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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와 장례

목사가 되었습니다. 진짜로 말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건 2016년 10월이었지만, 지난 2022년 10월 – 놀랍게도 딱 6년만에 – 한 교회의 청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23년 1월 1일부로 한 제가 공부하는 트리니티 근처에 있는 한 한인 교회에 담임 목회자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2023년 1월은 제가 정확하게 만 40세가 된 해였습니다. …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간을 따라 있었던 이야기를 시작하면 너무 글이 너무 장황해질 것 같네요. 그냥 “저 목회 시작했습니다”라는 간단한 신상 업데이트 정도로 두고 본론으로 넘어가죠.

고민을 좀 했습니다. 진짜배기를 처음에 만들었던 건 신학과 신앙의 조화를 이루어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부족함으로 성실하게 운영하지는 못했던 것 같네요. 여하간 개인적인 목회 이야기를 올려도 되는 건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남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고, 다시 글을 써보려 합니다. 목회 해보니, 결국 신학은 교회에서 꽃피는 것이라는 생각을 갈수록 더 강하게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초짜 담임목회자의 고민들을 (다 드러낼 수는 없더라도) 조금이나마 나눔으로서 저도 성장하고 듣는 분들도 고민을 함께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로 오늘은 “목사와 장례”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장례식을 많이 다녔습니다. 부모님께서 항상 “다른 사람의 슬픔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단다”라고 말씀하며 데리고 다니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인용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15)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전도서 7:2~4)

저는 마음으로 동의하며 병원과 장례식장을 따라다녔습니다. 그 슬픔의 현장에서 비로소 인간의 본질이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진심은 웃음보다는 눈물에서 더 잘 나타납니다.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는 것은 결국 기쁠 때보다 슬플 때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담임 목회를 시작하고 나니 죽음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더군요.

담임 목회자가 되면 자연스럽게 성도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에 있는 일들을 함께 하게 됩니다. 아기가 태어나고 유아 세례를 받을 때, 불신자가 처음 신자가 되어 세례를 받을 때, 처음 성찬을 받을 때, 사랑하는 이를 만나 결혼할 때, 아픔 가운데 있을 때,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숨을 내쉬고 주님 품에 안길 때, 담임 목회자는 그들과 함께 합니다. 저도 겨우 1년 반 목회 기간 동안 이 모든 순간을 모두 함께 했습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은 담임 목회 사역을 설명하고 풀어내는 이야기에서 이 순간들을 목회자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다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저는 신학교에서 예식서를 배운 적도 없고 각 예식의 집전 방법을 배운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 신자의 탄생과 결혼과 아픔과 죽음이라는 실존적 경험이 신학과 어우러지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조직신학 인간론이 다루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창조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이야기에 대해 다룰 뿐입니다. 물론, 깊이 들어가면 다루게 되겠지요. 주요 신학자들의 조직신학 책에는 ‘개인의 종말’에 관한 부분이 있긴 하니까요. 그렇지만 제가 나온 신학교에서 인간론은 1학점에 그쳤고, ‘모두가 죽는다’는 내용 외에 기억에 남는 것은 없네요.

그러다 최근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집전해야 하는 장례가 우리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아프신 과정과 죽음을 마주하신 과정까지 함께 했던, 사랑하는 집사님의 장례였습니다. 온 교회는 침통해했고, 저 역시 깊은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장례 특성 상 천국환송예배, 발인예배, 그리고 하관예배를 해야 합니다. 세 번의 예배를 준비해야 하죠. 처음이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앞서 언급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이런 거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정작 이것이야 말로 정말 중요한 거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죽음이야 말로 신학과 인간의 삶이 가장 밀접하게 만나게 되는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기독교 신학이 아니라도 대부분의 종교나 신앙은 그 체계의 복잡성과 무관하게 죽음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절대로 이겨낼 수 없는 상대를,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낭떠러지를 마주하게 합니다. 선택의 여지도 없습니다. 무조건 마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죽음의 향기를 조금이라도 느낀 사람은 신기하게도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생명의 있음과 없음의 경계선에 있을 때 인간은 처절하게 해답을 갈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얻는 해답에 따라 우리는 절망하고 체념하거나 소망을 얻고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보다 더 신학이 필요한 시점이 있을까요? 이보다 더 선명하게 기독교 신앙의 독특함을 드러낼 수 있는 시점이 있을까요? 평소에는 별 생각없이 대하였던 부활을 이때처럼 진지하게, 그리고 소망 가운데 바라게 될 때가 있을까요?

그런 마음으로 장례 예배식장 강단에 섰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보았습니다. 상실의 슬픔은 단지 ‘소리 없음’의 고요함 이상의 차분함을 가져왔습니다. 유족들을 포함하여 모두 담임 목회자인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 너머로 마치 그들의 영혼이 보이는듯 했습니다. 저는 분명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인데도, 마치 그런 위로를 내게서 원하는 듯이 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가장 진지하면서도 위로를 갈망하는 눈빛으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듯한 양들과도 같았습니다.

세 번의 예배를 은혜 가운데 마무리하고 저는 한 가지 확실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목회자는 삶과 죽음의 틈새, 이 땅과 하늘의 틈새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부름 받은 사람이란 사실입니다. 평소에 부활의 의미를 부르짖는 사람이라면, 가장 부활을 고대하게 되는 그 때에 더 절실하게 부르짖어야 할 겁니다. 평소에 복음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라 전하는 자라면, 그 어느 때보다 복음의 능력을 누리기 원하는 이들에게 복음으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만약 개혁주의 신학을 부르짖느라 핏대를 세우는 사람이라면 목숨 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신의 신학적 확신이 참으로 죽음을 앞둔 사람과 사랑하는 이를 잃은 유족을 위로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할 겁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저는 복음과 말씀과 바른 신학은 참으로 우리를 위로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성도들이 목회자를 통하여 받는 위로는 단지 말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목회자가 함께 함을 인하여, 목회자의 눈물을 통하여,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부활을 향한 확신을 인하여 위로 받았습니다. 신학과 성경을 ‘이해’해야만 위로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좁은 생각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었네요.

계속 이런 글을 자주 올리려고 합니다. 다음 글에서 또 뵙죠.

Over de auteur

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박사 과정 중 부르심을 받고 현재 시카고 베들레헴 교회 담임 목사로도 섬기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Comments 2

  1. 사역의 생생한 현장과 목회자의 진심을 좋은 글로 담아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소식들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 목사님의 진심과 깊은 깨달음이 영혼에 울림을 줍니다. 무엇보다 “목회자는 삶과 죽음의 틈새, 이 땅과 하늘의 틈새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부름 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이 너무도 공감이 되고, 그렇게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 응원합니다! 저 또한 다음 소식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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