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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에게 설교자를 내려주소서! – 조지 윗필드의 전기를 읽고

이 리뷰를 심성현 전도사에게 드립니다. 그는 신학대학원 2학년 시절, 저와 함께 기도하며 공부하고 독서하며 삶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비록 제 친구지만, 그의 신학함과 삶은 누구보다도 더 제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그를 보고 윗필드를 보며 참된 목회자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했습니다. 그와 함께 윗필드와 더불어 청교도 이야기를 한 것은 큰 복이었습니다. 비록 그는 지금 간암과 싸우며 공부를 쉬고 있지만, 언젠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회복되어 강단에서 사자후를 발할 것입니다.

 

저는 두 개의 아담한 책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에 있는 책상인데 주로 이곳에서 설교와 성경공부를 준비하고 신학을 공부합니다. 가까운 곳에는 사도행전 주석들과(사도행전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에) 주요한 신학서적들, 사전 등의 원어관련 자료들과 리뷰를 쓰기 위해 읽고 있는 책들을 꽂아두었지요. 조금 먼 곳에는 각종 주석들과 스터디 바이블, 교의학 책들, 그리고 손님이 오면 선물하려고 사둔 책들이 꽂혀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제가 교회를 섬기기 위해 필요한 지식들을 전수해 줍니다. 이 책상은 제 일터이기 때문이지요.

스크린샷 2015-06-02 오후 9.26.33다른 하나는 집에 있는 책상입니다. 대부분의 제 책들은 여기 있는데, 사두기만 하고 아직 펼쳐 보지도 않은 책들도 상당합니다. 방대한 주석전집들이 여기저기 꽂혀 있고, 아직 정리하지 못한 책들이 박스 안에 들어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중요한 책들은 제가 앉아있는 곳에서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대체로 전기들과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경건서적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가 있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서로 다른 버전으로 두 권이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부흥과 영적 침체도 꽂혀 있네요. 그리고 5년 전에 8만 3천원을 주고 산, 두 권으로 된 조지 윗필드의 전기가 있습니다.

집에 있는 책상에 앉을 때는 보통 하루의 사역이 끝나고 돌아와 쉬는 밤이기 때문에, 제게는 하루 동안 지은 죄를 회개하고 식어버린 마음을 뜨겁게 하며,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고 위로와 확신을 받게 할 만한 ‘길르앗의 향유’가 필요합니다. 2011년 말에서 2012년 말까지, 조지 윗필드의 전기는 식어버리고 상처받은 제 마음을 치료하며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고, 이는 곧 눈물의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델리모어가 쓴 조지 윗필드의 전기가 번역되어 소개된 이 때, 그 시절 누렸던 깊은 감동을 간략하게라도 기록으로 남겨보려고 합니다.

 

사도시대 이래 최고의 설교자

저는 책의 첫 부분을 읽으며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렇다. 이 책은 교회의 머리 되신 분께서 다시 한 번 특별한 부흥의 수단을 만들어 내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그분께서 이 영광스러운 일에 활용하실 청년들을 다시 한 번 일으키시리라는 소망으로 – 어쩌면 어느 정도의 내적 확신으로 – 집필되었다. 그 청년들은 어떤 자세를 지닌 사람들일까? 성경에 능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엄위하심과 거룩하심에 대한 의식이 그 삶을 지배하며, 은혜의 교리에 담긴 위대한 진리로 마음과 생각이 환히 빛나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아에 대해, 인간적 목표와 개인적 야심에 대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우쳐 알고 있는 사람, 기꺼이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고전 4:10)가 되려는 사람, 비난과 거짓말을 감당하려는 사람, 기꺼이 수고하고 고난당하려는 사람, 세상의 찬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두려운 심판대 앞에 설 때 그분께 칭찬받는 것을 최고의 소원으로 삼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상한 마음과 눈물 가득한 눈으로 설교하는 사람, 그의 사역 위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넘치도록 부어 주실 사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변화하는 모습에서 “이적과 기사가 이어지는”(신 13:2) 것을 목도하게 될 사람들일 것이다. (p. 33–34 한국어 번역판, 이하 모든 인용은 번역판 기준)

 

이 부분을 읽고 밤이 늦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느 날 밤, 제 일기장에 아래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어제는 주께서 내가 윗필드의 전기가 묘사하는 이러한 청년이 되도록 은혜를 부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성현이에게 이 부분을 문자로 보냈다. 우리 둘 다 이러한 설교자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자고 말했다. 오늘 기차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도 내 마음은 델리모어가 제시하는 위대한, 그러나 초라한 설교자의 비전에 사로잡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이러한 바보가 되도록 도와주세요!!

