과음을 사용한 음악의 총칭”이라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새로운 걸 알려주셔서 감사드려요. 저도 몰이해된 대중이네요 T_T
어쨌든, 제가 동영상으로 본 방식이 ‘예배’에 사용된다는 것은 여전히 지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도 같구요. 하지만, 은총님 덕분에 음악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 문제를 논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감사드립니다. 저도 그렇지만, 한국교회의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고, 신학적으로 이 문제가 정립되지 않아 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괜찮으시면, EDM에 대하여 좀 더 가르쳐 주세요^^
예배가 도대체 뭔가요? 교회에 모여서 준비 찬양 좀 하고 짜여진 순서에 말씀읽고 설교 듣고 헌금 걷는????그것이 예배인가요?? 그래서 음악은 가사의 중요성을 말씀하신건가요? 그래서 교회에서 가사에 집중하란 말을 멘트로 쓰시는건가요?모든 음악이 그렇진 않지만 메이져 마이너로 가사이전에 메세지를 멜로디에 담는게 먼저인데 생각을 어떻게 가지고 가치관을 어찌하든 상관없는데 신학 좀 배우시고 이런글 쓰시는건 좀 아니다 싶네요 역으로 성도들이 목사님 설교는 너무 재미없다 톤이 별로다 졸리다 이런식의 말들을 한다면 어찌 생각 하실런지요?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EDM
EMD 한 번 보시죠?
교회의 세속화를 지지하시는건가요?
이것이 정답은 아니지만 링크 겁니다https://ko.m.wikipedia.org/w/index.php?title=%EC%A0%84%EC%9E%90_%EC%9D%8C%EC%95%85&redirect=no
그리고 전자음으로도 오르간소리가 구현이 가능합니다. 그냥 제생각엔 그냥 동영상의 소리들이 싫어하신다고 생각 되어집니다. 사실 파이프오르간의 처음 사용되어질때 어떻게 사용되어졌는지 아시면 질색하시겠지만요…
목사님 EDM 뮤직은 단순히 일렉 악기로 하는 음악이 아닙니다.
제가 간단히 몇개만 살펴봤구요!
유투브에서도 EDM이라고 확인해 보았습니다.
클럽에서 사용하는 댄스음악이라고 할 수 밖에 없네요!
https://ko.wikipedia.org/wiki/%EC%9D%BC%EB%A0%89%ED%8A%B8%EB%A1%9C%EB%8B%89_%EB%8C%84%EC%8A%A4_%EB%AE%A4%EC%A7%81
위키백과, .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영어: Electronic dance music, EDM)은 신디사이저와 시퀀서를 주로 사용하는 클럽 내지는 음악을 중심으로 삼는 엔터테인먼트의 장에서 그 자리의 사람들을 뛰게하는 명확한 목적을 가진 DJ의 도구로 만드는 음악이다.
http://blog.naver.com/chae6723/220368366448
EDM : House Music
80년대 초 시카고의 어느 게이클럽 ‘웨어하우스’라는 곳에서 탄생..!
이때 당시 House음악은 정적인 베이스의 강력한 4/4박자를 축으로 반복적인 리듬을 매우 중요시했다고 한답니다.
즉 춤을 추기위해 만들어졌다는 장르인데요
그도 그럴것이
미국에 살고있는 많은 흑인들 라틴계 사람들 그리고 게이클럽 ‘웨어하우스’에서도 알수 있듯 성 소수자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노래였답니다…
글쓰신 분의 태도에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방식의 토론… 오랫만인것 같아서요^^
다만… 음악적인 것에 대해 가볍다 아니다의 문제는 다분히 개인적인 취향과 선호의 문제도 클 것이라 생걱됩니다.
그리고 예배의 본질적인 부분과 회중예배의 방법적인 측면이 다소 혼재되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잘 읽어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찬양에 대해서 되돌아 보게 만드는 유익한 글입니다.
디제잉 워십 영상을 보고 왠지 모를 이질감에 사로잡혔는데, 너무 무지하여 그 ‘왠지 모를 이질감’의 이유에 대해 꼭 찝어 설명 하기가 어려웠습니당. 신학 전문가가 아닌 일반 성도로서 읽기에, 어떤 부분에서 더 신중히 생각해보아야하는지 잘 설명해주신것 같아 참 감사드립니다^.^
Author
모두 일일이 댓글 남기기 어려워서 대강 답을 한번에 다는 것을 용납해 주십시오. 반대의견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긴 글 읽어주셔서 더불어 감사드립니다.
