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카슨 – 성경신학으로 설명하는 부활

Photo by Alex Berger. Fl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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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 우리가 어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듯이 부활절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부활절의 가장 매혹적인 측면 중 하나는 부활이 신약성경에 난데없이 등장한 주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구약을 주의 깊게 공부한다면, 부활절 일요일 무덤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를 가리키는 구약의 온갖 암시가 보일 것입니다. 그러한 관련성들을 설명해주실 분을 이 시간 전화로 연결하려고 하는데 친절하게도 돈 카슨 박사님께서 한 번 더 함께 해 주시겠습니다.

카슨 박사님은 복음연맹The Gospel Coalition의 우리 친구들과 파트너쉽 형태로, 오늘 코너에 참여하여 도움을 주시겠습니다. 카슨 박사님은 복음연맹의 공동설립자 겸 의장이시고, 성경신학적 주제가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에서 발전해나감에 따라 그 주제들을 다루는 새 NIV 존더반 스터디바이블의 편집자이십니다.

카슨 박사님, 다시 이 코너에서 우리 청취자들에게 성경신학을 말씀해 주신다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경 줄거리의 다양한 주요 주제를 헤쳐나가는 가운데, 오늘은 우리가 부활주일을 기념하여 부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시작하지요, 이 시간 저희가 부활절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카슨: 이 시간 부활–먼저는 예수님의 부활, 그 다음은 마지막 날 우리의 부활–을 곰곰이 생각해보기 원하는데, 이는 우리가 용어의 의미를 두고 일치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부활이라고 할 때 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영혼이나 혹은 그와 유사한 존재양식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죽더라도 몸을 입은 방식으로 다시 사는 것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 진짜 몸을, 궁극적으로 변형된 몸을 입고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강조는 진짜배기)

조금 뒤로 물러나보죠. 성경은 죽음을 뛰어넘은 존재양식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몇몇 대목에서는 부활, 다시 말해서 죽음을 뛰어넘은 몸으로서의 존재양식을 이야기합니다. 대부분 구약에는 그런 대목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데, 확실히 구약에서 부활을 다루는 대목이 신약보다 흔치 않지만 생각보다 많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22장에는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칠뻔한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시며 친히 희생제물로 숫양을 마련하십니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아브라함의 동기를 더 밝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에 대한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추론을 히브리서 11:17–19과 해당 장에서 얻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아들, 첫째 아들로 인해 계보가 이어지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그 아들을 죽이라는 명을 내리신 것을 아브라함이 믿었을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아들 이삭을 능히 살리실 줄로 믿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는 스티그마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입으신 상처가 여전히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다른 모든 부활과 구별되는 것은 그분의 몸이 변형되었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몸으로 존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비롭거나 천상의 혹은 물리적인 형체가 없는 그런 식의 새 생명이 아닙니다. 부활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어야 하는 이유는, 이삭이 살아서 다음 세대에 자신의 씨genes를 물려주고 그 다음 세대도 그러기를 계속해야 하기 때문인데,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무효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부활 개념과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부활에 대한 가능성이 이미 있었고, 메시아를 믿는 백성들에 대한 언약적 약속이 시작되는 시점에 아브라함이 이해한 것은 그러한 개념과 가능성이었습니다.

욥기에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번역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구절로 알고 있지만 저는 NIV가 올바로 번역했다고 봅니다. 욥은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욥기 19:25–27)

여러분이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제법 극적인 일임을 알게 됩니다. 욥은 가죽이 벗김을 당하고 무덤에서 육체가 썩어 없어지더라도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영과 영으로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리라”고 했다면 이른바 중간상태를 말하는 것일 터이지만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육체가 다시 살아날 부활을 전제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이것은 각 개인의 부활이 개인의 몸의 부활을 수반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모두가 부활의 전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으로 부활이란 언어를 사용하는 구절들이 있지만, 그것은 일차적으로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에 대한 것이며 바벨론에 의해 진멸되다시피 하여 포로가 된 이들의 회복을 말씀하는 구절들인 것입니다. 이들 중 익히 알려진 것이 에스겔 37:1–14인데, 여기서 에스겔 선지자는 마른 뼈 골짜기 환상을 보고, 여기서 우리는 그 유명한 흑인영가를 떠올립니다. “너희 뼈들아, 너희 뼈들아,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리고 환상에서 이 마른 뼈들이 연결되지만 아직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뼈들이 연결되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 뒤에 비로소 그들은 살아나는 것이며, 한 때 골짜기 마른 뼈였으나 이제는 생기 넘치는 강력한 군대로 일어나 서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의 맥락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회복시키는 것과 관련된 이미지인데, 그전에 그 땅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추방하심으로 이들은 망명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37장의 이미지가 회복을 이야기하지만 주목할 것은 그 이미지가 부활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 성도들은 부활을 전혀 모른다고 주장하는–구약 성도들이 부활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는–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스겔서 37장 자체가 명시적으로 부활을 논하지는 않지만 직접적인 맥락에서 망명에서 귀환한 이야기에 사용된 이미지가 부활의 이미지라는 것이며, 그러한 구분이 에스겔 선지자의 생각과 백성의 생각 가운데 이미 있음을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24–27장도 마찬가지이고 56장도 얼마간은 그렇습니다. 이사야 24–27장, 이 장들은 때로 이사야식 종말이라고 하며 여기에는 여러 다른 종말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이를테면 이사야 26:18–19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하나님의 주권은 전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행사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 모두는 전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위 이사야 장들에 나타난 사고의 정확한 흐름은 얼마간 반드시 논쟁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망명 또는 그와 다름없는 삶에서 귀환한 내용으로 결론짓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은 무덤에서 살아난 몸을 수반한다는 등등의 관점에서 분명히 또 다시 논쟁거리가 되고 맙니다. 부활은 대단히 강력한 언어입니다.

