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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을 양산한 ‘교회’는 정당한가? -교회를 떠나 가나안으로 간 당신에게


저는 지난번 글이 이렇게까지 반응을 얻게 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지난 몇 주간은 제 글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응원과 비판을 분에 넘치도록 들었어야 했습니다. 초기 며칠은 제 본분에 충실하기 어려울 정도였지요. 제 몸글과 페이스북의 댓글, 공유한 글의 댓글에 수도 없이 많은 반응이 달렸는데, 이는 제가 모든 댓글에 성실한 답변을 하기에 벅찰 정도였습니다.

뒤늦게 저는 비로소 ‘가나안 현상’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주제였음을, 그리고 생각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직하게 고백하자면, 지난 글은 사안이 이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쓴 글이고, 그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분들이 많이 계셨음을 압니다. 이 지면을 빌려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많은 분들이 제목이 과격했음을 지적하셨습니다(제목 뿐만은 아니었지만요).

다만 지난 글은, ‘가나안 성도들’을 향한 글이 아니었음을 인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히려 ‘가나안 현상’을 바라보는 양희송 대표님의 시각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또한 저는 양 대표님의 책이 대안이 없기 때문에 잘못된 글이라고 말하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대안이 없다 하더라도 문제제기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봅니다. 양 대표님이 문제를 직시하게 한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대안을 그에게 다 떠안길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모두가 대안을 함께 만들어 가야겠지요.

본래 첫 글을 쓸 때만 해도 단순한 서평 하나 쓰자는 생각이었기에 추가 논의는 예정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반응들은 저나 양 대표님 모두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 부분이 있고, 변명뿐만 아니라 일치를 위해서도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제 생각에는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이번 글을 포함하여) 글을 세 번 정도 더 써야 할 것 같습니다.

  1. 우선 이 글은 먼저 ‘가나안 성도들’을 향한 편지가 될 것입니다. 여러 번 언급했지만, 저는 양 대표님의 교회론에 반대를 표한 것일 뿐, 가나안 성도들의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말 안 듣고 교회 떠난 탕자들”로 매도될 수 없으며, 그들이 교회를 떠난 이면에는 우리나라 교회의 고통스러운 타락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꿀 수 있는 소망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2. 그다음 글은 첫째 글에 대한 부연으로서 ‘제도적 교회’에 대한 제 나름의 ‘성경적 변증’입니다. 이 글은 교회론의 핵심이 되는 몇몇 성경구절에 대한 광범위한 주해(Exegesis)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논의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묻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짧으면 한 번, 길면 두세 번 정도 글을 쓰게 될 것입니다.
  3. 마지막 글은 가나안 현상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이 될 것입니다. 교회론이 아무리 정확해도, 구조 자체가 이상적 교회론을 ‘이상’으로만 남게 하는 상황이라면, 구조 자체를 의심해 보아야겠지요. 그래서, 이번 글과 다음 글이 가지고 있는 이상이 이상으로만 남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나라 교회의 구조적 한계와 특히 ‘교역자들’이 봉착한 문제에 대해 논해 보겠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바로 이번 글의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아래는 ‘가나안 성도들’을 향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아래 글은 가나안 성도들은 향한 ‘설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가나안을 양산한 ‘교회’는 정당한가?

우선 교회를 더 이상 다니지 않는, 그럼에도 ‘신앙’은 포기하지 않은 당신에게 감사와 격려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제도적 교회를 옹호하는 사람이지만, 때로는 제도적 교회에 머무르는 것이 신앙에 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어쩌면 “이제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라는 당신의 선택이, “이 제도적 교회를 다니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알고 그 뜻대로 사는 데 방해가 된다”라는 이유일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더 좋은 교회를 찾아보라는 말도, 좋기는커녕 그저 상식적인 정도의 교회를 찾기도 힘든 구조와 상황에서는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아보라는 말 만큼이나 가혹할 뿐입니다.