1. 저는 개혁주의를 진호 형제님의 사역을 비판하는 도구로 삼은 적이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예배의 규정적 원리를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제가 이야기하는 핵심 개념은 CS 루이스로부터 빌어온 것입니다. 물론 루이스는 알미니언이었고, 성공회 출신입니다. 개혁주의 하고는 상관이 없지요.
2.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핵심은 장르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장르든(심지어 오르간이나 피아노라도) 음악이 감정을 고양시키는 도구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감정을 고양시키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말씀을 통해 적합하게 고양된 감정을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면 심지어 시편찬송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 논지는 교단이나 교파와 상관없이 받아들여지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취향의 문제도 아니구요.
3. 이형진, 주창훈, 김신권, 권보라님 격려와 공감 감사드립니다. 졸한 글 다 읽어주셔서도 감사드리구요.
고신적인 정서를 강요하시는 듯 해서
상당히 읽기 불편합니다.
저는 개혁주의 신학을 전공한 신학생입니다
저는 edm 이라는 장르도 최근에 알게 되었고, 그것이 예배음악으로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약 7-8년 전 사역지에서 힙합을 좋아하는 청년의 꿈이 홍대에 크리스천 클럽을 만들어 거기서 즐겁게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려 반 기대 반이었지만 그 청년을 위해 기도했고 지금도 문득 홍대를 지날때면 그 청년 생각이 납니다
제가 이 글을 읽으며 지속적으로 들었던 생각은 장르의 획일화입니다 신학은 저도 부족하니 어찌 말씀을 드릴 수 있겠냐마는 세상음악도 사랑을 노래하는 한 곡을 때로는 느리게, 또는 빠르게 부릅니다 그마다의 장점이 있지요
하지만 글쓴이님께서는 사랑노래는 조용히, 속삭이는게 정답이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게 정답일까요? 그렇다면 중세로 돌아가고 불과 2-30년 전만해도 교회에 기타를 메고 등장한 최인혁 집사님을 보며 이단이라 외쳤습니다
과연 무엇이 정답일까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참고로 저는 작년 캠프에서 뮤지컬을 하며 지금 이 순간을 개사 해 불렀고 올 여름에는 윤미래씨의 검은 행복을 개사해서 부릅니다 이 뮤지컬을 캠프에서는 예배라고 부릅니다
안타깝게도 ivf의 찬양 영상은 보질 못했습니다 찾는 영상마다 재생이 안되었거든요 ㅠ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 뭐라 말씀드릴 순 없지만, 저는 다양성이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할지 모르겠네요^^;;
즐거운 하루 되시길 ㅎㅎ;;
루이스가 알미니언이었다니요….ㅜㅜ 루이스가 개혁주의자는 확실히 아니었어도 알미니언은 더 확실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ㅜㅜ
루이스의 책 속에는 개혁주의, 알미니안 적인 요소들이 섞여있을 뿐만 아니라 이 두 범주만으로는 정의내리기엔 복잡하고 방대한 사상체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루이스를 단정적으로 알미니언이라고 하시니 참 슬프네요 ㅠㅠ
저도 C. S. Lewis를 정말 좋아합니다. C. S.Lewis가 김재완님 말씀처럼 복잡하고 방대한 사상체계를 가진 것은 맞지만, 굳이 그의 신학적인 스탠스를 따지자면 알미니안이 맞다고 봅니다. 그리고 알미니안이 이단도 아닌데 너무 슬퍼하실꺼 까진 없다고 봅니다^^;
다양한 음악적 방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동의합니다. 그것이 디제잉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 찬양하는 가사가 있고, 그 가사가 진실한 마음의 표현이라면, 하나님께서 충분히 기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용한 노래에 담았을 때 효과적인 가사가 있고, 시끄러운 노래에 효과적인 가사가 있는데, 디제잉은 많이 시끄럽기 때문에 담을 수 있는 가사가 상당히 제한적입니다. 내용이 깊은 가사를 담기에는 음악이 너무 가볍지 않을까요.
함께 좋아하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진실된 마음으로 찬양한다면 디제잉 예배도 가능할 것 같지만, 수용할 수 있는 연령대가 매우 제한적이라서, 공예배때 사용한다는 건
앞으로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락음악을 좋아하지만, 교회 열린예배에서 너무 시끄러운 락 장르 찬양이 계속될 때는 오히려 찬양에 집중이 잘 안 되더라구요.
어떤 장르가 더 진심을 담아낼 수 있는가 하는 건 남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를 느리고 서정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부르는 것보다 디제잉으로 가사에 집중해서 진심을 다해 부르는게 더 나은 거죠. 하지만 느리게 불렀을 때 가사에 집중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긴 합니다.
