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하다’는 말은 때로는 교회에서 재미없는 사람을 놀릴 때 사용합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로 장난으로 많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말을 아무렇게나 하면 어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교회 안에서 이 용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도록 개념을 정리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표현하는 용어의 대표격인 경건은 우리가 아름다운 것으로 소망하면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우리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경건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서는 칼빈이 말하는 경건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비록 수백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이 경건한 교회의 스승으로부터 배울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건이란 무엇인가
칼빈은 경건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1]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은 그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오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단순히 신자가 도달하는 어떤 종류의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건은 신자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드러냅니다. 네, 관계이기 때문에 경건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부분과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죠. 이렇게 경건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경건은 오직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격적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능한 것으로 인격이 없는 다른 피조물들은 이 관계가 불가능합니다.
또한 칼빈은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면서, 그 안에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믿음이 있다고 언급합니다.[2]
여기에 실로 순수하며 참된 종교(경건)가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신앙(믿음)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자발적인 경외를 내포하고 있으며, 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정당한 예배를 수반하는 것을 뜻한다.
두려움은 자발적인 경외를 내포한다는 말을 통해 경건은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왜냐면 신자가 아니라면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경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자발적인 경외는 정당한 예배를 수반한다고 말합니다. 즉 경건은 예배와 연결되며 예배를 포함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예배는 신자의 모든 삶을 포함하므로 경건은 신자의 모든 삶에 관계되며, 신자의 삶의 어떤 사소한 한 부분도 경건에서 떨어져 생각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칼빈은 경건이라는 것이 적절한 한계 안에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3]
그러나 경건이란 것은, 확고한 기반 위에 서기 위해서 적절한 한계 안에 스스로를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경건은 어떤 한계, 또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런 질서 안에서 경건은 신자를 확고한 기반 위에 서게 합니다. 경건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방종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면 그 한계와 질서를 규정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문병호 교수님은 자신의 책 『30주제로 풀어 쓴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이 말하는 경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4]
경건은 위로부터 하나님의 계시를 내려받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과 교제하며 교통하고 아래로부터 합당한 예배를 올려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경건과 하나님의 계시 사이의 연결 고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경건의 질서와 한계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계시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가 무엇인지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경건에 필수적입니다. 아랫 부분에서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칼빈의 헌사를 인용한 부분을 봐도 이것은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계시를 통해 주어진 질서와 한계 속에서 신자는 경건의 비밀을 누리며 확고한 신앙의 기반 위에 서게 됩니다. 또 이 경건에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과 교제하고 교통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고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바로 교제의 모습이죠. 그렇기에 경건은 지루한 것이 아니라 놀라운 축복입니다. 독생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원 무한하신 삼위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경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내려받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과 교제하고 교통하는 것, 그리고 자발적인 경외가 포함된 엄숙한 두려움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인격적 피조물인 사람, 그 중에서도 택함받은 신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건은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질서와 한계를 부여받습니다.
경건의 중요성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 기록한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5]
나의 의도는 다만 몇 가지 기초적인 원리를 기술하여 종교에 열심있는 사람들이 참된 경건의 생활을 이루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기록한 목적은 참된 경건의 생활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이 지향하는 바가 바로 참된 경건이었다는 사실은 칼빈이 경건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왜 경건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일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사는 모습이 바로 경건이기 때문입니다.[6]
더우기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목적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여기에 도달하지 못할 때 그것을 불안정하고 허망한 것이라고 본다면, 자신의 모든 사상과 행동을 맞추지 않는 사람은 창조의 법칙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경건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내려받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경건에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필수적이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자신의 모든 사상과 행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떠나 있는 자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경건하지 못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이 없다면, 그 사람은 창조의 법칙에 벗어나 있는 상태이며,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은 결국 불안정하고 허망한 것이 될 뿐이라고 칼빈은 말합니다. 불안정하고 허망하지 않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경건은 필수적입니다.
더 나아가 경건은 참된 행복과도 연관됩니다.[7]
이것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하나님을 알도록 초대되고 유인되며, 여기서부터 인류는 참되고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참된 행복에 도달합니다. 계시를 내려받아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고 그분과 교제하는 자는 그러한 행복 가운데 사는 자, 혹은 그 행복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삶은 단순히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살아가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경건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분과의 교제와 교통이라는 엄청난 축복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경건한 삶을 통해서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참되고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게 됩니다. 경건을 떠난 사람은 어떤 것을 추구하고 어떤 삶을 살더라도 이런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참 행복을 찾는 사람은 누구든지 경건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 그리고 하나님을 떠났기에 경건의 소망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자의 삶은 언뜻보기에는 화려해보일지 모르나 사실 매우 비참한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경건이 아름답고 추구하고 싶은 것으로 여겨지시나요? 오늘날처럼 멋진 외모를 소망하고 모두가 그것에 관심을 쏟는 때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분명 우리는 외모에 관심을 쏟는 이상으로 경건에 관심을 기울이고 소망해야 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딤전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