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기 전, 고민하다
오래된, 정말 오래된 독자가 있습니다. 이헌주 목사님이십니다. 진짜배기에 정규를 영입하기 전, 영광과 재국으로만 조촐하게 운영하던 시절부터 들러서 읽어주시고 트위터로 실어나르고 간혹 애정어린 응원의 목소리도 내주신 분이시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 목사님 페북 계정으로 작은 교회 이야기가 올라오기 시작하고,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 세월호 관련 사진과 글들이 간혹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렴풋이 ‘아. 교회 개척하셨나보다. 세월호 관련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네.’라는 생각만 했더랬죠. 진짜배기가 모여 세월호 2주기를 기억하며 무엇을 하면 좋을까? 질문하며 회의하다가 목사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서, 아니, 겁이 많아서 선뜻 유가족들에게 직접 찾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개혁신학을 사랑하고 잘 이해하고 계신 분으로서, 유가족들을 곁에서 본 (것으로 예상되는 – 구체적으로 얼마나 관여하고 계신지 몰랐기 때문에..) 분으로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저희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셨고, 함께 합정 모 카페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시간 반 정도 나눴습니다.
처음 목사님께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제 마음은 “아- 잘 모르겠다.” 였습니다.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질문할까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세월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하는지, 실제 유가족들과 그 주변에 있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 고민해봐도 여전히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모르는 채로 가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은 저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언론과 SNS 등을 통해 전달되는 세월호 사건을 보며 슬픔과 아픔은 커져가고 부담은 슬픔과 함께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지만 이미 짙어진 정치색이나 갈려버린 주변의 눈길로 섵불리 다가설 수도,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어 낙심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종의 해결책을 얻어내거나 특정 방향으로 인터뷰를 끌어가기보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목사님께서는 교회를 개척하신 것이 아니라 작은 교회로 청빙 받아 담임 목회를 하고 계신 것이었고, 세월호 관련해서는 처음에 교회2.0에서 시작한 (하지만 지금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천막카페에서 활발하게 섬기고 계시더군요. 생각보다 더 가까이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 들여쓴 옅은색 부분은 이어지는 대화를 요약하고 그에 대한 제 느낌을 쓴 것입니다.
- 목사님 대화 부분이 길어서 낮춤말로 처리했습니다.
만나다
반가운 인사와 안부가 오갔습니다. 실제 뵌 것은 처음이지만 처음 뵌 것 같지 않게 편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세월호 관련 일들에 어떻게 관여하게 되셨는지 여쭤보았습니다. 선교를 나갔던 개인적인 경험이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았습니다. 선교지의 교회와 한국에서 익숙하던 교회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매울 수 있는 신학적 해명이 필요하다고 느끼신 것 같습니다.
헌주: 선교를 나가게 되면서 교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사람을 바르게 세워나가고 서로 돌보고 섬기는 공동체가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인데 실제 공동체는 슬로건과 이상만 남은 것 같다. 교리를 외치는 동안 사람이 잊혀가고 있고 소외되어가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교회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세월호에 대해 사실 내가 이 이야기해도 되나? 라는 생각을 했다. 현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대표성을 지닐 수 있을까? 단지 조금 더 관심있어 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모두를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영광: 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사람들이 대표성에 대해 생각을 한다는 걸 알게 된 계기가 있었죠. 그래서 저도 목사님 말씀처럼 우리가 곁에 가서 이야기를 들으면 좋지만 그렇게 못했기 때문에 가장 가깝고 친근하게 부탁드릴 수 있는 분께 여쭤보고 싶었던 겁니다. 대표성에 대한 부담은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질문하다
목사님의 말을 듣고 나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꼭 나가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을 현장에 계신 분께 들어서였겠지요.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실제 밖으로 나가는 것, 광화문에 나가는 것을 모두가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목사님의 말 속에서 그래도 교회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광화문 광장에서 함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영광: 세월호 사건에 관심있는 사람과 관심없는 사람으로 사회 전체가 양분되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제가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그 중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관심이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잘 몰라요. 안타깝고 글도 썼고 진심이었고 설교도 했고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죠. 그래서 중간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는 사람으로서 궁금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상태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곁에 함께하셨던 분으로서 목사님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을 듣고 싶었습니다.