 

책의 말미에 델리모어는 유명한 설교학자인 에드윈 C. 다간을 인용합니다. 그는 “사도시대 이래 설교의 역사에는 조지 윗필드보다 더 위대하거나 더 가치 있는 이름이 없다.”라고 말하지요(p. 1198). 진짜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의 은사를 그에게 부어졌고, 따라서 당대에 그가 가는 어느 곳이나 군중들은 수만 명씩 모여들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설교는 단순히 전달력에서만 좋은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였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매튜 헨리의 방대한 주석과 더불어 헬라어 성경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델리모어의 말을 들어봅시다.

한 가지 풍경이 머릿 속에 상상된다. 새벽 5시, 해리스 서점 위층 방에서 그는 영어 성경, 헬라어 신약성경, 렌리 주석집을 펼쳐 놓은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먼저 그는 영어 성경 한 부분을 읽은 뒤 헬라어 성경으로 단어와 시제를 연구하여 그 말씀에 대해 더 깊은 통찰을 얻고, 그런 다음 매튜 헨리는 그 부분을 어떻게 주해했는지 꼼꼼히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그가 개발해 낸 독특한 훈련 방법이 하나 있다. 그날 읽고 묵상한 말씀의 본질적 메시지가 정말 자기 영혼의 일부가 될 때까지 영어와 헬라어로 한 줄 한 줄, 한 단어 한 단어에 대해 기도를 하는 것이다(p. 97).

 

그의 청중 규모는 과장되었다 하더라도(p. 318–319) 엄청났습니다. 설교를 향한 그의 엄청난 열정, 설교량, 설교의 수준은 지금 읽어도 도전이 됩니다. 물론 대부분은 저 같은 범인들은 전혀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특별한 은사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럼에도 모든 설교자들이 주목해야 하는 아주 특별한 그의 배려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청중을 안배하는 그의 설교였지요. 윗필드의 설교는 모든 계층과 나이를 불문하고 효과가 있었습니다(p. 1184). 이러한 특징을 나타낸 일화 중 다음의 이야기는 특별히 감동적이었지요.

윗필드의 설교를 자주 듣던 한 소년은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작은 목소리로 “윗필드 씨의 하나님한테 가야 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윗필드의 설교는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 흑인과 백인, 젊은이와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에게 효력을 발했다(p. 1185).

 

롤 모델로서 윗필드가 보여준 이런 탁월한 설교자의 모습은 한 젊은 설교자의 마음에 설교의 엄위함과 위대함에 대한 소망,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있는 현장에 대한 소망의 불을 붙였습니다. 비록 지금까지 그 위대한 모습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의 인격과 삶을 보며 감화받다

물론 설교자로서의 윗필드의 모습을 보면서도 감동이 있었지만, 그의 전기를 보며 경험했던 도전과 감동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2012년 말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때때로 델리모어가 쓴 윗필드의 이야기는 저를 도전하고 격려하며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윗필드가 헨리 스쿠걸의 글을 읽고 자신의 죄를 깨달으며 구원을 갈망하다가 두 번이나 작문 숙제를 해가지 못했다는 부분(p. 88–89)을 읽고는, 그리고 미친 사람 같은 고행을 지속했다는 부분(p. 89–91)을 읽고는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왜 나는 윗필드처럼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는가? 그가 범한 죄를 나도 지었을 것이며, 내가 범한 죄들 중 그가 범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을까? 마음속에 절망감과 연약함이 엄습해 온다. 내 생각은 뭐든 순수하지 못하고 그 안에 때가 잔뜩 끼어있는 것 같다.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 이렇게 죄와 게으름 가운데 삶을 낭비하며 살아간다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큰 고난으로 징계하실 거라는 데에 두려움이 일고 있다. 두렵다.