구약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부활과 같은 기적이 있으며 그 중 수넴여인의 죽은 아들이 살아난 사건은 분명 완전한 기적입니다 (열왕기하 4:8–37).

신약을 찾아보면 예수님께서 몇몇 사람들을, 특정한 개개인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를테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 장례를 치르려고 그 아들의 시신을 메고 나오는 것을 보시고는 죽은 그 아들을 다시 살리십니다 (누가복음 7:11–17). 그 다음으로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놀라운 사건이 나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되었기에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사람을 다시 살리는 부활과 단지 심장 세동(細動)에 빠진 것일 뿐 실제로 죽지 않은 사람을 소생시키는 일, 이 두 가지는 전혀 혼동할 일이 아닙니다. 이미 시신이 썩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1:25) 라고 말씀하시는 맥락이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복음 11장의 그 약속 바로 전에 마르다는 자신의 정통신앙을 고백합니다. “마지막 때에 부활이 있는 줄 믿나이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제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믿나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한복음 11:24–26)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만물의 중심에 개입해 들어오십니다. 이는 마지막 날에 부활이 있을 뿐 아니라 마지막 날에 예수님 없이는 부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부활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을 극적으로 드러내실 때 마침내 입증됩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부활은 유일무이합니다. 그것이 유일무이하지 않다면 나사로가 예수님보다 앞서 부활했기에 그가 부활의 궁극적 원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구약에 나온 수넴여인의 아들도 예수님 보다 앞서 부활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수넴여인의 아들은 예수님에 앞선 부활의 원형이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다가올 것의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의 원형이 아니고 예수님이 부활의 원형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때 그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의 몸과 죽음 이전의 몸을 연결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부활은 자신의 몸이 변형되었다는 점에서, 그 변형이란 점에서 모든 부활 가운데서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옛 몸, 즉 그분의 죽음 이전의 몸과 스티그마타, 즉 십자가 처형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부활의 몸 간에 연결성이 있습니다.(강조는 진짜배기)그것은 요한복음 20장의 요점 중 하나입니다.

이는, 본래 있던 쌍둥이 형제를 서둘러 데려왔다거나, 예수님을 빼닮은 어떤 사람을 서둘러 데려와서 사람들이 집단환영을 본 것이라는 주장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으레 십자가 처형에서 생기는 상처 외에 이례적으로 흉곽 아래를 창으로 찔려 심막을 관통한 상처를 입으셨으므로, 제자들이 몇 번이고 거듭 만나서 알게 되는 것은–신약에 기록된 적어도 10명과 11명의 제자들부터 하나 둘부터 7명의 무리, 10명이나 11명의 무리 그리고 마침내 500명에 이르기까지–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몸이었고 이들 기록은 하나같이 십자가 죽음 이전의 몸과 부활 이후의 몸의 연속성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덤에 들어가신 분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무덤은 비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얼마간 무덤에 들어가실 때와 똑같은 몸입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나온 이분 또한 예수님–역사적 인물이신 그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소망은 비물질적인 실재로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활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동시에 예수님은 지금 부활의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생명을 입고 계실 때에 잠긴 방 안에 나타나시는 등 이전에 하지 않은 일을 행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들 말합니다. 예수님은 물질적인 실재 혹은 비물질적인 실재로 나타나신 것이다 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다른 영역에서 실재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전의 몸과 부활 이후의 몸, 이 둘 간의 연결성이 어느 정도까지 과학적인지 혹은 존재론적인지 우리로서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긴 분량을 할애하여 이 부활생명의 의미를 파악하는 한 곳은, 고린도전서 15장이고 거기서 사도 바울이 몇 가지 유추를 드는데 바울 자신이 그 내용이 유비임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그 내용은 우리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말해주기로 의도된 유비입니다. 도토리는 참나무처럼 보이지 않지만, 도토리가 죽으면서 껍질이 썩어 떨어지고 속에 붙어있는 작은 생명이 움트고 자라면, 마침내 커다란 나무가 됩니다. 이것은 유비에 불과하나 효과적인 유비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다른 실체들의 다른 영광을 말하는데, 별과 달과 해 등이 그것입니다. 존재는 각기 다른 질서가 있으므로 사도 바울 또한 부활의 몸을 다른 질서의 존재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두세 군데 다른 성경구절들이 있습니다. 제가 간단히 언급한 요한복음 20장의 스티그마타, 곧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으로 입으신 상처가 크게 강조되는 그 대목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스티그마타는 부활의 실재를 의심하던 도마를 납득시키는 증거입니다. 스티그마타는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 예수님의 죽음 이전의 몸과 실제로 연속성을 갖고 있음을 도마에게 납득시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 증거는 이제 살아나셔서 주님으로서 통치하시는 이분이야말로 상처 입으시고 죽임을 당하신 메시아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 도마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외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