상당히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디제잉 예배가 필요할 때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마음을 홀리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가사를 따라하다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줄 수 있고, 사람들이 교회가 따분하고 지루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순기능일 것 같네요.
만약 현재 이 세상의 모든 음악이 전부 EDM 이고 CCM도 EDM 이었다면?
옛것을 돌아보면 앞으로를 볼 수 있습니다….
처음 교회에 파이프 오르간이 들어올때 칼뱅이 “Devil’s whistle” 이라고 했다는데…
그리고 피아노가 처음 교회에 들어올때 역시 세속적인 건반 악기가 어떻게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겠냐고 했던 시기도 있었고…
그리고 저 어렸을 적 목사님이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드럼을 교회에서 찬양 연주하는데 사용하는건
굉장히 세속적이라고 강단위에서 아주 힘주어 말씀하셨던 것도 지금 생생히 기억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떤가요? 저 위 글에선 오르간을 사용하겠다고요?
악마의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는 오르간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요?
가장 세속적인 가락악기인 피아노 없는 교회가 지금 어디 있을까요?
그리고 드럼…. 교회 안에서 신나게 뚜둘겨 대지요?
그럼 우린 악마의 휘파람 소리를 내며 찬송가를 부르고 있고
아주 세속적인 가락악기를 뚜둘겨 대고 복음성가를 부르고 있으며
말초신경 자극하는 드럼으로 사람들을 홀려대며 워십곡을 부르네요….
그런 발상이라면 옛날 그레고리안 찬트로만 노래하라고 하고 싶네요.
아니 다윗 시대처럼 비파와 퉁소와 나팔만 불우며 찬양하는게 가장 성경적이네요
성경엔 드럼도 없고 피아노도 없고 색소폰도 없고 EDM도 없으니까요…..
자기 귀에 거스르면 아닌건가요? 저는 글의 내용이 아주 거슬리네요……
가나안 성도 글부터
이번 글 까지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일단 비판?! 비판의 수준이 아니라
악성댓글수준으로까지 느껴집니다
비판받는 상대방이 답변할만한 가치를
못느끼니요 혹시 노이즈마케팅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요…
자꾸 이런 논란많은글이 페북 등 sns에 퍼지고
하는것도요
윗 댓글중에 조금 과격했지만 고신이 기독교냐고
말해도 별 무리 없을듯 이댓글에 공감이 가며
강도사가 뭔지 고신이 뭔지 찾아볼정도였으니깐요
(개념을 몰라서가 아닌 조금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목회를 하시고 또 앞으로 하시려는분께서
소통하시려는 모습에는 무척이나 존경스럽지만
그 소통이 뜻하신바가 아닌쪽으로 흘러가는거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써봅니다..
제 생각에는 edm을 찬양에 사용했다는 자체가 문제가 된다 , 라고 결론을 내리는 건 조금 성급한 판단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건 사실 문화적 상대성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생각합니다
최근 Hillsong에서도 young&free라는 일렉트로닉 음악을 기반으로 한 ccm을 발표했고, 저는 힐송을 워낙 좋아하고 일렉트로닉 음악을 좋아해서 들어보았는데 저로서는 찬양의 가사 내용이 곡의 비트와 잘 어우러져서 찬양의 본질이 훼손된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습니다
힙합도 굉장히 좋아해서 chh라는 장르의 christian hiphop도 자주 듣는데 많이 듣고 가사의 영어내용을 해석도 해보고 했는데, 저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결국 edm이라는 장르도 찬양 가사의 내용과 그 내용이 표현하고자하는 주제만 잘 표현헤주기만 하면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결국 edm이든 힙합이든 그 음악 장르를 찬양으로 쓰려는 사역자나 이티스트가 찬양의 본질과 주제를 Edm이나 힙합에 잘 녹여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게 필요하다 봅니다
찬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찬양을 만들고 그 찬양을 연주하고 인도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그에 걸맞는 음악적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위의 ivf의 간사님 동영상 봤는데….