저는 지난 글에서 가나안에 머물러 있는 신앙이 정당한지를 물었습니다. 하지만 이 물음보다 더 절박하고 고통스러운 질문이 선재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가나안을 그렇게 많이 양산해 낸 ‘제도적 교회’의 신앙은 과연 정당한가?” 저는 지난 글에서 첫 질문에 대한 비관적인 답을 말했으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는 훨씬 비관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합니다. “네. 가나안인들의 신앙을 묻기 이전에, 가나안을 양산한 교회의 상태는 훨씬 부당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그런 문제제기를 먼저 하지 않은 이유는, 사실 교회를 개혁하고자 나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하는 비판을 보며 제 자신의 교만함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저도 한 때 제도적 한국교회, 특히 대형교회들에 비판의 날을 세웠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그토록 비판했던 제 마음의 원인은 “나는 더 나은 사람이고, 내가 개척한 교회는 더 깨끗하고 바른 교회지”라는 자기증명에 있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하여 섬긴 지 4년이 된 목회자입니다. 요즘에야 비로소 저는 제가 비판했던 그 제도적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우리교회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를 비판하는 제게 우리 주님께서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눅 11:46)라고 책망하실까 봐 두렵습니다.

이런 두려움이 있음에도 (저를 포함한) 우리나라 교회가, 더 정확히는 교역자들이 부패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제도적 교회’를 옹호한 제 지난 글에 대한 무수한 댓글 중에서, 제가 가장 가슴이 아팠던 댓글은 이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치리와 권징을 강조하지만, 우리나라 교회가 전병욱을 치리했느냐? 그럼에도 제도적 교회가 옳으냐?”는 것이지요. 이 반문에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가나안이 정당하지 않다는 말을 하기 훨씬 이전에, 가나안 성도들이 원래 있었던 그 ‘제도적 교회들’이 더 정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혹자는 제게 “가나안 성도들은 교회를 안 다니고 있으니깐 이미 성도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신학적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저는 되묻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제도적 교회는 무조건 교회입니까? 종교개혁자들이 말했던 교회의 표지가 정당하게 지켜지고 있는 겁니까? 바른 복음 선포와 성례의 시행이 있습니까? 목양적 사랑으로 말미암은 권징이 있습니까?”라고요. 제도적 교회는 가나안 성도가 성도인가를 묻기 전에 자신이 성경적 ‘교회’임을 먼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다음과 같은 댓글에 공감합니다. “가나안 성도들의 증가 현상은 성도들의 일탈이 아니라 목회자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성도들은 교회의 제도 자체를 부정해서 교회를 떠난 게 아니라 목회자들과 그들이 만든 ‘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피난민처럼 도망 나온 사람들입니다”라는 말도 공감합니다. 또한 페이스북 ‘가나안 성도’라는 페이지의 소개글인 “교회를 안 나가는 게 아니고 가나안으로 가는 겁니다”라는 말에도 공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공동체 없이 홀로 남아 있는 것이 대안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외롭습니다. 저는 아직도, 가나안 성도가 그 자체로 대안일 수 있다는 것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저는 지난 글을 쓰고 양희송 대표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양희송 대표님은 공동체의 필요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렇다면 제도교회 내에 과연 공동체성이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뼈아픈 지적이지요. 이에 저는 그것이 가나안 성도들이 공동체가 없어도 된다는 것을 정당화해 주지는 못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런데 양 대표님은 “오히려 가나안 성도들끼리, 더 자발적이고 창의적 방법으로 에클레시아의 기능을 수행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라고 답했습니다(들은 워딩을 직접 옮긴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만들어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양 대표님이 만든 세속성자 모임이 그런 것인가 생각해 보면, 결국 그것도 ‘청어람’이라는 ‘조직’의 대표인 양희송이라는 사람이 조직하여 만든(어쩌면 개척한) 모임입니다. ‘더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시작은 아닌 것이지요(그래서 세속성자 모임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가나안이 더 자발적이고 창의적으로 모일까요? 오히려 훨씬 많은 수의 가나안들이 홀로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그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러운 교회를 다니느니 혼자 있는 것이 더 나아”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우리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하신 공동체의 복은,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복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의 명저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위의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살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자명한 사실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원수들 가운데 살았다. 마지막에는 모든 제자가 그를 떠났다. 십자가에서 악한 자와 조롱하는 자에게 둘러싸인 그는 오직 홀로였다.” [1]

성도가 성도와 함께 모여 살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고독하게 원수들 가운데 둘러싸여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복을 누리지 못하셨습니다. 본회퍼는 한 페이지 뒤에서 이런 복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최후의 심판 사이에서 은혜 가운데 선취한 것”(p. 22)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지독하게 외로움과 고통을 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본회퍼는 잠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이 신체적으로 함께 있다는 것은 신자들에게 비할 수 없는 기쁨과 힘의 원천이 된다.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은 임박한 죽음 앞에서 ‘믿음으로 얻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가 보고 싶어 감옥으로 찾아와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디모데를 다시 보고 싶었고 곁에 두고 싶었다.”(p.23)

네. 한국의 제도적 교회는 문제투성이이며 고민거리이지만, 그래도 성경이 묘사하는 교회는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좋은 복입니다. 저는 현재의 가나안을 정죄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가 행복한 것도 아님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도 선물로 주셨는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복,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

이런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간략하게나마, 교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교회를 묘사해 보겠습니다.

