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은 참 건강한 것이다. 복음주의 기독교로 말하자면, 그 뿌리는 16세기 종교개혁의 토양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부폐했던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개혁을 부르짖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복음주의에 현대적 개혁이 필요하다. ‘개혁주의 신학이란?’에서, R.C 스프라울 박사는 이해하기 좋은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개관을 보여준다. 쉽게 말해서, 이것은 개신교 종교개혁의 신학이며 역사적 복음주의의 핵심이다. 찰스 스펄전이 언젠가 말했듯이, 개혁주의 신학은 다름아닌 성경적 기독교이다.
이 글의 원문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본 강의의 전체 커리큘럼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제1강 들어가기 Introduction
Summary 요약
데이비드 웰스의 책 (신학실종 – 부흥과 개혁사 역간)을 인용함으로 강의가 시작된다. 당시 이 책은 신학계에 폭탄과 같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인용하신 부분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리주의적 기독교Confessional Christianity에서 신학이 실종되고 있으나, 그것을 막상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그리고 그 영향으로 믿음의 중심이 하나님에서 자신으로 옮겨 왔으며, 그에 따라 심리학적 설교와 실용주의적 관점이 대두되었다는 것.
우리 시대에 ‘신학’이 사라지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이란 무엇이냐?
무엇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개혁주의 신학은 ‘신학’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신학theology과 종교religion를 섞어 쓰는 경향이 있다.
그 차이는 다음과 같다.
‘믿음의 접근’에서 가장 큰 차이가 생긴다.
신학은 하나님 중심적으로 믿음에 접근하는 것이다. 인간에 관한 학문(인류학 같은)은 신학에 포함된다. 중세 시대에 ‘신학은 과학의 여왕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는 인간에 대한 모든 이해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빛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신(하나님) 그 자체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것이 시작점이며 궁극적 목표이다.
하지만 종교는 인간 중심적인 믿음 접근 방법이다. 인간이 특정 믿음 체계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인지가 종교학이다. 특정 문화 속에서 어떻게 그런 초자연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살피는 학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혁주의 신학은, 신학이다.
출애굽기의 이 말씀에서 금송아지는 하나님에 대한 대체물이었다.
인간의 가장 주된 죄는,
사도바울이 말한 바, 진리를 짓이겨 불의에 맡기고, 그 진리를 거짓말로 바꾸어exchange 창조주를 섬기는 대신 피조물을 섬기게 된 것이다.
교환은 전혀 부패하지 않으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과 완전히 부패한 피조물 간에 이루어졌다.
이것이 우상숭배이다.
종교는 우상숭배다. 하지만 심지어 종교로서의 기독교도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을 벗겨내고, 하나님 자신 대신에 다른 것을 섬길 때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가장 엄격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신학’=’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심리적 편안함을 주는 것, 느끼기에 좋은 것이야 말로 우리가 필요한 것이고, 신학은 필요없다는 풍토가 만연하다. 아니다.
사람들은 ‘삶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것’을 원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신학’이다.
왜냐하면, 신학이 삶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바로 신학이다. 모든 구조에 스며들어 있는 신학이다.
Thoughts 더 생각하기
제가 인문학을 사랑했던 것은, 인문학은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문학도 철학도 삶을 떠날 수 없습니다.
제게 인간이 철학을 하고 문학을 하며 역사를 탐구하고 예술을 궁구하는 이유는
삶을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다 신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짧지만 제가 경험했던 철학과 문학과 예술은
제가 원하는 수준까지 삶을 이해하도록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신학 줄기 중 개혁주의 신학으로 왔습니다.
왜냐하면 역시 다른 신학의 선배들은 제가 질문하던 질문에 시원스런 답을 주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개혁주의 선배들 앞에선 제가 그때까지 고민했던 건 꺼내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삶에 대해 궁금해하고 알고자 했던 건 그분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참 많이 듣는 요즘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과 지식은 애초부터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하기 위해, 혹은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지식을 쌓으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정말 진리에 가깝죠.
그래서 제가 ‘신학함’이라고 표현할 때,
저는 절대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 순수 지식’ 혹은 ‘삶과 분리된 의미의 지식’으로 생각하며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살아내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강의를 들을 때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나는 내가 떠드는 말의 반의 반의 반이라도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데 게을리 할 수 없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공부하고
치열하게 기도하고
치열하게 시험하고
치열하게 경험하고
치열하게 쓰러지고
치열하게 기뻐하고
치열하게 슬퍼하고
치열하게 분노하고
치열하게 하나님을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을 분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학에 있어서는 특히 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R.C.스프롤의 말대로 신학은 모든 상, 하위 구조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