헌주: 모인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모여 있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유가족들과 아픈 마음으로 함께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의외로 이 상황을 정치적으로, 개인적인 PR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도 많다. 봉사가 자기 의가 될 수 있고, 다른 일을 진행하기 위한 수단(발판)으로 삼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는 표현의 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자기에게 주어진 형편 가운데서 다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세월호 사건만이 아니라 이 구조의 악함에 대해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다름들을 모두 묶어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야지 ‘나는 적극적으로 하니까 소극적인 너희는 잘못이다’는 잘못이다. 또한 이런 사회적 구조악에 대해 말할 때 주의할 것이 있다. 예전에는 이런 구조악이 발생했을 때 모두가 밖으로 나와서 으샤으샤해야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다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선한 양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자괴감에 빠지게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손가락질한다. 나는 이를 지젝의 말대로 ‘객관적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 성도들도 보수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나도 (세월호 사건을) 많이 다루지 못했다. 내 개인적인 의견을 표현할 수 있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할 때 목사는 중립적일 수밖에 없다. 이쪽 사람도 내 성도고 저쪽 사람도 내 성도다. 그리고 모두가 내가 돌봐야 하는 영혼이기 때문에 내가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입장을 표명하는 것보다 교회에서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 생각을 조금 추스리고 영혼을 보살피는 측면에서 더 넓게 보아야 이 상황이 정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월호 사건을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다만 아쉬운 것은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분명 조금 더 용기를 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문화제로 이름을 바꾸고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함께하는 분들과 이야기하면서 언어도 바꾸고 (다양한 시도를) 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중간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자는 취지다. 중간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연약한 사람들을 확- 끌고 갈수는 없지 않나. 중간 지대를 만들어놓고 문화제라는 이름, 광장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아우르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함께 참여하고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도 매우 중도적 입장이죠? (웃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함께(담임) 하는 교회다. 교회에서 내가 이런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내가 광화문 나가서 일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의견으로 생각하고 양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교회2.0 운동 또는 이헌주 목사 개인 활동으로 언급하지 내 이름 뒤에 괄호 열고 ‘OO교회’라고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교회를 대표하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것에 대한 합의가 중요하다고 본다.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실제 유가족들의 반응이 궁금했거든요. 유가족들도 수가 많으니 분명 그 안에서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목사님께서 만난 분들은 역시 ‘자녀 잃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진 부모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잡아주는 손, 안아주는 따뜻한 품이 오히려 더 위로가 되셨겠지요.
영광: 지금 얼마나 가까이 계신 건가요? 세월호 관련해서 하고 계신 일이 어떤 것이 있나요?
헌주: 천막카페가 교회2.0에서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발을 들이고 있다. 지난 주(4월 첫 주)에 문화제와 콘서트를 한 것은 모두 기획해서 만들어서 한 것이다. 실제로 실무적 일들이 어기적 어기적 넘어오는 경우가 많다. 이름에 대표성은 없지만 실무적인 일은 넘어오면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 책가방 퍼포먼스 할 때도 실제 현장에서 움직인 분들은 천막카페 가족들이다.
영광: 보고 오라고 하신 영상은(목사님께서 이 영상을 보고 오면 도움이 될 거라고 해서 보고 왔습니다) 보고 왔습니다. 그 사회 보신 분이 양민철 목사님이신 거에요?
헌주: (끄덕끄덕) 그 영상이 매우 고민하면서 만든 영상이다. 나오기 전부터 이야기도 하고 어느 수위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지 준비하고 광장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의외로 재미있는 것은 현장에서 소리치는 사람들이 유가족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유가족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쩔 줄 몰라서 한 번 와서 손 한 번 잡아주고 안아주시는 분들을 통해서 더 많은 위로를 받았지 현장에서 많은 것들을 기획하는 사람들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가족들도 이게 다 퍼포먼스라는 것을 안다. 이제는 끌려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을 힘들어 하신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천막카페로 흘러갔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고 어떤 방식으로 하시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천막카페라는 것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제 광화문에서 있었던 여러 형태의 기념 또는 추모 행사들과 작고 큰 이벤트들에 대한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대화 과정에서 목사님께서 세월호 사건을 어떻게 보시는지를 옅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목사님은 두 가지 목적으로 이 일에 참여하고 계셨습니다. 첫 번째는 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 두 번째는 이 사건 자체가 보여준 명백한 구조악 때문에. 그리고 이 두 가지 이유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신 것이죠.