  1.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하며 설명하는 일에 능숙하게 훈련된 목회자가, 청중을 향한 간절한 기도와 사랑을 품고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가 옳은 교회라고 믿습니다. 목회자는 가르칠 뿐 아니라 질문에 대한 답도 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풍성함을 드러내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신학교는 모든 신학생이 이와 같은 목회자가 되게끔 훈련해야 할 것이고요.
  2. 저는 주님께서 베푸신 성례가 은혜롭고 바르게 시행되는 곳이 올바른 교회라고 믿습니다. 성례가 단순한 형식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들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에 성례의 바른 시행은 교회 됨의 필수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성례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베푸신 것을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요 눈으로도 봅니다.
  3. 저는 권징이 있는 교회가 바른 교회라고 믿습니다. 권징은 단순히 혼내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개인들이 짓는 죄에 대한 공동체적 저항입니다. 우리는 눈물과 기도로 서로의 죄를 지적하며, 죄가 드러날 때마다 오히려 자신을 살피고, 정죄보다는 회복을 위해 때로는 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이 과정은 고통스럽겠지만 은혜의 과정일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거룩함과 자비를 모두 드러내십니다.
  4. 저는 연약한 성도끼리 서로 돕고 나누는 교제를 믿습니다. 한 교회 공동체는 개인의 가난과 연약함과 병을 각자 해결하게 두지 말고 공동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그 가운데 가난과 연약함이 존재함에도 해결될 것입니다. 이로써 불완전하지만 제도적 지역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난다고 믿습니다.
  5. 위의 기능을 수행하는 에클레시아는, 반드시 위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적절한 제도와 직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도와 직분자는 반드시 민주적(民主的)으로 형성되고 세워져야 하며, 직분자들은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교회를 섬기기 위해 내 놓을 수 있는 헌신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은 인격적이며 따뜻한 동시에 세상에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해야 하고, 문화를 거스르지만 문화를 이용할 수 있는 시대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성경이 말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펼치려 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교회를 꿈꾸는 것이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당신은 “그런 교회는 본적이 없거니와 소문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저도 이런 교회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대체로 듣는 지역 교회의 모습은 위의 모습들과 정반대의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 역시, 작기 때문에 큰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도드라지지 않지만, 죄악 된 인간끼리 복닥거리면서 문제를 만들어 낸다는 측면에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습니다(특히 1번 항목에서요).

하지만 제 소견에는, 어떠한 조직도 형태도 없이 ‘가나안 성도들끼리, 더 자발적이고 창의적 방법으로 에클레시아의 기능을 수행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는 것 역시 이상적으로 보입니다. 둘 중 뭐가 더 현실성이 없냐고 묻는다면 둘 다 요원해 보인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만 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도 당신이 필요합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당신이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정확히 알고 말할 수 있는 교회가 저희 교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는 성경적 이상에는 한참 거리가 있는 교회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교회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는 (이런 표현마저 칭찬에 가깝지만) 시원치 않은 죄인임에도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에는 가나안이었다가 정착한 사람들이 비율상 많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모저모로 모이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들 때문에, 우리 교회는 좀 더 좋아졌습니다. 이들은 모두 인생 가운데 교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본 경험이 있고, 바른 교회에 대한 이상을 품고 있기도 했으며, 좌절해 보기도 했고, 상처를 받기도 하며 주기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에서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고 능동적으로 함께 세워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점점 교회에 대한 생각을 함께 공유하게 했지요.

주로 강단에서는 제가 성경 강해로 우리 모두의 죄를(그리고 구원도) 지적하지만, 사실 죄가 가장 많이 드러나고 지적받는 사람은 저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제도 교회에 실망하고 고통받아본 사람이야말로 목회자가 교묘하게 숨기고 있는 교만을 가장 민감하게 잡아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이들의 예민한 지적과 돌봄은 저로 하여금 낙심하지 않으면서 제 자신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우리 교회에서 떠나서 또 가나안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고 저는 어떤 사람이든 품고 사랑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자주 무관심과 상처주기로 사람들을 실망하게 했습니다. 그보다 저는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지요.

