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복음의 필연성
31-33절의 초점은 인자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시고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사탄의 자리에 서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이 부분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자의 죽음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자의 죽음은 복음이지 우연적 사건(random)이 아니다!
31절에서 눈여겨 볼 단어는 must. 필연성이다. 그리스도는 반드시 고난을 받으시고 반드시 버린 바 되시며 반드시 죽임을 당하시고 반드시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이다.
32절에서 예수님은 이를 명백히 말씀하신다. 즉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할 때 예수님은 명확히 본인이 무슨 의미로 이 얘기를 하신 것인지 알고 있으셨다는 의미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곁으로 데리고 가 ‘꾸짖었다’. 예수님의 고통과 거절과 죽임 당함과 부활은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베드로에게는 꾸짖을 만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승인하지 않은 것이다. ‘틀렸어요 예수님!’이라고 말한 것이다.
33절에서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이 꾸짖으신다. (헬라어로 베드로의 ‘항변’과 예수님의 ‘꾸짖으심’은 같은 단어다.)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로 시작하시고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꾸짖으셨다. 즉, 타락한 인간의 사고 방식은 사탄의 사고방식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과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니, 베드로 내 친구여 넌 틀렸다. 내가 너를 꾸짖노라. 사탄도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을 모르고 말하는 것은 그의 대변인이 될 뿐이다. 사탄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모두 헤아린 바 되었다.
사탄과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싫어한다
그렇다면 사탄과 타락한 인간이 인자를 꾸짖을 정도로 미워하는 이것은 무엇일까? 이 필연성을 왜 그렇게 거부하고자 하는 것일까? 네 가지 이유로 그렇다.
첫째, 왜냐하면 성경에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씌여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메시야는 고통 당해야 했고 죽어야 했고 침 뱉음 당해야 했다. 반드시 부활하셔야 했다.
둘째,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상하시기만 할 뿐 아니라 그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 렘1:12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
셋째,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 전부터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연으로 일하시는 것이 없으며 모든 일을 당신의 지혜로 하신다. 예수님 죽음에 관여한 모든 인물들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넷째, 왜냐하면 마지막 궁극적 목적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엡1.5-6;11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지난 50년간 놀라운 일이 있어왔다. TGC가 존재하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사역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절대주권적 사역으로 일어났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학문적인 것이 아니며 부차적인 것이 아니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실재이며 복음을 하나되게 하는 그 한 땀(stitch)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본문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제어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없다면 복음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연한 죽음일 것이다. 우연한 죽음은 아무도 살릴 수 없다! (Random death saves nobody!) 수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보게 되기 시작했고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예배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의 아들이었군요. 당신의 계획이었군요. 당신의 손이었군요. 나의 영원한 기쁨과 용서를 위해서… 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자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행하셨군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는 복음 전체를 붙드는 한 땀의 황금실이다.(golden stitch holding the gospel together.)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마가가 말하는 이런 내용을 왜 복음이라고 여길 수 있는가?
첫째, 예수님은 2장 후에 10:45에서 자신의 죽음을 대속물이라고 정의하신다. 많은 이들을 위한 값으로 이 죽음이 지불되었다.
둘째, 막14:24에서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는 새 언약을 사는 피라고 말씀하신다. – 새 마음과 죄 용서가 이 피로 지불되었다.
셋째, 막8:35에서 예수님 스스로 이를 복음이라고 부르셨다.
이제 예수님께 일어난 이 일들이 왜 복음인지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이를 듣고 우리는 “어떻게 31절에 포함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대속된 자들 사이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부르짖게 된다.
그리스도 복음을 ‘믿으라’는 무슨 의미인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34절-38절에 있다. 예수님은 대중들을 향하시고 그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신다. 물론 짧은 답은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일 수 있다. 우리는 물론 그렇게 전해야 한다.** 그러나 도전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믿으라’는 말에 예수님이 의도하신 뜻을 담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34-38절은 믿음에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심장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믿으라’라고 전파할 때 듣는 사람들은 ‘믿으라’는 말을 다 다르게 이해한다. 우리는 거기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는데 바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새 자아가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부인하는 자아와 부인 당하는 자아가 있어야 한다. 부인 당한 자아는 반드시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넌 죽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아가 있다. 한 자아는 자신의 생명이 이 땅에서 이 땅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극대화시켜 모든 것을 얻어내고자 한다. 그 자아는 죽임 당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힘 당해야 한다. 또 다른 자아는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이 땅이 줄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귀하고 기쁨을 주는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지 당신 자신만을 말씀하지 않으셨고 당신 자신과 복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복음을 보고 알고 맛본다.
이런 복음에 반하는 이 세상의 가장 큰 두 가지는 소유와 명예다.
36-38절을 통해 모든 것을 얻고도 이 생명을 얻지 못하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소유들은 천국에서 통용되지 못한다(have no currency in heaven).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지 않은 것은 다른 보물을 좇아간 것, 다른 것을 더 소중히 여긴 것이다.
38절은 명예에 관해 말씀하신다. 우리는 모두 소유 외에 다른 이들의 인정을 얻고자 한다. 인자의 도래는 영광스러울진대 누구의 승인을 원하는가? 누구의 수치가 되기를 가장 두려워하는가? 무슨 관계가 가장 소중한가?
다시 35절 후반으로 돌아가보자. 여기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자기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의 모든 고통과 십자가와 부활을 소유와 명예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자는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제 ‘믿음’에 무슨 의미를 담아 전할 것인가? 이것이 믿음의 내용이다.
첫째, 불신자에게 소식을 먼저 전하라. 소식 자체가 드러나게 하라. 그들은 이 소식을 모른다. 이런 저런 지켜야 할 사항들은 알지 몰라도 소식 자체는 잘 모른다.
둘째, 그 소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하라. 그의 고통과 죽임 당함과 부활을 보게 하라.
셋째, 이 세상을 사랑하고 소유와 명예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영원한 죽음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라.
넷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서 거부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보이신 영광과 그 후 보이신 영광과 장차 보이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약속을 가득 차게 하라.
다섯째, 예수님을 닮아 베드로를 닮아 그들이 시작부터 많은 고난을 통해야 마지막 때에 이를 것이라고 알려주라. 사탕발림은 없다.
만약 새 자아 안에 가장 큰 기쁨이 없다면 자기 부인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