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spel Coalition에 2016.2.19에 James Taylor가 쓴 “복음주의자는 칼 바르트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를 번역/요약 및 첨언한 글입니다. 작년에 이 글을 보고 언젠가 포스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계속 미뤄졌네요. 공교롭게도 이번 학기 Kevin Vanhoozer의 “신학적 해석자로서 칼 바르트 Karl Barth: Theological Interpreter of the Scripture” 수업을 수강하고 나니 이 글을 나누기엔 더할나위 없이 좋은 타이밍인 것 같네요. ‘그래서 대체 나는 바르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을 준 글입니다.
이 글은 사실상 Taylor가 바르트에 대해 공정하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복음주의자들의 의견을 소개하는 글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소개글을 소개하는 수준의 얄팍한 글이 되어버리겠군요…)
토니 레인키가 이렇게 D.A.Carson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카슨 박사님. 올해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라 생각되는 The Enduring Authority of the Christian Scripture(Eerdmans; 2016)를 편집하셨습니다. 통찰력으로 가득한 1200페이지짜리 만찬입니다. 굉장한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거기서 박사님이 FAQ 챕터를 마무리하시며 언급하신 바르트의 성경론에 눈이 가더군요. 항상 일반적 의미에서 바르트에 대해 박사님께 여쭤보고 싶었는데 지금이 최적의 시간인 것 같네요. 솔직히 말해 제 눈에 바르트는 갈피를 잡기 힘든 사람입니다. 한 편으로 그의 저작들은 신학적 물음표가 난무하는 것 같아 절 긴장시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관한 한 그는 굉장히 선명하게 말하죠. 그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인간 감정(affection)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작업하는 극소수의 신학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보니 또 다른 한편으로 제게 바르트는 간과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수년 동안 저는 개인 경건을 위해 바르트를 읽는 유명한 신학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렇지만 공개적으로 이를 인정하기는 꺼려하더라고요. 분별력있는 복음주의자는 칼 바르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Carson은 이렇게 답했답니다.
어떤 사람들은 존 칼빈의 유산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며 칼 바르트를 우상화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단테의 지옥에서도 낮은 곳에 속하는 사람으로 악마화하죠. 제 판단으로는 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의 저작 중 많은 부분이 빛을 밝혀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하심에 대해 말하는 부분들은 놀랍운 영향력을 지닙니다. 그리스도의 중요성에 대해 말할 때도 그렇고요. 저작의 방대함으로 보나 분석의 중요성으로 보나 칼 바르트는 너무나 많은 영역에서 20세기 최고의 신학자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그의 모든 발걸음이 하나님의 보좌나 무저갱에서 나온 것이어서 모두 칭송하거나 모두 정죄할 수 있다면 편하겠죠. 하지만 인생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따라서 지성적 목회자들이 바르트를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바르트를 오용한다면 더 슬픈 일일 것입니다. 바르트는 부끄러움 없이 모순적인 내용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전해져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어떤 사람이 바르트에게 편지를 써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바르트 교수님. 당신 저작에서 다음과 같은 모순을 발견했는데요. 이 모순에 대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바르트는 형식적으로 답장을 적어 보냈답니다. “글쎄요. 여기 다른 모순들이 더 있는데 동봉해 보냅니다. 당신의 신실한 바르트로부터.”
일반적으로 이런 사고를 변증법적 사고라 부릅니다. 바르트는 이렇게 성경에서 찾아낸 한 요소를 극단으로 밀어부치고 또 다른 요소들을 다른 극단으로 밀어부치곤 합니다. 그렇다보니 때론 그가 말한 내용이 완전히 맞아떨어지지는 않는 것이죠. 심지어 놀랍게 호소력을 지녀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경향은 그가 성경론을 대할 때보다 더 분명히 드러날 때는 없습니다.
바르트는 성경의 신뢰 가능함(truthfullness), 의존 가능함(reliability), 권위 등을 긍정하는 내용의 말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이 내용들을 있는 그대로 – 그가 설명한 다른 것들과 무관하게 – 받아들인다면 교회사 전체 흐름 속에서 역사적으로나 전통적으로나 본질적으로 복음주의자라고 상상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복음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성경의 영감이나 신뢰 가능함에 대해 말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경을 주셨는지와 그 성경이 어떻게 인류에 의해 수납되었는지를 통합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를 조명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필요한 부분이죠. 그는 이 모든 것을 한 패키지에 넣고 구분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칼빈은 이 요소들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은 참되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주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말이죠. 반면 바르트의 사고 속에서 이 요소들은 너무나 밀접하게 붙어 있기 때문에 그는 성경 자체의 신뢰 가능함, 의존 가능함, 성령의 영감 등을 통합하지 않고 말하기 매우 불편해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게 하는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의해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고 수납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그의 경향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르트의 관점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글쎄요. 바르트가 말한 것은 정확히 이런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 요약하려는지는 이해가 됩니다. 더 나아가 어떤 부분에서는 바르트가 분명하게 성경에 명백한 오류가 있다고 말한 곳이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큰 흐름과는 많이 다른 사람입니다. 교회는 수세기 동안 성경 자체의 신뢰 가능함과 의존 가능함과 무오성을 받아들여왔으니까요.