그럼에도 우리 교회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나안 출신의 성도들은 저와 우리 모두를 함께 변화시켜 갔습니다. 그들은(이미 우리지만) 우리 모두에게 힘을 주기도 했고, 상처를 주기도 했으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습니다. 먹기도 하고 놀러도 갔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라고 회원이 되기도 했고, 이 교회에 언제까지 머물지 모른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있다가 떠나기도 했지요.

이런 의미에서, 제도 교회를 다시 나가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교회가 주는 복과 돌봄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교회도 당신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돌봄을 받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가 함께 살아가며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래도 대한민국 땅 어딘가에는, 당신이 누릴 뿐만 아니라 당신이 도울 공동체가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를 다시 고민해 봅시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라고 물으신다면, “그러니깐 다시 좋은 교회 찾아서 정착하십시오”라고 즉각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즉각적인 행동보다는 고민과 생각이 더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가 필요한 존재이지요. 저는 그냥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 보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시길 간청합니다.

또 교회를 찾는다면, 그것도 역시 험하고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차분하고 진지하게, 눈에 보이는 지역 교회를 다시 생각해 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무엇인지 하나님께 배웠으면 합니다.

“정말 제도 교회가 답입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아직까지는 일단 “어쨌든 당신은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형제 자매와의 연합과 동행이 필요합니다”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공유하고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은 여기니까요. 그리고 다음 번 글에서는 왜 제가 영적일 뿐만 아니라 ‘제도적인’ 교회를 믿는지에 대해 겸허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동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살펴보면서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면, 다음 번 글에서 당신의 의구심을 풀 수 있을만큼 치밀한 동시에 신학적으로 훈련받지 못한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경주해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당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십시오

지금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분량으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당신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말씀을 드릴지도 이야기했지요. 그보다 저는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제 글에 대한 비판도 환영합니다. 가나안이 아닌, 제도 교회의 교역자인 제가 무엇을 놓치고 있고 못 보고 있는지 지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많이 배울 것입니다. 

그보다 더, 먼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왜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 신앙에 회의를 품고 있다면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다녔던 교회는 어땠는지, 그리고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가까운 교회로 가면 되겠네”나 “우리 교회로 오시든가” 따위의 가벼운 대답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같이 공감하고 같이 울어봅시다. 그렇다면 언젠가 함께 같이 기쁘게 웃을 날도 오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길 구합니다.

 

*이 글은 크리스천투데이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1. 디트리히 본회퍼, 정지련∙손규태 역, 『신도의 공동생활』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10), p.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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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진짜배기 잉여 필자. 다른 필진들과는 다르게 공식적인 '저자'다. 담임 목회자이자 두 딸의 아버지. 잉여롭고 싶은데 찾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 ㅠㅠ

Comments 15

  1. 정규 형 안녕하세요, 저에요. 두 아들의 아빠이며 직딩생활하는 평범한 동생. 정말 오랜만이지요. 반갑습니다. 🙂
    페이스북을 통해 종종 보곤 하다가 형의 지난 글을 읽고 나서부터는 자주 들어와 읽고 생각하고 읽고 생각하고를 반복하고 아내와 나눕니다. 그 전 글부터 가슴이 먹먹했고 이번엔 격해지는군요. 형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본문고 댓글 사이에서 나눠주고 있는 이야기들이 바로 제 얘기니까요. 개개인으로 보면 다들 더 없이 착하고 정 많고 괜찮은 사람들인데 왜 함께 모여 있으면 이리도 꼬이고 뒤틀리는 것일까요? 하루에도 몇 번을 정말 갈등합니다. 제도권 교회와 교회밖 신앙. 아니, 좀 더 까놓고 말한다면 ‘한국식’과 ‘미국식’ 제도권 교회 사이에서.
    인간의 관계란 엎질러 버린 물이라기 보단 구겨진 종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겨진 종이도 종이지만 상태는 이미 온전치가 않죠. 말 그대로 “구겨져” “버린” 종이가 되었으니까요… 별거 아닌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 틈이 들어오기 시작한게 가랑비에 옷 젖듯이 딱히 시험들만한 일도, 대단한 일도 아니었지만, 만성적으로 발생하다보니, 잊을만 하다 싶음 다시 충동질을 일으키는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진이 빠지게 되요. -물론 그런 사람을 보면서 “아, 나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다른 사람에게 시험거리를 주고 있진 않았나” 하며 되돌아 보는 계기도 생기지만. 그래서 가나안 성도가 정말 남의 일 같지 않아요. 제 얘기는 나중에 카톡-보이스톡으로 시간 맞을 때 한번 나눠봐요. 저야 뭐 형이 이미 학생 당시 동아리를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다 어린아이를 둔 여느 직장인 아빠의 현실이라 그리 다를게 없어서 실은 형 얘기가 더 듣고 싶네요 🙂
    앞으로도 연재될 글과 댓글로 깊이 있게 다뤄주실 분들의 의견을 기대하며 이만 줄입니다. 몸은 멀리 있지만 마음은 곁에 있어요. 한국가면 형 사역교회 방문하고 싶어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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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현아 댓글 고마워요. 생각해 보니 우리 본지가 아주 오래 되었네^^