영광: 어떻게 (천막카페에) 관심을 가지고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헌주: 천막카페는 2014년 8월에 광화문에서 ‘국민휴가’라는 이름으로 모이자고 했을 때 시작됐다. 문화제처럼 하면서 카페 같은 것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광화문에서 유가족들과 함께 하고 계시던 최헌국 목사님의 요청이 있었고 양민철 목사님을 통해서 교회2.0과 이야기가 된 것이다. 지금은 2.0 사업으로 보기엔 어렵고 2.0에서도 하나의 협력 사역으로 본다. 천막카페는 2.0 실행위원인 양민철 목사님을 중심으로 하여 나름 조직적인 여러 분들에 의해 재정과 후원 등이 따로 돌아가고 있다.
영광: 처음에 2.0으로 시작해서 약간 사이드로 빠진 거네요?
헌주: 워낙 커지다보니까. 목회자들이 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제 매일같이 나가서 봐줘야하고 운영을 해야하기 때문에 목사들이 다 할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할 수 있는 범위를 지혜롭게 정하고 욕심내지 않는 것이다. 각자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하는 것들의 경계가 다루다고 본다.
영광: 그러면 사람들이 그러면서 조금씩 모인거네요?
헌주: (끄덕끄덕)
영광: 보통 계기들은 어떤가요?
헌주: 그냥 한 번 오신 분들일 어떻게 하다가 훅 남게 되는 그런… 현장의 필요가 있고 하다보니 남게 된 거지.
재국: 천막 카페는 목사님 보시기에 도움이 되나요?
헌주: 지금 광화문 광장에서의 모든 일은 천막카페가 하고 있다. 하다못해 유가족들 식사 등도 모두 천막카페에서 했다. 처음에는 컵라면이라도 먹으면서 끼니를 챙겨야했기 때문에… 행사 수발까지 다 천막카페가 하고 있다.
영광: 그럼 이제 한 1년 반 정도? 1년 반 넘은 건가요?
헌주: (끄덕끄덕)
재국: 1주년 때만해도 커피 내릴 사람 모집하는 공고를 본 기억이 있네요.
헌주: 이제 2주년이 되면서 단지 세월호 사건으로 마무리 될 문제는 아니고… 사회 구조가 가지고 있는 불합리한 모습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목소리를 낼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문화적으로 이런 목소리들을 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느냐?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
영광: 현재 이 일에 하시는 가장 큰 동력은 말씀하신 그런 부분인가요? 구조악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목사님 나름의 몸부림?
헌주: 그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러 많은 일이 있지만 다 할 수가 없다. 내게 주어진 삶을 포기하고 이것만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참여하고 함께하고 현장에 함께 있으면서 움직여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작은 힘들이 (여러 곳에) 분명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힘이 연약한 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사실 사회 현장에서 많이 떨어져 있으니까… 정치 문제든 경제 문제든 사회 전반적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한 걸음 물러서있는 게 현실이니까… 하지만 그러면 바꿀 수가 없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간다? 우리가 계시록에서 보듯이 완벽하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궈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노력은 해야하지 않나.
영광: 명백한 불의에 대해서는 반응해야 한다는 거죠?