이어서 Taylor는 앞서 소개한 책, The Enduring Authority of the Christian Scriptures에 수록된 D.A.Carson의 질의응답 부분에서 바르트에 관한 질문 4가지를 뽑아 소개하네요. 이도 유익하니 계속 이어서 번역해보죠.
9.1 칼 바르트의 성경에 관한 관점이 어쩌다 오늘날 이렇게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일까요?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바르트는 20세기에 분명히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그리고 아마도 가장 창의적인 신학자일 겁니다. 둘째, 바르트의 사상은 굉장히 하나님 중심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은혜 중심적입니다. 셋째, 성경에 대한 그의 관점은 비록 전통적인 고백과는 거리가 꽤 있으나 경건하고, 미묘하며, 복잡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학자들이 그가 말한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죠.
9.2 바르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사실 바르트는 양쪽 다 말합니다. 문제는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했는가? 입니다. 바르트는 “되다becoming”를 집요하게 사용합니다. 말씀의 첫 계시와 성도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계시는 은혜로운 전체로 묶여있습니다. 바르트가 영감을 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성경 책 자체가 영감받았다고 말하기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말하는 성경의 영감과 성도에게 주어지는 조명을 연결하여 하나로 보고자 하는 것이죠.
9.3 성경론에 관한 한 그의 관점은 종교개혁자들과 연관성을 가지는 것 아닌가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틀렸습니다. 예를 들어 칼빈과 비교해보자면 칼빈이 성경의 영감성, 즉, 본문 자체가 수용자의 믿음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기꺼이 인정하는 적지 않은 예들을 들 수 있습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영이 성경 본문과 신자 모두에게 영감으로 말씀하신다고 설명하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교회교의학 II/2 §3e에서 바르트 자신도 칼빈과의 거리를 인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9.4 바르트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믿었나요?
그렇습니다. 비록 구체적으로 어디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기는 꺼려했지만 말이죠. (하지만 교회교의학 III/3 §51에서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의 타락한 천사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살펴볼만합니다. 바르트는 여기서 성경의 신학적 오류를 발견합니다.) 바르트에게 이 부분은 성경의 ‘인간성’에 해당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비록 그는 성경 내 오류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가진 권위를 주장했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보니 오류를 가진 성경 본문이 (그는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하나님의 계시로서 권위를 지닐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불가피해지죠.
Taylor의 소개는 이 정도입니다. 저도 한 학기 동안 상당한 분량의 바르트의 1차, 2차 문헌을 읽어댔지만 여전히 아리송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조금은 바르트가 어떤 말을 했고 어떤 말은 하지 않았으며, 어떤 중심 사상을 가지고 그의 신학을 전개했는지는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미 글이 길어졌기 때문에 제가 느낀 구체적 느낌은 다음 기회를 노려보려고 합니다. 다만 여기서 짧게나마 제 감상을 근거를 제외하고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그렇게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역사적 개혁파가 주장하는 기본 교리들에서 상당히 벗어난 모습을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자유주의에 맞서 싸우기 위해 방대한 양의 성경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며 하나님을 알고자 했던 노력까지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현재 복음주의/개혁주의권 내에서 이루어지는 성경해석도 역사적 문법적 해석에 다소 치우친 것을 고려하면 그의 신학적 접근은 여전히 상당한 시사점을 가집니다.
- 카슨이 말했던 세 가지 점은 저도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의 신학은 분명히 ‘하나님 중심적, 그리스도 중심적, 은혜 중심적’입니다.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완전히 잃어버린 세 가지를 확실하게 복권시켰습니다. 모든 신학적 내용을 이 신학적 초점에 맞추어 해석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극단으로 논리를 밀고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래서 정통에서는 꽤나 벗어나버렸지만 말이죠.
- 한 학기 내내 제가 그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의문은 인간에 대한 그의 입장이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그의 인간론까지 살펴볼 수는 없었는데요, Vanhoozer 교수님 말씀으로는 그의 인간론은 역시나 많은 비판을 불러오고 있다는군요. 하지만 인간론만 (제가 제대로 들었다면) 2천페이지 이상 적었답니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그리스도만 잔뜩 등장하는 게 함정이라는군요. 그의 인간론에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 프레임이 너무 강렬하여 인간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런지는 다음에 제가 기회를 만들어보겠습니다.