      같이 여러 부분 공감할 수 있다니 아직도 감사하네. 예나 지금이나 너는 섬세한 표현으로 나를 감동시키는구나. “인간의 관계란 엎질러 버린 물이라기 보단 구겨진 종이와 같다”는 말. 마음을 깊이 울린다. 구겨진 종이를 아무리 펴도 구겨졌던 자리는 예전 그대로 남아있으니까.

      그렇게 서로 구겨져가면서도, 참아가면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면 그게 좋은 교회 아닐까.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라고 말할 자신도 없고, 또 앞으로는 좋은 교회가 될 거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도 없지만 소망은 된다.

      한국 오면 연락줘요. 그리고 카톡이나 보이스톡으로 조만간 연락하자. 가족 늘 평안하길!

  2. 첫번째 글을 읽고 와서 두번째 글도 읽게되었습니다. 몇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어 글을 남깁니다.

    첫째로는 형제, 자매, 영적인 아비와 영적인 아들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유기적 공동체 안에 ‘교회’라는 이름으로 생겨난 제도적인 행정과, 구조적인 관계들의 개선이 어떻게 변형되어야 할까요?

    두 번째는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하고 있는 5중 직임에 대함입니다. 저는 에베소서가 교회론에 대해서는 가장 탁월한 해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들이 어떠한 사역적 특성을 띄어야 하며, 또 어떠한 관계속에서 서로 연합해야 할까요?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좀 민감한 문제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교회에서 받게 되는 목회자 사례비에 대함입니다. 보통 기성교회안에서 사역의 대부분은 특정 목회자가 담당하게 되고, 교회는 목회자에게 사례비를 지급합니다. 물론 담임목회자가 사역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설교하고 양육하는 부분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에 그럴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만약에 교회 공동체의 사역이 더 많이 나뉘어지고 분배가 된다면 담임목사로서 받는 사례비는 정당할까요? (물론 저도 사역자이지만 가끔씩 제가 받는 사례비에 대한 부담감이 있기 때문에 여쭈어 봅니다.)

    좋은 글들 감사드립니다. 꼼꼼히 다시 읽어보고 여쭙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또 글 남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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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승환님(목사님이신가요?)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 우선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 번 글에서 나올 것 같습니다. 다음 번 글부터는 저도 본격적으로 교회론을 전개할 생각입니다. 그 때 글 보시고 또 논의를 더 했으면 합니다^^

      2. 목회자 사례비에 대해서는, 저는 조금 급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담임이냐’ 또는 ‘얼만큼 일하느냐’로 사례를 주는 것이 아닌, ‘얼마나 필요하냐’로 사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전도사라고 해도 세 아이를 가지고 노모를 모셔야 하는 가장이라면, 부모님 돌아가시고 자녀들 독립해서 써야 할 돈이 많지 않은 담임목회자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회사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며, 목회자 사례비는 수고에 대한 댓가가 아니라 말씀을 잘 전하고 목양할 수 있도록 교회가 목회자를 섬기는 것이니까요.

      3. 따라서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교역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사례를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지나치게 많은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적용도 가능합니다. 돈이 많아서 골프치고 놀러가고 싶게 해서는 안 되니까요. 목회자는 동시대의 서민으로 살아가면서, 그저 책만 다른사람보다 더 많이 사주면 되는 사람입니다.

  3. 치열하게 고민하며 사역을 하시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까지는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는 것이 정상이겠죠? 교회는 부족하고 흠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흠없는 나라와 삶을 꿈꾸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사는 공동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워도 함께 사는 것이죠. 가까이 하면 할수록 서로를 찌르고 상처주고 받는 고슴도치와 같이…… 성경적 교회,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꾸며 애쓰는 자들을 주님이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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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까지는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는 것이 정상”이기에 참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완전은 커녕 때로는 상식적이지도 않은 교회의 모습에 고통스럽기도 하구요. 댓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화이팅!

