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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사랑, 거짓 전쟁

 

거짓 사랑, 거짓 전쟁

어째서 그렇게 많은 남자들이 포르노와 게임에 중독되는가

  • DesiringGod.org에 올라온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굉장히 오래됐네요. 2012.5.25에 올라온 글입니다. 오늘 DesiringGod에서 첫화면에 띄웠길래 전 이제야 봤습니다. 글쓴이는 Russell Moore입니다.[1] 제 의견은 각주로 길게 ㅋㅋ 첨부했습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이 사람, 아마 여러분도 익숙하실 겁니다. 이 사람은 수많은 시간을 밤새 게임하고 포르노[2]를 찾는데 사용합니다. 그는 스스로가 ’찐따loser’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얼마나 ’찐따’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제 시간이 꽤 흘러서 여러 연구들은 포르노와 게임은 굉장히 중독적이며 강박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최근 책인 The Demise of Guys: Why Boys are Struggling and What We Can Do About It은 심리학자 필립 짐발도와 니키타 던컨의 저서로 그들은 우리가 포르노와 게임 중독 때문에 한 세대 전체의 남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도덕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이 중독들이 가진 특성이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욕구들을 재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새롭고 다른 것에 대한 미칠듯한 추구

만약 여러분이 설탕이나 데킬라나 헤로인에 중독되어 있다면 갈수록 더 많은 양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포르노와 게임은 모두 ’새로움’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 경험은 계속해서 더 새롭고 더 다른 것을 찾아나서는 모험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단 한 장의 야한 사진에 중독된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확장되는 만화경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포르노와 게임에는 핵심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포르노는 적당히 즐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포르노는 그 자체로 비도덕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임은 지나치지 않은 수준에서 즐기는 스포츠로 유해하지 않은 대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강박적 형태로 게임을 즐기는 것은 포르노와 같은 핵심을 공유합니다. 둘 다 무언가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남자라면 누구나 원하는 무엇이요.

포르노는 친밀감 없는 오르가즘을 약속합니다. 게임 속의 전쟁은 위험이 없는 아드레날린을 약속합니다. 이것들이 만드는 흥분은 너무나 매력적이며 사실상 그 중심은 영적인 것입니다.

 

 

짜릿함과 용맹함을 위한 선한 충동

사탄은 창조자가 아니라 표절하는 자입니다. 그의 능력은 흉내낸 것일 뿐이며 좋은 영향력을 지닌 것을 붙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을 자신의 목적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내와 이루는 자신을 내어주는 연합 속에서 성적 야성을 느끼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반드시 그래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남자는 자신의 가족과 사람들과 억업당하고 있는 약자들과 유약한 자들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올바른 사랑에 의한 짜릿함을 향한 충동과 공의로운 전투를 위한 용맹함을 향한 충동은 복음적인 것입니다. 성적 연합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누리는 연합의 우주적 비밀을 보여줍니다. 싸움으로 부름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며, 목자되신 그리스도가 이리의 이빨에서 자신의 양을 붙들어 구해내시기 때문입니다.

이 충동들이 끊임없이 확장되는 새로움의 환영을 향하게 된다면, 그것은 기쁨을 죽여버립니다. 배우자를 찾는 것은 선한 것이죠. 하지만 그 복됨은 아담 전에 끝임없는 새로움의 향연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꼭 맞는 사람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었고, 그녀와 함께 다음 세대를 가꾸어나가는 사명을 이루어가는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필요할 때는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투는 영원히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 전투는 저녁이 되면 끝나고, 영원한 안식 안에서 끝나게 됩니다.[2]

더 나아가 이 중독들은 언듯보면 상반되어 보이는 수동성과 과다한 공격성을 키웁니다. 포르노 중독은 우리를 음란한 찐따로 만들어버립니다. 한 영혼과 누려야 하는 연합을 자위 행위로 인해 얻은 고립과 맞바꾸어 버리면서 말이죠. 게임 중독은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는 겁쟁이로 만들어버립니다. 타인을 보호해야 하는 용기를 그 누구의 생명도 잃을 필요가 없는 폭력성으로 맞바꾸어 버리면서 말이죠. 두 경우 모두 사실 참된 사랑과 참된 전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3] 허나 그들은 살과 피를 가진 책임져야 할 진짜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픽셀로 형상화된 화면 위에 성 호르몬과 부신(副腎)에서 만들어내는 호르몬들을 배설할 뿐입니다.

 

 

흥분으로 흥분을 대응하라

짐발도와 던컨은 옳습니다. 이 세대는 너무나 위험한 거짓 사랑과 거짓 전쟁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포르노를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운 남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동시에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폭력적인 게임에 강박적으로 빠져있는 사람은 모두와 싸우는 동시에 그 누구와도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두 중독에 대한 해답은 흥분으로 흥분을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부를 사랑하시고 그녀를 위해 싸우셨듯이 우리도 그분의 복음적 시각을 가지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여성을 사랑하는 것을 배움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때론 자신을 집어삼키려하는 영적 존재들과 자신의 욕망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젊은 남자들을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 남자들이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전쟁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칩시다. 진짜 사랑과 진짜 전쟁을요…

 


  1. 전 Pornography 또는 Porn을 ’포르노’라고 직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야동’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사실 야동이라는 단어는 포르노라는 단어가 가진 꺼려지고 왠지 부정한 것 같은 뉘앙스를 지우고 어느 정도 유머스러움을 가미한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겠지만 지금은 그런 뉘앙스를 지니게 되지 않았나 싶네요. 하지만 포르노의 위해성을 정확하게 직시하기 위해서 적나라한 용어를 선택해야 합니다. 현재 porn이라는 단어 조차도 얼마나 익숙해졌는지, 미국에서는 그냥 재미있는 동영상(우리식으로 말하면 움짤) 같은 것들을 그냥 porn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관련 글을 읽었는데 지금 찾을 수가 없네요. 찾으면 링크 걸겠습니다. 행여나 궁금해서 구글링하시면 진짜 이상한 사이트로 연결되니까 비추합니다. ^^;;) 아무리 직접적인 언어를 써도 얼마든지 사회적으로 언어의 의미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직접적으로 번역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2. 혹시 저작권 관련해서 궁금하실까봐 사족을 답니다. 예전에 진짜배기를 운영할 때 DesiringGod에 문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필요한 아티클이나 설교문의 경우 전부 번역해서 블로그에 올려도 좋겠냐고요. 모든 자료에 대해 그렇게 해도 좋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이는 아마 DesiringGod의 정책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과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참 멋있다고 느꼈던 기억이 나네요.  ↩
  3. 게임 많이 해보신 분들은 이 부분에서 비웃으실 수도 있습니다. 게임 장르가 얼마나 다양한데 그러냐면서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먼저, 치고 박고 부수는 게 중독되는 게임의 대다수라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게임은 경쟁을 하는 형태가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맞고도 경쟁이죠. 또는 어떤 업적을 달성하는 형태가 있고요. 두가지 모두 필자의 의견에서 확장해서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현실 세계에서의 경쟁에서의 승리와 업적은 굉장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게임은 매우 작고 제어 가능한 환경 속에서 유사 짜릿함을 선사하죠. 전 그것이 게임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유사 짜릿함은 스트레스와 지침 속에서 허우적 될 때 좋은 자극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유사 짜릿함을 위해 진짜 짜릿함을 갈아치워버리는 경우겠죠.  ↩
Over de auteur

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박사 과정 중 부르심을 받고 현재 시카고 베들레헴 교회 담임 목사로도 섬기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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