 

윗필드가 사용했던 15가지의 자기점검기준(p. 94–95)은 오랫동안 제 판단기준이 되었습니다. 델리모어는 말합니다. “… (윗필드의 일기는) 무엇보다도 내면의 자아를 표현한다. 영혼의 갈망, 자신의 행동 동기 탐색, 지극히 사소한 잘못에 대해서까지 준엄하게 자신을 꾸짖는 말, 터져 나오는 하나님 찬양 등 이 모든 것이 아무 제한 없이 다 기록되어 있다.”(p. 95) 그리고 이 부분을 읽으며 저도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가혹하겠다. 나의 지극히 작고 사소한 잘못이라 하더라도 가혹하고 잔인하게 대하겠다. 그리고 그만큼의 강도로 이웃에게 따뜻하고 너그러우며 사려 깊은 마음으로 대하겠다.”

이러한 제 생각은 윗필드가 받았던 비난과 조소를 그가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면서 더욱 굳어졌습니다. 윗필드는 하버드 대학에서 자신을 비판한 소책자인 ‘하버드 대학 총장, 교수, 강사, 히브리어 전임강사가 조지 윗필드씨와 그의 행실을 논박하는 증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반응합니다.

제가 말로나 글로 무슨 경솔한 발언을 한 것이 있거나 혹은 무슨 적절치 못한 행동을 한 것이 있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사 여러분, 또한 제가 ‘일지Journal’를 통해 여러분이나 여러분이 몸담고 계신 대학에 잘못을 저질렀다면 이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설령 여러분들이 ‘증언’에서 저를 부당하게 비난하셨다 해도(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건 이미 용서되었습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으셨다 해도 말입니다(p. 837).

 

존 웨슬리 같은 동역자들과의 관계들을 읽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웨슬리와 더불어 예정 교리 논쟁을 대하는 그의 자세를 보면서, 저는 어떻게 생각이 다른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대화해야 하는지 고민했습니다. 웨슬리는 사역초기에 예정 교리를 비판하는 책을 출간했고(p. 331–338), 좀 지나고 난 후이긴 하지만 웨슬리에게 윗필드는 아래의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냅니다.

저는 선택 및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궁극적 견인 교리를 지난번 선생님을 뵈었을 때에 비해 만 배나 더 확신합니다(그게 가능하다면). 선생님은 달리 생각하시지요. 그렇다면, 설득의 가망성이 전혀 없는데 우리가 왜 논쟁을 해야 합니까? 결국은 형제애도 깨지고, 우리의 진심 어린 연합과 영혼의 다정함도 알게 모르게 없어지지 않을까요? 우리 사이에 늘 존속되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했던 바로 그것 말입니다. 우리가 분열하는 것을 보면 주님의 원수들이 얼마나 좋아할까요?(p. 485)

 

저는 이 부분을 읽고 비록 논쟁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의 연합을 얼마나 쉽게 해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주의를 받았습니다. 저는 델리모어의 책을 읽으며 여러 부분에서 윗필드에게 매료되었는데, 특히나 윗필드를 사랑하게 한 부분은 7부의 5장, 젊은 조력자인 코닐리어스 윈터의 눈으로 본 윗필드를 읽을 때였습니다. 그는 목회 견습생으로 2년 동안 윗필드와 함께 살았고, 윗필드의 인격적 성숙함과 더불의 그의 약점까지도 잘 볼 수 있는 입장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기록 여러 군데에서 윗필드에 대한 불만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저는 아래의 문장에 눈이 꽂혔습니다.

그는 정말 인심이 후했고, 어려운 사람 돕기를 거절한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은 많고 그 기대를 채워 줄 형편은 안 될 때도 있었다. 그는 한 번 맺은 우정은 고집스럽게 유지했다. 승승장구하던 친구가 하나님의 섭리로 역경을 만나도, 친구를 돕기 위해 그 섭리와 함께 움직였다.(p. 1139–1140)

 

이러한 윗필드의 삶을 읽어 내려가면서, 저는 단 한 번도 자극을 받지 못하거나 아무런 도전 없이 책을 덮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도전은 “나도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겠다.” 는 야망 섞인 마음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은혜의 교리에 대한 그의 확신과 같이 “이러한 마음을 제게 베풀어 주시옵소서.”라는 간구로 이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은 2012년 12월 29일 밤, 저는 아래와 같이 일기를 썼습니다.