솔직히 찬양이랑 틀어놓은 edm이랑 따로 놀던데요… 무늬만 그럴듯했지 음악적 고민이 별로 안 느껴졌습니다
결론은 edm이라도 그 음악에 대해 폭넓은 감성과 역량을 가지고 찬양의 본질과 연결시키려는 진지한 고민을 하고 찬양을 만든다면, 저는 edm이 사람들에게 마음에 들든 안들든 어쨌든 찬양이 가진 메시지는 전달될 것이라고 봐요
바로 위에 ㄹㅎ 만 쓰신 글은 오타이신 것 같아서 삭제했습니다.^^
1) 왕의 강림을 선택하는데 오르간을 써서 시편송을 불러야 한다는 것부터 공감이 되지 않는것이, 본질로 돌어가면 현재 예배 다 가톨릭식으로 변경해야죠. 옛날 것 고집하면 그레고리안으로 찬양부르고 시편 라틴어로 부르고, 성서공과는 기본이요 예배때마다 성찬해야죠? 성찬에 거룩하시도다 주기도문 하나님의 어린양 라틴어로 부르고 성체 혀로 영하고… 오르간/오케스트라는 되는데 EDM은 안된다는 거는 개혁주의 예배 폐지하고 가톨릭 전례로 돌아가자! 라는 논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톨릭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특정 예배방식만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적합하다는 것도 진리적이지 않습니다.
2) 전도사님은 “권해주신 책들은 이미 읽은 책이다. 교회 사임하면서 중고로 거의 다 팔았지만, 책은 폭넓게 꽤 많이 읽었다. 보수적이라 꼽히는 출판사 ‘부흥과 개혁사 책도 몇십 권 봤다.” 라고 하시는군요. ( http://ichungeoram.com/9108 )
3) 천국에서의 예배, 저는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초기교회 성도들의 예전, 그레고리안 이전의 (암브로시안 등) 양식, 그레고리안을 고집하는 사람부터(가톨릭, 정교회 전례, 16세기 시펀가, 17세기 이후 성공회 전례, 감리교 예전, 장로교 예배, 찬양예배, 현재의 모던 워십, EDM Worship, 떼제 성가 등 너무 많은 예배의 방식이 동시에 충돌할테니까요. 그런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1) 라틴어로 찬양을 부르게 된다면.. 종교개혁 이전의 예배로 돌아가자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네요!
목사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이디엠이 아니라 오르간을 써서 시편찬송을 부르자 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하는 것, 그것을 극대화 하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한다는거죠. 오르간을 통해 시편찬송을 부른다면 아무래도 이디엠 방식보다는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의미가 성취한다고 볼 수 있는것이구요.
고민해보아야 할 좋은 주제를 가지고 글 써주신 것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예배… 예배를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예배를 모범으로 이상적인 예배로 생각해야 할까요…
저는 짧은 소견이지만 천상의 예배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천상의 예배는 시대와 장소와 음악의 장르와 사람들의 기호를 초월해서 우리에게 선명하게 제시하는 그림이 있다고 보여지는데요, 그건 어떤 악기를 쓸 것인가, 어떤 장르의 음악이 채택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하시고 존귀하시고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예배한다라는 것, 이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전통적인 악기, 장르, 예배와 찬양에 대한 입장이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어떤 목적에서 어떤 의도로, 어떤 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찬양과 예배, 악기와 장르를 바라보았는가를 생각할 때, 저는 모르긴 몰라도 천상의 예배를 항상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일렉기타와 싸이키 조명과 비트박스?와 같은 것들이 분주하게 돌아간다?
나는 그런 장르의 음악이 나에게 맞으니까 이런 장르의 음악이 하나님을 경배하기에 합당하다?
천상에서도 그럴까요?
계시록 5장에서는 악기의 종류가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찬양의 장르도 나오지 않지요.
저는 높으시고 존귀하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과 일찍이 죽임 당하신 어린양, 그리고 그 앞에 엎드린 24장로들과 천군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적어도 전자음과 싸이키 조명과 흐느적거리듯 몸을 흔드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 않아 싶습니다.
구세대 음악들은 싫다고, 당신들의 장르와 악기와 찬양곡은 따분하다고 여기며 이 세대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듣기 좋아한다고, 이 세대의 음악적 풍조라고 다 받아들이고 거기에 취한 이들이 과연 천상의 예배에 적응할까요? 적응할 수 있을까요?
책 몇 권 읽었는지, 개혁주의인지 알미니언인지 따위가 중요한게 아니라, 성경에 무수히 등장하는 천상의 예배에 관한 묘사와 서술들에 대하여 성령께서 빛을 주시는 그 아름답고 황홀한 광경들이 이 시대 사람들이 반응하고 열광하는 것들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지를 놓고 저는 간사님이 더 깊이 말씀을 연구하며 기도하셔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감리교 목사로서, 트로트 찬양이니 전자댄스뮤직 찬양과 같은 것들이 감리교에서 자꾸만 생겨난다는 것에 참 상심이 크네요.