  4. 정규 강도사님. 잘 읽고 갑니다. 저도 가나안 청년들로 인해 고민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유익한 글 기대합니다. 언제 시광교회 탐방 한번 허락해 주세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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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광교회는 아무 때나 오시면 됩니다^^ 좀 있으면 안수받으시죠? 목회에 은혜가 넘치시길 잠시 기도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요.

  5. 깊은 생각을 담은 글 정말 많이 감사합니다. 제도적 교회의 비판이, 자기정당화와 교만으로부터 나올 수도 있다는 지적에 대해 특히 감사를 드립니다. 제도적 교회를 변호하는 측이나, 비판하는 측 둘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기가 너무 쉽더군요. 얼마든지 잘못된 이유로 변호할 수 있고, 잘못된 이유로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좋은 최선의 목표가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것이, 가나안 성도에 대한 논쟁에서 아주 중요할 것 같습니다. 결국에는 문제점이 많은 제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안에 둘 것이냐, 문제점을 피하기 위해 제도 밖에 둘 것이냐 이 둘 어느쪽보다도 더 아름답고 선한 것은, 본래 모습을 되찾아 한사람 한사람이 귀한 지체가 되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을 세우는 것일태니까요. 개인과 공동체의 궁극적인 회복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서로 상호작용하는, 둘다 같이 이루어 가야하는 일 같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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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하신 대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좋은 최선의 목표가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대안을 내놓을 수도 없고, 내 놓을 필요도 없지만, 누군가는 대안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이 와중에, 말씀하신 대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구요. 바라기는 제발, 말씀하신대로 “개인과 공동체가 상호작용하는” 회복이 이루어지길 소망해 봅니다. 주신 의견 감사드려요^^

  6. 먼저 세심하게 글을 작성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번에 올리신 글에 답글을 많이 달았었는데, 오늘은 무명으로 작성하려합니다. 이해해주세요;;;

    먼저 이 글은 가나안 성도로서, 왜 교회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어디에서 제도권 교회에 실망할 수 밖에 없었는지 밝히기 위한 글입니다. 시기는 2011년 8월부터 2015년 2월까지의 3년여의 기간동안에 있었던 일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유학중에 다니던 교회는 크게 2번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요. 저는 최종적으로 한달여전에 가나안 성도로서 교회를 다시금 떠나게 되었습니다.

    배경: 내 이름은 아무개, 미국 중부에 온지는 이제 어느덧 3년이 넘어간다. 미국 유학길에 오른 후, 처음 와서 출석하게 된 교회가 바로 M 교회이다. 교회에는 기타를 치던 청년 한 명과, 낡은 피아노 한 대, 철제 의자들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고,몇몇 집사님들이 앉아계셨다. 작고 허름한 건물에, 적은 인원이 예배 드렸지만, 개인적으로 오순도순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터라 적응하는데 힘들지는 않았다.
    9월에 들어서 가을학기가 시작하면서, 제법 청년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찬양팀을 조직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내 기억에 의존하므로, 약간의 오차가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핵심적인 부분 (교회가 분리되는 시점에 있었던 일)은 정확히 기억하고자 최선을 다할 것이다.
    평온한 오후 같이 한주 한주가 지나갔다. 어느덧 겨울이 되었고, P양은 졸업을 하고 귀국하였고, 짧은 겨울 방학을 맞이한다.
    초창기에 찬양팀의 존재는 M교회의 근 20년 역사상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고, 사실상 전 교인이 찬양연습에 참여할 정도로 많은 관심과 배려가 깔려 있었다. 집사님들이 매주 금요일 연습할 때마다, 피자나 간식 등을 챙겨주셨고, 같이 노래도 부르면서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2012년 2월부터 2012년 7월까지 (문제의 발단, 제직회)
    한 나이든 집사님이 장로가 되기 위해 제직회를 구성하게 됩니다. 당시 M교회에는 집사님들이 여럿있었고, 시무장로나 원로장로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M교회는 이 근방에 가장 큰 한인교회인 L교회에서 10가정이 분리되어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장로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합니다. 첫째는 제직회의 필요이상의 권리이고, 둘째는 담임목사님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심지어는 장로로 선출되게 해달라고 집에 찾아와 협박도 했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인자하고 교수로서 풍채도 좋으신 양반이었지만, 이때는 돌변해서 겁박하고 폭언도 난무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시카고에 있는 노회목사님들과 임시당회를 구성하였고, 장로로서 선출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집사님에게 통보하였습니다. 솔직히, 십일조도 한번 내지 않고, 교회에서 딱히 섬기는 직분도 없이 나이만 찼다고 장로를 달라는 여느 한국의 한심한 어른들과 다를바 없다는 것을 그제야 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행동은 그 이후에도 여전하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2013년 1월(가장 중요한 시간, 폭풍전야)
    임시당회가 여러번 열리고 최종적으로 장로선출이 무산되자, 그 나이드신 집사님은 제직회의 힘을 동원하여 점점 구체적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기에 이릅니다. 그 과정에서 담임목사에 대한 이단시비로 고소까지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노회는 이단시비에 관한 공청회를 소집하고, 교회에 다니던 리더급 청년들이 노회 서기와 장로님들에게 사실 및 의견을 전달합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고, 당시 여러명의 청년들이 함께 같은 의견으로 목사님을 지지하고, 집사님의 문제점을 토로하게 됩니다.

