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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삼위일체 – 02.우리는 어떻게 사랑에 빠질까요?

지난 번 글에서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그 동기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또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 걸까요?

우리는 어떻게 사랑에 빠질까요?

우리는 어떻게 사랑에 빠질까요?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되죠. 우리는 언제나 사랑에 빠지니까요. 우리는 온갖 종류의 존재와 사랑에 빠집니다. 우리는 돼지고기나 밀가루와 사랑에 빠지고, 그 둘로 만든 탕수육과 사랑에 빠지고, 그 탕수육을 만들어 주는 이현복 셰프와 사랑에 빠집니다. 우리는 수백 수천가지의 컨텐츠를 방영해주는 텔레비전과 사랑에 빠지고,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태양의 후예와 사랑에 빠지고, 태양의 후예 극중 시진이나 모연이와 사랑에 빠지고, 그 역할을 연기한 송중기나 송혜교와 사랑에 빠집니다. 우리는 컴퓨터와 사랑에 빠지고, 그 중 잘빠진 애플 맥북 프로와 사랑에 빠지고, 맥북 프로를 만들어 낸 스티브 잡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은 이렇게 꼬리를 물고 다양한 존재들을 향해 뻗어나갈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기도 합니다. ‘자기애’라고 하죠. 또 어떤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자신을 즐겁게 해주지 않지만 시리아 난민들이나 아프리카 기아들이나 계속 증가하기만 하고 줄어들 줄 모르는 사생아들이나 집창촌 직업 여성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가서 봉사를 하기도 합니다. 굉장히 다양하죠?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볼 수 있을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 묶냐고요? 왜냐하면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죠. 핵심적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만한 공유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보며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더 많은데 일단 두 가지만 얘기해보도록 하죠.) 첫 번째,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합니다. 두 번째, 우리는 사랑하며 기쁨을 얻습니다. 어쩌면 기쁨을 얻고자 하는 행위 자체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죠. 아마 ‘엥? 그럼 이건? 그럼 저건?’하고 이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 같은 오만가지 ‘사랑’들이 생각나실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잠깐 가지려고 합니다.

아름다움을 갈망하다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면 사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다’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쁜 것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말이 나온 김에 자랑을 하자면 지난 달에 드디어 제 딸이 태어났습니다. 제 딸을 보니까 무지 작습니다. 실제 작게 태어나기도 했고요. 그런데 있을 게 다 있더라고요. 그리고 신생아실에서 면회할 때 보니까 다른 아기들도 그렇게 작은데 다들 자기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더군요. 전 다 비슷해 보일 줄 알았거든요. 그리고 어디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자랑은 여기까지하고 원래 얘기로 돌아오죠. 사람들은 대체로 아기들을 좋아하고 사랑스러워합니다. 그리고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 너무 귀엽다!’ 부모야 아기가 자기 자식이니까 사랑한다지만 왜 지나가는 행인이 우리 아기를 좋아해줄까요? 귀엽기 때문이죠. 작고 앙증맞은 손 흔들면서 눈 껌뻑거리면 나쁜 마음 먹었다가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걸 느끼게 됩니다.

이런 예는 끝도 없이 들 수 있습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매년 봄 흐드러지게 펴 대지를 덮어버리는 벚꽃을 보고 ‘와- 너무 이쁘다!’를 연신 내뱉으며 기뻐하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겁니다. 벚꽃이 내 인생에 해준 것도 없는데 시간과 돈을 들여서 꽃구경을 갈 만큼요(사람을 더 많이 보고 오는 건 함정이지만…). 우리는 아름다움을 갈망합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아름답지 않은 것을 사랑해야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 아닌가요!?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는 말이 참 당연해 보이지만 분명 마음 한 켠이 불편하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도 참 많지만 밉고 못난 것도 참 많으니까요. 그리고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발견하게 되는 옥의 티는 어쩔 수 없이 포토샵을 키고 ‘잡티 제거’ 작업을 하게 만들죠.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않은 사람, 불구자와 정상인을 비교했을 때 ‘누가 아름다운가?’라고 물어본다면 대부분 건강한 사람과 정상인이 더 아름답다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건강하지 않은 사람도 불구가 있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도 사랑해야 하지 않나요? 어떤 분들은 발끈하실 겁니다. ‘아니 어디가 어때서요! 몸이 좀 불편하다고 아름답지 않다니요!’라면서요. 하지만 방금 발끈하시면서 사실 정답을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못한 것을 구분해내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비교하여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을 복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몸이 좀 불편하다고’라는 말 자체가 몸의 현 상태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죠. 하지만 ‘아름답지 않다니요!?’라는 반문은 ‘우리에겐 몸 외에 아름다운 것이 참 많습니다.’라는 전제를 말해줍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참 많은 사람은 다른 이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잘 발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팔이나 다리, 심지어 정신이 아프고 불완전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에서, 그들의 연약한 상황 자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심지어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 ‘아름답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지만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곤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 사람을 조금 더 아름답게 해주기 위해 애씁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합니다. 아름답지 못한 것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아름답지 못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아름답게 될 모습을 기대하며 사랑하거나 다른 각도나 깊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하신 적 있는가?라고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고 답답해하기도 하고,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도 해보고, 어떻게 도움을 좀 받아볼까 고민하며 신앙 서적도 읽습니다. 하다못해 주변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특별한 분들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만약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라면, 모든 만물과 인간을 향한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면 우리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아름답게 여겨야 하는 것 아닐까요? 아니,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우신 분으로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을 사랑하라거나 사랑하기 힘든 다른 존재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의지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아름답다고 생각되지 않는, 어떤 존재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아름답다고 여길 수가 없는, 또는 앞서 말한 장애를 가지신 분들처럼 어떤 부분이 실제로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순종함으로 사랑을 보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억지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랑의 대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사랑이 솟아오르게 되니까요.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리의 사랑 없음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사랑이 없는 것은 우리 눈이 고장나서 그렇습니다.(물론 눈으로는 보았지만 의지가 부패하여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도 성경적인 결론입니다. 하지만 일차적인 문제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참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판별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존재하는 모든 것 중 가장 사랑스럽고 경이롭고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할 수 없었던 딱딱한 마음이 느닷없이 풀려 사랑할 수 있는 의지가 밀려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의 마음과 같이 단단한 마음를 움직일 정도로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새로운 시야를 가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기쁨이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러 방식으로 논증을 해볼 수 있겠지만 제가 간단하게 언급하고 싶은 것은 앞에서 말했던 두 번째 공통점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다는 것 외에도 사랑에는 기쁨이 수반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에 압도될 때 우리는 희열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희열은 좋은 것입니다. 자꾸 맛보고 싶은 것이고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꾸 보고 싶어지죠. 그냥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오고요. 아무 것도 안하고 손만 잡고 있어도 행복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뭘 특별히 해주지 않아도 곁에 있는 것이 나를 채워주는 느낌을 받습니다. 손에 쥘 수 있고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가치 이외에 무언가가 우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죠. 즉,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내 마음 속에 기쁨을 주입시킵니다.