델리모어는 말한다. “허물을 지적하는 말을 기꺼이 들으려 하고 또 이렇게 한없이 자기를 낮추는 등 이런 보기 드문 특성 때문에, 그를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은 이게 사실일 리 없다고 주장했고, 어떤 이는 ‘뭔가 위선적인 면이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윗필드의 삶을 진솔하게 연구해 보면, 그런 모습들이 다 진짜 그의 모습이며 그가 주님 앞에 상한 심령을 가졌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는 당연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p. 1178)” 비록 델리모어가 몇 가지 단점들을 이어서 지적하긴 했지만, 나는 내 마음이 참으로 이렇게 겸손하게 되기를 원한다. 지난 1년이 넘도록 이 책을 읽었지만, 내 마음은 그의 위대한 설교 능력과 탁월한 지성보다는 비할 데 없는 그의 겸손함에 매료된다. 그리고 감히 기도하고 싶다. (얼마 되지 않으나) 나의 모든 지성을 가져가시더라도 윗필드의 겸손을 내가 가지게 해달라고.

 

그 시절 그렇게 결심했던 것만큼 제 인격이 성숙하고 변화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슬프긴 하지만, 제게는 성경이 요구하는 윤리적인 삶을 실천한 모범을 책으로 만날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때때로 형광펜으로 표시해둔 곳을 다시 찾아보면서 기도에 불을 붙이기도 했고, 이제 번역본이 나왔으니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볼 수 있겠지요(참고로, 한국어 번역본은 2권으로 된 원서보다 싼 가격으로 1권으로 나왔습니다. 그것도 전혀 내용의 손실이 없이 말입니다. 편집과 번역도 모두 최상급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설교자를 내려주소서!

다시 델리모어의 서문을 인용하겠습니다.

불법이 판을 치고 노골적 배교가 횡행하는 20세기 한복판에서 하나님께서 이 책을 활용하여 위와 같은 사람들을 세우시고 200여 년 전에 목도했던 것과 같은 그런 강력한 부흥의 역사를 허락하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와 함께 이 책을 세상에 내어놓는다(p. 34).

 

이러한 델리모어의 바람은 당대에 이루어졌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가 사역하던 캐나다나, 이 책을 그토록 기다렸던 마틴 로이드존스가 살던 영국이나 또는 미국에도 ‘윗필드처럼 출중한’ 사람은 다시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0년 전에 목도했던 강력한 부흥은 더더욱 오지 않았지요. 델리모어가 살던 20세기뿐 아니라 현재까지의 21세기에도 말입니다. 하지만 델리모어는 그의 윗필드 전기를 통해 21세기 서울에 살고 있는 한 설교자에게 이러한 마음을 주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나는 이러한 설교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미 22세 때의 첫 설교부터 15명이나 미치게(회심하게) 만들었던 엄청난 파급효과를 내는 설교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을 읽은 느낌이다. 처음에 나는 절망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윗필드라는 위대한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베푸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윗필드처럼 되지는 못할지라도 윗필드 같은 설교자를 다시 21세기 서울에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구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델리모어의 말과 같이, 여전히 “불법이 판을 치고 노골적 배교가 횡행하는” 21세기에도 이러한 설교자를 달라고 간청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고통스러운 시기에 우리의 유일한 해답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결심한다. 죽을 때까지 나는 이 땅에 이러한 설교자를 달라고 기도하겠다. 그리고 내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내 눈으로 보는 그 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설교를 들으며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내 기도가 나의 죽은 후에 응답된다 할지라도, 나는 하늘에서 그 설교를 들으며 기도를 응답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힘껏 찬양할 것이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설교자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리고 기대합니다. 윗필드의 전기를 읽은 누군가가 저와 함께 설교자를 달라고 기도하기를. 그리고 누군가는 윗필드와 같은 설교자가 되기를.

 

 

Over de auteur

정규

진짜배기 잉여 필자. 다른 필진들과는 다르게 공식적인 '저자'다. 담임 목회자이자 두 딸의 아버지. 잉여롭고 싶은데 찾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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