    2013년 1월 27일 – 갈등 폭발 1
    결국 임시당회는 이단시비에 대해서, 신사도운동에 관한 설교를 한번 한적이 있으나, 그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치려는 목적이 아니었음에 기소합니다. 하지만, 집사님들은 심한 욕설과 망언(목사가 이단이며 사이비고 청년들을 회유해서 이상한 일을 한다는 식의)을 일삼으며 예배 후에, 심지어 몸싸움까지 일어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어린 청년들이 교회에 다음주부터 나오지 않게 됩니다.

    2013년 2월부터 2013년 5월까지
    당시 노회 구성원들은 결국 교회를 분리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집사님들에 대한 아무 처벌없이 그냥 이름만 바꾸어서 교회를 개척하도록 권고합니다. 그래서 남아있던 청년들과 목사님은 N교회라는 타이틀을 변경한 후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처음으로 제도권 교회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잘잘못을 따져야 할 노회는 전혀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하며, 잘못된 집사님들에 대한 권징과 치리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그 사람들이 기존의 교회 타이틀까지 가지게 하고, 노회에서 설교목사를 파견하는 식의 처리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와 여러 사람들이 멱살까지 잡혀가면서 미친거라고 집사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목사와 사모님, 그리고 그 어린 아이들까지 그런 광경을 다 보게 된 것에 도저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고, 근 몇달동안 너무 힘들게 교회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기는 한 것인가, 어떻게 저렇게 악한 무리들이 교회에 판을 쳐도 가만히 계시는 건지, 차라리 천둥번개라도 내려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13년 6월부터 8월까지
    그래도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개척한 N교회는 차츰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학부생 레벨의 친구들이 10여명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혹은 다른 교회로, 혹은 아마도 가나안 성도나 심지어는 신앙을 떠난 친구들도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 다녀오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정리하고, 결국 8월말에 N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제가 이 시기에 교회를 떠나기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결심한 이유는, 교회가 어느정도 안정이 되었고, 저는 연초에 겪은 충격적인 일과, 여전히 지난한 노회의 반응에 실망하고 또한 목사님 또한 상세하게 과정을 설명하지 않은 것에 실망을 느낀 것이었습니다.

    2013년 9월부터 2014년 1월까지
    이 시기에 저는 근처 미국교회에 잠시 다니게 되었습니다. 가끔 들리던 교회인데, 미국의 젊은 목사님이 참 설교가 마음에 와닿았었습니다. evangelical church이다 보니, 다른 인종과 여러 ethnic group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랑이 있는 교회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제가 함께 N교회를 다니던 친구를 통해 또다른 아픔이 교회에 남아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실, 이 시기에는 제가 직접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기에, 간접적으로 들은 내용만을 토대로 작성함을 알려드립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청년들이 N교회에 몰려들게 됩니다. 기존의 리더급 청년들이 열심히 전도하고 라이드를 해주면서, 교회가 조금씩 커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한 집사님 부부가 교회에 출석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집사님 부부와 친분을 쌓으면서 신앙적으로 잘 훈련받은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어쨋든, 그 부부와 목사님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적인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양대교리중에, 담임목사님은 너무 공의만을 강조한다고 말했답니다. 조금 우스은 논의이지만, 그래도 여기서 시작했다고 짐작합니다. 그래서 리더급 청년들에게 따로 만나서 목사님이 조금 이상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신뢰가 금이 가기 시작했던거 같습니다.
    1월 말에, 원래 친분이 있던 친구와 몇몇 형들과 간단하게 학교에서 차를 마시면서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사실 예전에 이단 시비가 있을 때, 약간은 불안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떠나려고 하는 청년 부부의 말은 조금 충격적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케어가 부족하다는게 핵심이었습니다. 자기들이 교회를 지키고 집사님들과 싸우면서 지쳤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실상 청년들을 부려먹고 많은 봉사와 라이드, 소위 집사님들 레벨에서 해야할 봉사까지 시켰다는 것입니다. 일을 많이 시킨 것에는 동의하지만, 저는 목사님이 청년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그 부부는 목사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014년 2월 2일 – 갈등 폭발 2
    결국 금이 커져서 폭발하였고, 그 집사 부부가 먼저 교회를 떠나고, 이어서 청년 리더부부는 교회를 떠납니다. 그리고 그 리더를 따라서 수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옮기게 됩니다. 이게 불과 일주일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목사님과 자제들이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수십명이 되던 청년성도들 중 남은 이는 결국 단 두 명에 불과하게 됩니다.