헌주: 특히 사회적 고난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좀 더 고민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잘 알다시피 칼빈이나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이 그렇지 않은가.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관여해왔다. 종교개혁자들을 그렇게 좋아한다면 함께 관심가지고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래 전 목사님이 싸이월드에 개인적으로 운영하시던 블로그에 들어가본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카테고리들로 나눠진 게시판에는 여러 글들이 스크랩되어 있었습니다. 본인이 쓰신 글도 많이 있었고요. 카테고리 이름만으로 이분이 얼마나 개혁주의에 깊이 심취해 계신지 알 수 있었습니다. 대화를 통해 신대원 시절 좋은 은사님들을 통해 탄탄한 신학적 뼈대를 형성하신 것이 더 확실하게 느껴졌습니다.
영광: 지금 교단이 그럼 합동이신 거에요?
헌주: 지금은 독립교단.
영광: 그럼 이명을 하신 건가요? 그 전에는 그럼 합동이셨던 건가요?
헌주: 원래는 국제.
영광: 신학교 때부터 목사님의 신학적 배경은 개혁주의였던 건가요?
헌주: 당시 국제에 좋은 교수님이 많으셨다. 신대원에서 이승구 교수님을 만났다. 그분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배웠다.
영광: 천막 카페 멤버들 중에 개혁주의 진영에 속해있거나 교단은 아니어도 개혁주의에 공감하시는 분들이 있나요?
헌주: 없다. 그게 아쉬운 부분이다. 개혁주의 신학을 가지면서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함께 모이면 (다른 신학을 가진 사람들과도) 공유할 수 있는 점은 있다고 본다. 개혁신학에서 깊이 아시는 분들도 세월호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하시지만 실제 현장에 계신 분들은 거의 없다고 봐야할 거다. 내가 아는 분들은 없다.
특히 이승구 교수님께 많은 영향을 받으셨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직도 존경하시고 많이 기억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사석에서의 대화긴 하지만) 개혁주의를 ‘성경 안에서의 자유’라고 정의하신 이승구 교수님의 정의가 새롭습니다. 그리고 깊은 동의가 됩니다. 이 대화 속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광장신학’에 대한 목사님의 중립적 입장이었습니다. 광장은 말 그대로 광장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나올 수 있고, 누구든지 나올 수 있다면 다른 이야기, 심지어 현재 광장에서 회자되는 주류 이야기에 반하는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대화의 장이라는 측면에서 개혁주의는 광장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제 생각은 인터뷰 마지막에 덧붙히도록 하죠.
영광: 원래 목사님과 잘 지내시던 분들이 혹시 안 좋게 보시는 분들은 없나요? 혹시나 해서… 없으면 다행이고요.
헌주: 아직은 없는 것 같다. 불편해 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는 있지만. 하지만 나는 이를 답을 내야하는 지점이 아니라 함께 논의해야 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승구 교수님께 ‘내 생각에 개혁주의는 회색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만 한다. 과연 개혁주의는 뭐냐?’라고 물었을 때 ‘개혁주의는 성경 안에서의 자유다’라고 대답해주셨다. 성경 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가장 좋은 답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답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예를 들어 젊은 지구론에 대해 이승구 교수님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본인은 동의하지 않지만 논의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승구 교수님을 참 좋아하는 이유이다. 내가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떤 지점은 함께 이야기하고 논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도(세월호 관련 일에 참여하는 것) 그런 부분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한신, 기장측 목사님들 만나면 ‘맥주 한 잔 해야지’라고 하신다(웃음). 내가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여러 다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은 분명 있다. 열린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개혁주의는 끝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완성된 표본이 아니라 그 외에 많은 논의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여지를 열어두는 것 아닌가. 계속 고민하고 생각해가야하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모습, 개혁주의 진영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칼빈과 루터가 서로 싸우더라도 함께 이야기했었다. 그 정도 여유는 우리 안에 있었으면 좋겠다.
영광: 혹시 불편해하거나, 불편까지는 아니어도 참여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과 대화해본 적 있나요?