‘날 정말로 사랑하는 게 맞아?’라고 연인들은 서로 질문합니다. 사랑 싸움 단골 메뉴죠. 주로 상대편이 대답을 건성건성 하거나, 기념일을 잊고 지나가거나, 데이트 약속보다 더 중요한 약속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할 때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반대로 상대편이 정말로 날 사랑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바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할) 때’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상대편이 자발적으로 나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소위 말하는 ‘진심’을 갈구하는 것이죠. 앞서 말한 무심함을 드러내는 상황들은 상대방의 진심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억지로 하는 느낌, 요구하지 않으면 행하지 않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죠. 반대로 말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알아채거나 해줄 때는 그 사람의 진심이 드러나게 되죠. 외부의 어떤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니까요. 이 진심은 다른 말로 (제가 참 좋아하는 우리말 표현입니다) ‘기꺼이 하다’라고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요? 진심은 어떤 일을 기껍게 하느냐 기껍게 하지 않느냐로 판가름납니다. 우리의 사랑은 참으로 우러나오는 기쁨에서 확인되는 것이죠. 기쁨이 없는 사랑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 사람의 기쁨이 되는 것은 나의 기쁨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쁨은 아름다움을 보는 것과 사랑을 연결시켜줍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합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주는 놀라운 기쁨이 우리 안에 채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어서 그런 기쁨을 준 그 대상을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조금 곁가지이지만 저는 ‘중독’과 비교해보면 이 사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독이 주는 커다란 쾌락과 희열은 사랑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형언할 수 없이 신비하게 흐르는 기쁨과 어떻게 다를까요? 중독은 아름다움을 보는 것과 사랑의 관계를 벗어나서 기쁨만을 즐기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 아닐까요? 중독에 걸린 사람은 자신에게 쾌락을 주는 것 자체의 아름다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 나에게 쾌락을 주느냐 주지 않느냐입니다. 그렇게 얻은 쾌락은 사랑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그 대상이 나에게 지속적이고도 증가하는 쾌락을 줄 수 있느냐 없느냐로 대상의 가치가 판단될 뿐입니다. 포르노 중독이나 성중독은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대상에 전혀 인격적 관심이 없습니다. 탐욕스러운 눈으로 보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내가 느끼는 쾌락’뿐입니다.  결국 중독은 자기 안에 갇힌 지독한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중독에 걸린 사람은 골방에 들어가고자 하나봅니다.

기쁨은 부산물입니다. 하지만 필수적인 부산물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볼 때 기쁨이 샘솟는 것을 경험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될 때 기쁨이 커져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계속해서 커져가는 기쁨은 대상을 더 사랑하게 만들고, 더 큰 사랑은 대상의 아름다움을 자꾸 자꾸 발견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또 한가지 더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과연 신앙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을 인하여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라고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기뻐하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와 아름다움

지금까지 함께 생각해본 내용들을 삼위일체와 접목시키면 평소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존재하고 계시며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신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단지 지식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구본을 가지고 지구를 배우다가 실제 우주선을 타고 나가 달에서 지구를 보았을 때 얼마나 경이로울까요? 그 때 과학실 안에서 배운 지구의 형태와 다양한 과학적 사실들이 한데 엮여 자아내는 결과는 우리의 경탄입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설명과 그 앎에서 경이로움이 빠진다면, 단지 형이상학적 설명으로만 느낀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과 경이로움을 합당하게 본 것이 아닐 겁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바라볼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기를 기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더 이상 삼위일체는 머리 셋 달린 괴물이나 세 가지 직업을 가진 변장의 귀재로 생각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심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는 ‘머리가 지끈지끈한 경험’이 아닌 ‘와! 우리 하나님 너무 사랑스러우시다! 너무 아름다우시다!’라는 기쁨의 고백이 주어질 것입니다.

간단하게 삼위일체를 설명하기보다 (사실 삼위일체 자체에 대한 설명은 정통적인 설명을 잘 이해하기만 하면 됩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이 교리의 중요성,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참 유익을 먼저 나누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지식 자체라기보다 그 지식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만들며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삼위일체 자체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Over de auteur

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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