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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 당신은 거듭나야 합니다(요3:1-16)

거듭남에 대해 다섯 가지 질문으로 나누어 이야기해봅시다. 1. 거듭남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2. 어디서 온 것일까요? 3. 거듭남은 무슨 일을 하나요? 4. 거듭남은 어떻게 오나요? 5. 거듭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거듭남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미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born again Christian)을 여러 타입 중 하나로 생각한다.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거듭난 사람은 감정적으로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삶이 완전히 무너졌던 사람들은 거듭남을 삶이 도덕적으로 자리잡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는 누군가는 거듭남을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으로 생각한다(역자 주- 미국 컨텍스트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주로 공화당을 지지하는 정치적 보수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즉, 특정 종류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이런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먼저 니고데모를 예로 드는 것 자체가 그렇다. 그는 전혀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스리는 자였고 부유한 이스라엘의 교사였다.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다.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랍비를 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전혀 제도권에서 지위라곤 없었던 예수님께 나와 자신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랍비여’라고 부를 수 있는 자유로운 사상의 사람이었다. 성경에서 이만큼 열린 사람을 찾기도 쉽지가 않다. 즉, 니고데모는 앞에서 예로 든 어느 종류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거듭남은 이 모든 체계에 대한 도전이다. 거듭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거듭남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거듭남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 그리고 들어가기 위해 거듭내야 한다고 말한다. 요한복음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는다. 여기가 거의 유일하다. 따라서 매우 중요하다. 니고데모에게는 충격이었을 텐데 바리새인으로서 그는 미래적 의미의 하나님 나라를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메시아가 마침내 와 모든 것을 완성시킬 그 나라는 마지막 때의 것이다.

마19:28-29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일을 말씀하신다.

마19:28-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여기서 ‘세상이 새롭게 되어’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팔린게네시아 인데, 이는 모든 것이 지속적으로 더 낫게 갱생된다는 그리스적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해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신다. 그분이 새롭게 하시는 것은 헬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계속해서 지속되는 갱생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완전히 완성되며 모든 죄와 고통이 해결될 한 날을 의미했다. 딛3:5에서 우리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 받았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역시 앞의 거듭남과 같이 팔린게네시아 다. 거듭남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미래로부터 온다. 미래로부터 와서 (완전하지는 않으나) 현재에 침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미래가 현재 우리 마음에 현존하는 것이다. 부분적이지만 현실로 임한다(Only partially but actually). 거듭남의 힘을 결단코 무시하지 마시라. 베드로와 바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온 세상을 뒤집어놓았다.

거듭남은 무슨 일을 하나요?

이 질문은 사실 두 가지 질문을 합한 것이다. 1. 거듭남이란 무엇인가요? 2. 이 거듭남은 무슨 일을 하나요? 거듭남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심기워지는 것이다. 본문 5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여기서 물을 물세례를 비유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는 겔36을 배경으로 말한 것일 것이다. 여기서 물은 생명 그 자체다. 따라서 성령과 물에서 물은 생명 자체이신 성령에 대한 비유이다. 따라서 거듭남은 성령이 우리 안에 심기워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씨앗이 심기워진다고 비유하실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비유가 아니라 아기가 다시 태어나는 비유를 사용하신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이 비유를 놓고 더 생각해보자. 거듭남은 무슨 일을 하는가? 이 비유에 따르면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 새로운 감각을 주며 둘째,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새로운 감각이라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주변환경을 감지한다. 아기들을 태어나자마자 최초로 보고 듣는다. 이처럼 거듭남은 이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영적 실재가 보이고 들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Archibald Alexander의 Thoughts on religious experience 추천.)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들어가는 것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보는 것으로 설명하셨을까?거듭남은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을 이제 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적 시야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거듭남을 어떻게 알까? 지성이 바뀌며 마음에 느낄 수 없었던 것이 함께 이해되고 마음에 와닿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사랑하시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게 되었다, 또는 예전에는 사랑하시는지 알았으나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마음이 느껴진다. 혹시 비디오를 틀고 전혀 상관없는 오디오를 함께 튼 적이 있는가? 무조건 비디오가 이긴다. 귀에 아무 것도 안 들리게 된다. 이처럼 이 땅의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은 비디오인데 하나님은 오디오로만 들렸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진행되고 있지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빛이 들어오고, 또는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들리지 않던 오디오 하나님이 이제 비디오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거듭남은 마음의 사랑의 질서를 뒤집는다. 머릿속의 추상적인 내용들이 이제는 실재가 된다. 머리에서도 거듭남은 작용한다.
두 번째로 아기가 태어나는 비유를 쓴 이유는 거듭남이 영적 정체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기는 그냥 태어나지 않는다. 모든 아기는 가족 안에서 태어난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거듭난 자들이 혈과 육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녀가 된다고 표현한다. 비서구권에서는 대체로 가족의 눈이 매우 중요하다. 내가 제대로 살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기준은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느냐 못하냐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다. 서구는 반대다. 서구에서는 가족이 중요하긴 하지만 가족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거듭나는 것은 사람의 혈통/가족 (동양과 같이)에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의지와 결정으로 (서양과 같이)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보스가 아니며 (왕이시긴 하지만) 단지 왕이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이시다. 이는 다른 모든 정체성에 우선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교회에 한 자매가 날 찾아왔다. 그녀는 다섯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스스로를 설명한다. 먼저 그는 매우 착하게 살았다. 그의 첫 번째 정체성은 도덕적 자아였다. 두 번째 정체성은 그런 도덕적 자아를 버리고 다른 사람의 사랑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는 것이었다. 많은 남자를 만났고 그들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깨진 관계 속에서 슬퍼하고 있을 때 누군가 와서 이제 홀로 서야한다고, 누군가에 기대서는 안 된다고, 너 만의 커리어를 쌓아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세 번째 정체성은 커리어 우먼이 되었다. 일의 성공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곧 허무해졌다. 그 때 또 누군가 와서 다른 이들을 돕고 나눈 데서 기쁨을 누려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네 번째 정체성으로 나가 돕고 봉사하고 기부하는 데 힘쓰기 시작했고 그 일을 기쁨으로 여기고자 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복음을 만나고 다섯 번째 정체성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앞의 네 단계 동안 자신은 자기 자신 안에서 기쁨을 찾고 정체성을 찾고자 했음을 깨달았다.