헌주: 참여하기 힘들어하는 분들이 오히려 대화를 안 하려 하시지. 참여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내가 볼 때) 소외되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사회개혁 부르짖는 사람들도 다 스크럼짜고 과격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논의할 수 있다. 함께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광장신학이라는 것을 처음 만든 것도 그렇다.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을 모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이승구 교수님이 ‘광장신학’(합신대학원출판부)을 쓰셨으니 그분도 모시고 말이다. 광장신학을 말하는 것이 단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에큐진영의(애큐메니컬 운동) 전유물이 아니라 여기에 관한 수많은 개혁주의자들의 생각까지도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큐진영 분들은 ‘현장도 없어’라며 우리를 무시하신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더 고립된 것 같다. 이제 우리도 나와야 한다. 동성애 문제든 뭐든, 긍정이든 부정이든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고 풍성하게 되어야 한다고 본다. 광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치적으로 진보적이고 모두 동성애 긍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 자꾸 숨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예의가 별로 없다. 뭔가 보수적으로 이야기하거나 글을 쓰면 ‘니들이 뭘 알아’라며 버릇없고 예의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매우 안 좋은 것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자기 것을 표현할 때 깔끔하고 매너있게 표현해야겠지. 편을 나누는 건 구시대적 방편이라고 생각한다. 편나누기로는 아무 것도 만들어낼 수 없고 아우러야 한다. 복음 안에서, 성경 안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이야기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이슈라면 함께 하고 다른 점이 있다면 각자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상대가 ‘나빠’라고 말하는 사람이 꼭 좋은 사람은 아니지 않나? 상대를 ‘나빠’라고 말하는 사람 자신도 나쁠 수 있다. 상대를 깎아내림으로 자신이 좋은 사람을 만들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가진 것을 예의있게 말하고 대의를 쫓아갔으면 좋겠다. 이제 그렇게 바뀌어야 한다.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세월호 사건은 1.사회적 고난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2.이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창조와 섭리, 신정론과 같은 신학적 전제를 충분히 설명해야 하고, 3.고통이 실존적 문제인 만큼 신비(다 알 수 없기에)라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세 가지 모두 아직까지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특별히 창조와 섭리, 신정론 등에 대한 정통 신학의 전제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지적하신 것은 예리한 통찰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생각 역시 마지막에 덧붙히도록 하죠.
재국: 어떻게 이 주제를 싫어하는 사람들, 특히 보수적이고 개혁주의 진영의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까요? 설교 할 때도 참 어렵더라고요.
헌주: 우리 교회는 이 사건이 터졌을 때 다섯 번 고난에 관련해서 설교했다. 고난을 먼저 분류했다. 개인적 고난, 교회 공동체적 고난, 사회적 고난 등으로. 이것들을 분리해서 봐야한다. 다같이 짬뽕으로 보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 방식들을 하나로 종합할 수가 없다. 개인적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위로가 사회적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적용될 수가 없다. 또 하나는 이 문제가 신정론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다. 창조와 섭리에 대해 반드시 다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정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에 대해 이해하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엉터리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고난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못 알아 듣는다. 내 안에 정리되어 있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예정과 선택만 딱 보고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이 완전히 계획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히 계시되지 않았음을 우리는 믿지 않나? 이런 기본적 이해가 없는 사람들에게 고난과 세월호 문제를 덜컥 이야기하니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답이 없다고 말하면 왜 답이 없냐고 하고, 답이 있다고 하면 왜 그런 답을 내리느냐고 한다. 하지만 실제 답은 있지만 알고보면 명시적 답이 아니다.
영광: 그렇죠. 사람이 원하는 답이 아니죠.
헌주: 그렇지. 이런 중간자적 입장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직신학자들이 많은 경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신비’라고 말씀하시더라. 정말 그렇다. 고난도 신비다.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감추어져 있다. 주제넘게 우리가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이해가 좀 있으면 더 풍성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선재 지식이 없으면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영광: 좋은 지적이네요. 충분한 이야기, 토대가 이루어진 이후에 논의가 이루어져야했다는 거네요.