예수님, 곧 하나님이 약속한 분이 참으로 어떤 분인가를 입증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데,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자 만유의 주께서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증인을 자신을 증명할 근거로 삼으신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주 많이 그리고 여러 차례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누적된 증거는, 부활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환영을 본 것이거나 무슨 음모를 꾸며낸 결과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런 누적증거는 대단히 강력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본 것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4:20). 이들을 위해 큰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특권의 표시로 여깁니다. 스스로에게 불어넣은 자기확신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기록은 하나같이, 그들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을 얼마나 더디게 얼마나 낮은 자리에서 믿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면–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심지어 사도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환상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게 되자–예수님이 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거라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승인한 분vindicated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무죄하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신의 죗값을 치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거라면, 예수님이 살아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죄한 분으로 입증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써 되는 것이지 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이들의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아주 기쁘게 받으실 것이었기에 그 정당성vindication은 특히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에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통치하시는 주님으로서의 지위를 현재 확고히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주권은 그리스도 예수, 곧 이 시대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받은 중보자이신 그분을 통하여 행사될 것인데, 하나님께서 마지막 원수를 으스러뜨릴 때까지 그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26은 맨 마지막에 멸망할 원수가 바로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한 다른 성경본문은 고린도후서 5:1–10이고 생각건대 사도 바울이 분명히 밝히는 것은, 바울 자신의 궁극적 소망이 다만 죽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의 궁극적 소망은 죽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고 그것은 그만큼 경이로운 일일 것입니다. 이 소망은 빌립보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간절히 바라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5장에서 밝히듯이 사도 바울의 궁극적 소망은 벌거벗지 않고 육신을 입은 채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의 궁극적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중간 상태”라고 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의 궁극적 소망은, 몸 곧 부활의 몸이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육체와 같은 몸을 다시 입는 것인데, 그 몸은 이 지상에서 새롭게 된 지구에서 살고, 일하고, 먹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소망은 비물질적 실재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뿐 아니라 새롭게 된 하늘과 새롭게 된 땅에서 부활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이 모두는 궁극적으로 소망을 가져옵니다. 베드로전서는 이것을 훌륭하게 진술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전서 1:3–9)

다시 말해서, 현재 우리는 이미 우리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산 소망이 있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게 하는 유업–부활의 몸을 수반하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의의 본향에 대한 약속–을 물려받게 합니다. 성경에는 생명의 부활–다시 말해서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것은 지옥, 곧 죽음의 부활–이 나오지만 그럼에도 신자들의 확신이자 기쁨이요, 기대이자 소망은 예수님이 그들의 죗값을 치르시려고 자신을 내어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확신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이 두 가지는 시대의 전환점, 곧 역사 전체가 이미 동터오는 새 시대로 방향을 틀어 완성에 이르도록 하는 전환점으로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역사가 완성되는 그 때 주님은 전적으로 영화로우신 부활의 몸을 입고서 돌아오실 것입니다.

호스트: 부활을 성경신학적으로 아주 훌륭하게 설명해주셨고 이것은 우리에게 시의적절한 말씀입니다. 카슨 박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멋진 부활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카슨: 청취자 여러분들도 멋진 부활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분이 부활하셨습니다.

호스트: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카슨 박사님.

 

D. A. 카슨은 일리노이 디어필드에 있는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신약학 연구교수이다. 복음연맹The Gospel Coalition 창립멤버이며 현재 의장직을 맡고 있다.

 

Over de auteur

주성

번역자를 꿈꾸던 시절 존 파이퍼 목사의 설교를 만나 그의 설교와 더불어 종교개혁 전통을 따르는 신앙 선배들의 유산을 어느덧 함께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현재 기업의 기술문서를 번역하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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