거듭남은 어떻게 오나요?

‘나’는 지금까지 거듭남을 마치 회심과 같은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를 명확히 구분했다. 누군가 와서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사실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가 대답이다. 성령은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 그 전에 어떤 일이 앞서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회심과 거듭남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 회개하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를 설명하며 본문은 모세의 놋뱀을 이야기한다. 거기서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보는 것이다. 찰스 스펄전의 회심 이야기보다 이를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찰스 스펄전이 십 대 사춘기 시절 교회에 가는데 엄청난 폭설이 쏟아졌다. 앉아 있는 청중은 고작 서너명이었고 심지어 목사가 도착을 못했다. 그래서 평신도 하나가 올라가 그냥 그날 말씀을 읽고 풀기 시작했다. 당시 본문은 사55장이었다. 읽고 풀어내기 시작하던 그는 갑자기 예수님인 것처럼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를 보라!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나를 보라! 나를 보라! 나는 다시 살아났다! 나를 보라!” 그리고 설교자는 거기 앉아있던 젊은 스펄전을 향해 말했다. “젊은이! 나를 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평생 비참할 것이다!” 그제서야 스펄전은 깨달았다. 그때까지 자신은 구원받기 위해서라면 50가지 행위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구원을 위해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오, 나는 보았고 보았고 보았고 또 보았다. 너무 보아서 내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 되도록 보았다.”
예수님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새로 태어난 아기처럼 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과연 아기가 해야하는 일이 뭐가 있을까? 아무 것도 없다. 아기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갑자기 21절에서 아기가 태어나고 나면 여인이 얼마나 기뻐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에서 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거의 모든 경우에 이는 예수님 죽음의 때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여기서 무슨 말을 하시는 것인가? 스스로를 해산하는 여인에 비하고 계신 것이다. “너의 생명은 나의 죽음으로부터 온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회개는 단지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값을 치루신 우리의 무가치함을 보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값진 죽음을 보고 그 안에 안식하는 것이다.

거듭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러면 거듭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모두들 변화된 삶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서 니고데모는 다시 등장한다. 그의 행위 자체가 그의 거듭남의 증거라고 할 수는 없으나 높은 가능성이 있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방금 이 운동의 주동자로 여겨져 처형당한 죄인의 몸을 요구한 것이다. 대체 무슨 짓인가? 그리고 일반적으로 누가 염을 했나? 노예가 했다. 그들 안에 뭔가 일어난 것이다. 그들 안에 있던 계층 부심, 남성 부심… 온갖 교만들이 다 날아가버린 것 같다. 그리고 새로운 용기가 생겼던 것이다. 겸손과 담대함은 거의 함께 오지 않는다. 겸손한 사람은 두려워하며 담대한 사람은 겸손하지 않다. 하지만 거듭날 때 우리는 겸손하며 담대한 사람이 된다. 모든 의식이 뒤집힌다.

이런 변화가 무서운가? 준비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 아름다운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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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석사 과정 재학 중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Comments 2

  1. 잘 읽었습니다. 중계를 보고 있는 느낌이네요. 계속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본문중에서 거듭남은 무슨 일을 하나요? 두번째 단락에 오자가 있는듯합니다. ㅎ

    그런데 이 비유가 아니라 아기가 다시 태어나는 비유를 사용하지 않으시며 아기가 다시 태어나는 비유를 사용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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