헌주: 신정론에 대해 생각이 다르면, 창조와 섭리에 대한 이해가 다르면 고난에 대한 이해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다름을 이해하면서 가야한다. 그리고 이는 실존적인 문제다. 실존적인 문제는 감히 어떻게 말해줄 수가 없다. 욥기의 세 친구가 잘못된 말을 한 사람들이 아니지 않나. 하나님을 대변하며 선한 논리들을 가져다 쓰지 않았나. 참 맞는 이야기였으나 인간의 실존적 문제로 내려왔을 때는 알지 못하는 부분, 하나님과 사탄의 거래 등이 있었던 것이다. 현재 일어나는 이 많은 사건들이 신비 가운데 일어나는데 어떻게 모든 것을 알 수 있겠나. 엉뚱하게 신정론적 답, 또는 사회적 과격한 행동으로 (극단적인) 반응으로만 보이기는 어렵다. 유가족들이 실제 원하는 것도 그런 답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살가움, 그 관계, 그 관계에서 피어나는 많은 이야기들, 실제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만 있어도 좋아한다. 답을 내주는 누군가가 아니라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어떤 분들은 이헌주 목사님의 표현 방식이 마음에 안 드실 수도 있을 겁니다. 사용하는 용어만 봐도 사실 개혁주의에서 좀 꺼려하는 표현들이니까요. ‘현장’이니 ‘삶’이니 하는 것들이요. 개혁신학은 현장을 지나치게 고려한 나머지 상황화의 오류에 빠지는 것을 매우 경계합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혁주의 신학이 진보적 신학을 하는 사람들과 다른 땅을 살며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보 신학이든 보수 신학이든 우리는 동일한 고통을 바라보고 설명하며, 동일한 구조를 보고 선악을 따지고 대안을 내놓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목사님의 지적은 생각해볼 가치가 있었습니다.
영광: 대다수의 개혁주의 신학을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함께하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사람은 우리 신학의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과연 이 말이 맞을까요? 아니면 신학은 제대로인데 그냥 나가지 않는 것일까요? 다른 것에 너무 큰 두려움이 있는 것일까요? 신정론에 대해 이야기해주신 이야기가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가기 위해 신학을 수정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믿던 신학을 부분적으로 수정하거나 떠나죠. 하지만 목사님은 실제 나가서 대화하고 계신데 신정론과 고통에 대해 그렇게 (개혁주의적으로) 이해하고 계시기 때문에 좋은 것 같습니다. 이런 구조악에 대해서 내 수준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과 이런 신학을 가지는 것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인상적입니다.
헌주: 나는 현장이 없으면 신학을 담아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신학은 현장 속으로 들어와야한다. 나는 (기획을 가져와서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자주 물어본다. “그게 되?” 현장은 정말 다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변수, 사람은 더 다르다. 수많은 변수들은 신학 체계를 넘어서버린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가치를 주목한다. 그것이 구속이든 하나님 나라든 모든 가치를 타고 올라가면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이 남지 않나? 거기서 다시 거꾸로 타고 내려와서 내 삶을 재정비해야한다. 이 과정에서 옆에 있는 사람이 매우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그를 돕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현장에서 실제 진행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나.
하나님의 의가 우리 가운데 실현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개혁주의에 관심도 없고, 칭의 성화도 관심도 없으나 하나님이 필요한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결국 성육신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개혁주의 신학을 나도 지향한다. 하지만 현장의 정거장들은 아직 미숙하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목표점)을 여기 다 담을 수 있을까? 다 담았을 때 소외된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그 소외된 사람들을 다 버리고 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일까? 어쩌면 칭의와 성화에 관한 논의 같은 것들을 잠시 밀어두고 연약한 자들을 위해 다가가야하지 않나 생각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신학을 현장 속에서 만들어내는 작업들이 부족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조금 더 쉽게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신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현장 속에서 풀어나가는 방식에 차이를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좋은 개혁주의 목사님들의 설교에서 내심 안타까운 것은, 내용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그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은 함께할 수 있는 분들이겠지만 보편적인 일반 대중들을 향한 설교는 아니다. 그분들은 그분들 나름의 소명이 있다고 본다. 내가 가진 소명은 – 많이 공부하지 못했으니 – 보편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그분들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목회하고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교회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설교하고 있는데 그냥 편하게 하고 있다. 그분들이 들을 수 있는 수준에서, 다 설교하지 못하고 한두 주제만… 부족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채우시겠지. 현장에 나오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 삶의 현장에 담으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설교를 케리그마(선포)로 갈 것인지 디다케(가르침)로 갈 것인지… 나는 디다케가 너무 없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너무 일방적으로 선포만 했지 연약한 영혼들에 맞추어서 (하는 것은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연약한 영혼들을 돌보고 맞아주지 않으셨나. 이 두 가지가 함께 가면 좋지 않을까.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제 머리를 관통하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반응해야 하는 걸까요? 반응할 수 있는 걸까요? 이 질문을 드리자 반가운 질문이라는듯이 목사님의 목소리가 한 피치 올라갔습니다. 본인을 여전히 개혁주의 진영 안에 있는 사람으로 여기면서도 광장에 나가 움직이는 목사님이었기에 아쉬워할 수 있는 부분이겠지요.