    2014년 2월부터 5월까지
    이때 제 친하던 친구 한명이 남았고, 그 친구가 도움을 요청하면서, 저는 다시 N 교회에 나가게 됩니다. 저는 남은 청년들과 목사님 가정을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교회가 분리되면서 힘들었을 시간이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아픈 일이 발생해서 일단은 제가 다시 교회에 가서 모라도 하면서 힘을 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4년 5월부터 2015년 1월까지
    결국 남아있던 두 명의 청년들은 졸업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제 혼자 교회에 남게 된 저는 홀로 찬양인도를 하면서 한주 한주 버티어 나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새 학기가 되어 2명 정도의 청년들이 나오지만, 알다시피 학부생들은 매주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저랑 나이 차이가 나다보니, 같이 교제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2015년 3월 현재… (에필로그)
    서서히 지치던 저는 최근 다시 교회를 나오게 되었고, 목사님께는 죄송하지만, 저의 신앙도 중요하기에 더이상 여기서 신앙생활을 하는게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의 일인성도로 1년가까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저를 점점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저는 가나안 성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도권 교회에 포함되어 있지만, 아무와도 교제할 수 없는…
    신앙생활이 항상 순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가 M교회와 N교회를 다니면서 느낄 정도로 힘든 적은 없었습니다. 악한 집사님들에 의해 교회가 분리되고, 거기다가 이상하게 홀린 청년들이 다 떠나면서 더이상 교회는 그 역할을 다하기 힘들어졌습니다. 더 힘든 점은, 제가 혼자 남아 있던 동안, 떠났던 청년들과 만나게 되면 다들 교회가 어떠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왜 교회를 떠나야 하는지 고민도 안하면서, 그냥 친구따라 강남가듯이 교회를 옮기는 것이 얼마나 남은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는지에 대한 생각도 없는 것에 화도 나고 정이 떨어졌습니다.

    이상이 제가 겪은 제도권 교회의 아픈 기억이었습니다. 저는 현재 다시 다른 한인교회로 출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가나안 성도들의 이상적인 모임이 있다면 저는 오히려 그 곳을 찾고 싶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두렵습니다. 제가 겪은 아픔이 다시 반복되지는 않을가 하는 마음이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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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남기신 댓글의 무게를 감안할 때, 저도 숙고하고 또 댓글을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주신 사연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위로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몰라서요…. 그래도 일단은 짧은 댓글이라도 남깁니다. 좀 긴 반응은 시간이 지나고 다시 남겨드리겠습니다.

      주신 사연 읽으며 괴로웠습니다. 잠시 저 자신을 질책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구요. 누구신지 모르지만, 님을 위해서 잠시 기도합니다.

  7. 정규 형님… 평안하시죠~
    요즘 들어 얼굴 뵙기가 더 힘들어지네요^^

    대학 청년부를 섬기며 교회에 대한 이해와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입니다. 많은 고민과

  8. (중간에 잘못 눌렀네요..;;)

    많은 고민과 눈물 속에서 오늘날 청년들이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글들과 고민이 정말 반갑습니다.
    앞으로의 글도 많이 기대하고.. 또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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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 보기 힘들어졌다니… 죄송해요T_T

      조만간 월요일에 함 점심 사주러 갈께요!!!!!
      만나서 같이 교회 이야기, 삶 이야기 나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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