성령께서 어둠과 무지 가운데 있는 이들을 밝은 진리의 빛으로 인도하시기를 위해 생각날 때마다 기도하겠습니다.
목사님 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는 무지랭이 아줌마 집사입니.
서로 다른 생각들.날리지들.관점들….와.놀래고. 스마트!
*하나님이 어떤분이신지에 대한 인식.*
천차만별이죠.
각 사람의 신앙에서 완전 중요하죠.결정적이죠.삶에.그중 음악도.
그래서 성경이 보여주죠.
계속.수없이 말하죠
그분이 어떤 분이신 지
조승래씨의 접근에 무지랭이 아줌마 집사 한표.
뜨거운 이슈인지라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의견을 개진하시는 모습이 좋아보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론이 가지는 풍성함이 아쉽다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다른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에만 천착하지 않고, 각자각자가 그 입장을 고수하는 까닭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최대한 포용적으로 받아들일 때 토론은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무리 설득력을 가지고 접근해도 자신만의 진영논리에 빠져서 ‘그건 너의 입장에서 한 말이니 나의 입장과 무관하다’는 기계적 반응으로 일관하시는 분들을 보면 그럴 바에는 굳이 애써서 의견을 내실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지기까지 합니다. 어쨌든 거듭나 새 사람이 된 자로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 분의 기쁨을 공유하는 정서로 바른 찬양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은 모두에게 있을 것인데 말이죠…개혁주의가 결코 ‘교조주의적 꼴통’이 아님을 온라인 대화창구를 통해서나마 몸소 보여주시려는 글쓴 분의 좋은 의도가 열매맺는 날이 오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진리안에서 우리의 삶의 모든 섬김이 아니 그냥 우리의 삶 자체가 거룩한 찬양이고 예배로 올려져야함이 먼저겠지요. 하나님앞에 무릎을 얼마나 드리는지 주님이신 성경말씀을 얼마나 아는지 찬양드림에 꼭 빠져선 안될 요소들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성대결절로 15년의 성가대를 내려오면서 목소리가 아닌 영으로 마음다해 얼마든지 주님을 찬양할수 있음을 가르쳐 주셨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찬양이 무엇이실지 진심 궁금한 1인입니다. 궁극적인 우리 찬양의 목적은 진리안에서 영으로 찬양드려야할 하나님이라는것만…다시 묵상해봅니다.
사람은 대개 자신이 ‘보고’, ‘듣고’, ‘배운’, ‘틀’ 안에서 이야기하기 마련입니다.
그 틀 안으로 내가 보고 듣고 배운 것과 다른 것을 보고 듣고 배운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1)호기심 2)경계 3)적대 4)환대 5)찬동
등의 다양한 반응이 있겠지만, 이러한 반응의 기준 역시,
내가 보고 듣고 배운 것들과의 ‘유사함과 생경함’에 따라 나뉘어질거라 봅니다.
EDM이 찬양이 될 수 있다, 없다.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신앙에 천착하는 개혁주의자들 입장에서는 ‘없다’라는 반응이 지극히 당연할테고,
문화의 상대성과 다양성을 옹호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반응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누구나 자신에게 익숙한 사고의 틀 안에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그 익숙한 사고의 틀을 깨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
하지만 ‘기독교’라는,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익숙한 사고의 틀보다 ‘절대자의 말씀’이 모든 사고와 준거의 틀이 돼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내가 인용하는 책, 사람, 경험들의 불가피한 ‘제한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을 뿐더러, 설령 경험한다 할지라도,
그 경험은 ‘내가 살아 존재하는 동안’이라는 ‘유효기간’이 분명히 있습니다.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될 때,
모든 입은 그 앞에서 침묵하거나 경탄합니다.
어떤 기교나 재주를 부릴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겁니다.
음향이 어떻고, 장르가 어떻고, 음정과 박자가 어떻다고 판단하고 분석할 겨를도 없을 겁니다.
위에 조승래목사님(감리교라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찬양에 대한 기준이 자꾸만 내가 ‘보고’, ‘듣고’, ‘배운’ 틀 안에서 이해되고 정의되는 오늘날의 현상에 대해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표현인 ‘찬양'(=기리다, 높이다)이
꼭 EDM이어야만 하거나, 꼭 종교개혁 시대의 그것이어야만 하다기 보다는,
내가 드리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기림'(뛰어난 업적이나 바람직한 정신, 위대한 사람 따위를 추어서-훌륭하거나 뛰어나다-말하다)이 되는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높임’ 받으시는지,
항상 마음에 새기고 의식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