영광: 제가 영상 보면서 들었던 솔직한 생각은, (세월호 참사는) 그리스도인 개인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이지 지역교회 차원에서 다가가야하는 문제일까? 라는 것이었는데요.
헌주: 교회가 다가올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세월호 문제도 세월호 유가족들만의 문제로 남았다면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 정권교체 등 정치적 이슈들이 훅- 하고 다 들어와버렸다. 교회는 사람을 섬기고 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지만 그 이슈들과 함께할 수 없다. 그래서 나오지 못한다. 이렇게 진행했던 사람들도 문제다. 이해는 간다. 당시 유가족들을 도와줄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뿐)이었다. 여기에 편승해서 정권을 향해 (원래의 목소리를) 막 냈던 거지. 이 부분에서 교회가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다면 다른 양상이 생겼으리라 생각한다. 기본적으로도 교회가 이런 문제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지 않나. 유가족이 어려워서 손을 내밀어야 할 때 소위 진보진영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하나의 이슈로 묻힌 것이다. 온갖 단체들이 다 붙게 된 것이다. 우리는(천막카페) 항상 ‘유가족들만이다.’라고 말한다. 다른 부분은 우리가 손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도가 넘는 분들이 분명 많다. 이들도 진행하는 방식도 바꿨어야 했다. 그건 이쪽(진보진영) 문제라고 생각한다.
영광: 사실 현실적으로 이게(기독교가 주도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 사람들을 벗어나서 우리가 운동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헌주: 그래서 문화로 형성되어야 한다. 외국에서 하듯이 다 이야기를 나누고 추모제를 하고, 다른 것들이 붙는 것이 아니라 이 이슈에 대해서만 대화하는… 이런 문화적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과연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희망은 잃지 말아야겠지.
영광: 아까 개혁주의 진영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에 대해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사회적 분위기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왜 정치적 보수와 함께 해왔는지는 다른 문제겠지만 우리는 사회적 분위기 자체가 운동권에 대해 양극단의 의견을 가진 근대사를 가지고 있잖아요? 한쪽에서는 화염병을 던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폭력으로 진압하고… 이런 권위주의적인 시대의 잔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월호 문제와 전혀 상관없을 수 있지만 사실 최근 큰 교회 목사님들이 윤리적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것도 한 맥락인 것 같습니다. 결국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권위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한 명이 너무 높아져서 부패하기 시작하고, 그 한 명이 너무 높이 있기 때문에 눈치 보여서 나가서 말도 못하는 것이죠.
마무리, 아쉬운…
한 시간 반을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에게 맛있게 저녁을 만들어주기로 했다는 목사님을 더 붙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쉽지만 놓아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넌지시 오랜 독자로서 최근 진짜배기의 (행보랄 것도 없는) 행보를 여쭤봤습니다.
헌주: 도움이 되었나 모르겠네.
영광: 저희는 너무 좋았습니다.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제가 (주도해서) 이걸 한자고 한 이유가 있어요. 정규형과 재국이는 저보다 시사에 관심이 많아요. 저는 원래 관심이 없어요. 대학 때부터 그리스도인이 한 손에는 신문을 한 손에는 성경을 들어야 한다고 많이 배웠어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만 그게 굉장히 힘든 타입이에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린 겁니다. 제가 잘 모르기 때문에요. 그런데 대화를 하니까 오히려 개인적으로 좋은 것 같습니다.