- 바르트를 읽는 것은 분명 조심해야 합니다. 쉬운 상대가 아니거든요. 하지만 개혁파에 영향을 받고 바르트 1차문헌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우리 대다수가 바르트에 대해 가진 생각은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 교수였던 반틸의 강력한 영향 탓이란 점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고정관념으로 가지고 있는 바르트에 대한 많은 우려와 정죄(?)들이 반틸의 비판에서 기인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반틸을 통해 바르트를 읽고 있다고 생각하면 무리가 없어보입니다. 미국 보수 기독교계도 그렇다는군요. 그런 의미에서 비판적으로 1차 문헌에 다시 접근해 볼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반틸이 다 틀리거나 그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든 공정하게 대하기 위해서는 그의 말을 직접 들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반틸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직접 듣고 판단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을까 싶네요.
- 제게 이 수업을 통해 누린 가장 큰 유익은 바르트라는 사람을 접근하는 자세 자체였습니다. “역사적 개혁파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해준 매우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에 대한 생각도 기록해두었습니다. 진짜배기에서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마 제가 바르트 수업을 들었다거나, 바르트에 대해 우호적으로 보이는 발언을 한 것을 두고 진짜배기에 실망했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두려운 부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5번에서 쓴 것처럼 우리가 어떤 신학적 입장을 고수하느냐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공정하게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이나 바르티안들에게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덕목이며, 우리 자신도 외면할 수 없는 덕목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듣고 나서야 오히려 더 명료하고 확신에 찬 비판을 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가진 신학을 뜻밖에도 풍성하게 하면서 말이죠.
계속 소식 전하겠습니다. ^^
Comments 9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바르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혹은 거부감이 없어지는데 거의 20년이 걸리는 것 같네요. 아직 제대로 된 책을 읽어보지도 못했지만, 언젠가 한 번은 꼭 넘어야 할 산인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형님~ 오랫만에 들어왔다가 좋은글 잘 읽고 가요~ㅎ
정말 좋은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재 복음주의/개혁주의권 내에서 이루어지는 성경해석도 역사적 문법적 해석에 다소 치우친 것을 고려하면 그의 신학적 접근은 여전히 상당한 시사점을 가집니다” 부분을 읽으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칼 바르트의 신학적 접근은 어떤 것인가요? 간단한 답변(?)을 기대합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바르트를 좋아했었는데, 그의 개인적 삶이 그의 신학을 바쳐주지 못하는 거같아 너무 많은 실망을해 읽기가 꺼려집니다.. ㅠ 너무 안타깝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연구를 위해 이 글을 퍼가고 싶은데, 괜찮을지요? ^^;
감사합니다. 바르트의 교의학 개요를 지난 봄학기에는 엉성하게 읽었습니다.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했거든요.그런데 이번 가을학기에 다시 읽습니다. 봄학기 때와는 달리 마음에 익사이팅한 그 무엇이 오고 있어서 흥분됩니다.귀한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대체 어떤 “우리”를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바르트는 스위스 개혁교회의 전통 위에 있는 사람이고, 아버지가 개혁교회의 목회자였으며, 그가 부목사로 있던 교회는 츠빙글리가 목회하던 교회입니다. 전체 신학의 지형도에서, 개혁신학의 전통에서 벤후저, 카슨이 바르트보다 훨씬 더 먼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을 기준으로 바르트에 잣대를 들이대고 판단하다니 굉장히 웃기면서도 괴기하기 까지 하네요 ㅎㅎ 영미권에서, 영미권에서도 마이너한 부류에서 주로 이런 식으로 바르트를 언급하는 것 같던데 이는 마치 퇴계 이황의 유학을 필리핀에서 배운 사람이 안동에 사는 퇴계 이황의 후손의 유학에 관하여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며, 그건 바른 유학이다 아니다를 논하는 것과 매한가지 입니다. 미국과 유럽을 가르는 대서양은 꽤나 깊고 넓은 바다입니다. 물론 학문의 영역에서 이렇다 저렇다 논할 수는 있겠으나, 그 수준차이는 반드시 영미권에서 인정해야 하고, 여전히 신학의 언어의 주류는 대륙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학문의 시작은 겸손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 가지 확실한 건, 100년 뒤에 누군가에 의해 쓰여질 신학 교과서에는 바르트는 반드시 들어가겠지만, 벤후저 카슨은 언급조차 안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