재국: 진짜배기는 어떠세요?
헌주: 난 좋은데. 난 너무 좋은데. 예전 존 파이퍼 목사님 글 올라올 때부터 시작해서… 개혁주의 진영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내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영광: 그렇죠. 시간이 지나면서 한 두 사이트라도 생길 줄 알았는데 많지 않은 것 같아요.
헌주: 복음이 가진 보편성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들려져야 하지 않을까? 어떤 이슈 하나라도 좀 수월하게 받아들이면 좋겠는데 너무 학술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학술적인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 같고. 하지만 진짜배기는 좀 편하게 볼 수 있쟎아. 이슈들도 다양하게 (다루고)… 누가 뭐라고 댓글 달아도 멘탈 강하게 자기 갈 길 가면 되는 거다. 내가 가진 컨텐츠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지. (댓글다는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생각을 표현하는 것 뿐이니까 일희일비하지 말고 있는대로 말해라. 다만 이 좋은 이야기들을 보편적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난 존 파이퍼 목사님의 가장 큰 장점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어려운 이야기를 평이하게 설명하시잖아. 평이하게 책을 내시지만 내용은 매우 깊어. 그런 모습이 참 좋다.
영광: 이제 가셔야겠네요.
헌주: (끄덕끄덕)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했네.
영광: 아니에요. 저희가 물어본 건데요. 예상했지만 역시나 편하게 잘 얘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웃음)
뒷 이야기
앞서 말했듯이 부끄럽게 고백하지만 전 세월호 사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당시 섬기던 중고등부에서 설교도 했었고 마음도 많이 아팠지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다소 냉소적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언론의 보도를 통해 눈과 귀로 들어오는 정보들을 걸러낼 자신이 없어서 냉소적이 되기를 선택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네요. 그래서 이헌주 목사님과의 만남은 개인적으로 참 따뜻해지고 다시 한 번 세월호 사건을 어떤 각도로 접근해야하는지를 고민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그들은(그들이 누구든) 다른 신학적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신정론이나 고난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기 힘들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폭력적으로 느끼는 이유는 많은 경우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신 것이죠.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사람들에게 들리게 하기 위해 신학을 포기하거나 타협하는 것이 아니고, 곧장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떠넘겨 그들을 무지하다거나 강팍하다고 매도하지 않고, 꾸준히 설명하고 설득해야하는 것이죠. 심지어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 안에서도요.
이런 핵심 가치는 목사님이 개혁주의를 사랑하는 목사님들 사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실제 광화문에서 섬기며 일하게 하는 동력이었을 겁니다. 핵심적 가치는 타협하지 않고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함께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리고 생각대로 정말 함께 해보는 겁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학적으로 우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목사님을 통해 나의 내면 깊숙한 모습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아프고 연약한 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 우는 자와 함께 울고자 하는 마음보다 신학적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면대면 만나는 두려움이 더 큰 것 아닐까요? 어쩌면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준 강도 만난 사람 곁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초점은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데 있었습니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여관주인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그는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신학적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람들은 어려운 이를 도와주러가는 도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이와 함께 하려면 그냥 (어떤 방식으로든) 어려운 이와 함께 하면 됩니다.
목사님과의 대화 가운데, 그리고 대화가 끝나고 나서 곰곰히 생각하며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나 의문이 생기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구조악을 대항하는 교회의 바른 반응은 무엇인가? 목회자는 과연 개인인가? 우리가 광장에 나가 개혁주의적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로 광장은 열려있지 않은 것 같은데? 와 같은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제 머리는 별 수 없이 신학적이고, 별 수 없이 논리가 우선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오랜만에 따뜻한 개혁주의를 만났습니다. 마치 ‘뜨거운 얼음’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두 단어가 한 사람 안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월호’로 대변되는 2016년 대한민국의 평범한 소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개혁주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견딜 수 없이 차가운 살얼음판을 살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의 엄정함이 수많은 차가움 중 또 하나의 차가움에 불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자는 그 안에 불타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참 따뜻함을 지닌 사람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