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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잊자’라고 말하는 그대에게 – 세월호 1주년을 기리며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이 고통이란 녀석을 마주할 때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제가 겪었던 고통이 떠오르곤 합니다. 이제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잊을 때도 되었건만, 그 고통이 제게 남긴 잔흔은 깊어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놀랍도록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때 흐르다 흐르다 지쳐서 더 이상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지나간 자리가 지금도 뜨겁고, 심장은 슬픔을 퉁탁거리는 박자로 기억하는 것처럼 동일한 고동을 여전히 힘들게 울립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이들이 내가 겪은 류와 전혀 다른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그들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마음이 통한다’는 신비로운 표현도, ‘고통은 인류 공통적인 보편 감정이다’는 이성적 고찰도 모두 진리인 것 같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저도 그 고통을 느낍니다. 사실 고통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고통 가운데 우리가 겪는 속수무책의 감정들입니다. 사면이 하늘까지 치솟은 거대한 철벽이 나를 향해 시시각각으로 죄여오는듯한 그 감정은 단순한 슬픔도, 분노도 아닙니다. 절망과 소망이 공존하며, 폭발적 에너지와 무력함이 혼재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극도로 슬픈 사람은 의지하다가 내치고, 외면하다가 달려들며, 흐느끼다 오열하고, 고함치다 읊조립니다. 다만 표현의 한계로 인하여 선택할 수 있는 단어는 ‘슬픔’인지도 모르겠네요.

슬픔은 객관적 상실에 대한 주관적 반응으로서 실재합니다. 그렇게 아프고 힘들던 그 시절, 곰곰히 생각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대체 난 왜 아픈 걸까? 대체 왜 난 고통스러운 것일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고 해서 내가 똑같이 아픈 것도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고 해서 그가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니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고 해서 그가 치료받지 못할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극단적 상황이 되어 그가 죽어도 천국에 가게 될 것을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어째서 난 아파야할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일도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 슬픔은 감정 낭비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슬퍼한다고 해서 상실한 것이 되돌아오지도 않으며, 이미 상처받은 내 마음이 아물지도 않고, 만약 회복될 수 있는 것을 슬퍼하고 있다면 시간이 지나기만 기다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기억납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멍-‘해졌더랬습니다. 난 미친듯이 슬픈데, 난 죽을 것 같이 슬픈데, 심지어 슬프지 않으면 죄책감마저 드는데… 슬픔에는 이유가 없다니??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생각해보며 슬픔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사랑은 대상과 지속적으로 관계하고자 하는 강력한 성향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동물, 또는 애착을 가지고 있는 물건과 떨어지지 않으려 합니다. 항상 함께하고자 하고, 심지어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하나됨을 향한 강력한 욕구를 가집니다. 사랑이 자연스럽게 몰아(沒我)에 이르게 하는 것이죠. 슬픔은 그 사랑이 좌절되는 것일 겝니다. 끊임없이 사랑하고 싶은데, 계속 함께 하고 싶은데, 완전히 하나가 되고 싶은데 갑자기 사라져버릴 때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 안의 사랑이 향방을 잃고 헤멜 때, 그 사랑은 왜곡되고 뒤틀리고 난사되고 분출되고 비명을 지르게 됩니다. 슬픔이 날 집어삼킵니다. 사랑하는 이의 빈 자리를 바라보지만 그를 향한 내 사랑은 이미 사랑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관계할 이가 사라졌으니까요…

그런데 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즐기거나 익숙해지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상실에 깊이 담금질 당한 슬픔의 자리에서, 놀랍게도 그리고 야속하게도 인간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비참하죠. 끔찍합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죠. 그런데, 그게 그렇습디다. 그 어느 순간보다 더 강렬하고 생생하게 자신의 존재를 느낀단 말이죠. 슬픔이 우리의 실존을 까발립니다. 그 전에는, 그러니까 사랑하는 그 사람과 함께 하던 그 시절엔 알지 못했던 내 안의 수많은 찌꺼기들과 상처들이, 이미 아물었다고 생각했고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던 오물들이 역류하는 하수구처럼 뿜어져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은 깊은 사랑 안에서 몰아를 경험했던 것과 반대로 극도로 예민한 자의식을 불러일으킵니다. 인식되는 것은 ‘나’밖에 없습니다. 고통당하고 있는 나라는 실존이 온 세상을 집어삼킵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합니다. ‘대체 난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가?’ 그제서야 깨닫습니다. ‘나를 버티게 해준 것, 내가 그렇게도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 내가 사랑하던 하지만 이젠 상실된 그것 또는 그 사람이구나…’ 라고 말이죠.

최대의 상실,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고, 되돌릴 수 없으며, 책임질 수도 없고, 되갚을 수도 없고, 대체될 수 없는… 물질적으로 금전적으로 환산하는 것이 오히려 모욕이 되는 (왜냐하면 그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상응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비인간적이기에) 고통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사랑하는 존재의 소.멸.인 것이죠. 향방을 잃은 우리의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게 됩니다. 어쩌면 죽은 사람의 혼령이 이 세상을 떠돈다고 믿는 통속적 믿음은, 향방 잃은 우리의 사랑이 만들어 낸 실재하는 환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유가족들과 함께 아파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유가족들이 겪은 상실은 이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닫게 했을 것입니다. 한 번에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의식이 유가족 전체를 뒤덮었을 것입니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말입니다. 세월호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이 자신들의 인생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슬픔이 깊어질수록 더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약간의 반전이 있습니다. 제가 슬픔이 우리의 실존을 드러낸다고 한 것은 사실 세월호 참사가 유가족 외의 ‘우리’에게 한 일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곧 대한민국의 실존을 까발렸습니다. 세월호가 가져온 슬픔이라는 망치에 의해 우리의 강철같이 단단했던 껍질이 깨지고 내면이 만천하에 드러나버렸습니다. 그 안은… 판도라의 상자였습니다. 우리는 유족들과 같이, 세월호와 같은 대형참사가 발생하면 인간과 인간의 생명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드러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발견한 건 ‘괴물’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했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부품으로 여기며 인생을 숫자로 가늠하던 안으로 밖으로 가득한 염증이 이제사 곪아터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한 것은 전체 보다는 나였고, 우리가 사랑한 것은 고귀하고 영원한 무형적 가치보다는 손에 쥘 수 있는 유형적 가치였으며, 우리가 사랑한 것은 성실과 정직 보다는 결과와 현상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 것은 정의보다는 순간의 부끄러움을 피하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우리가 사랑한 것은 생명이 아니라 ‘내 인생’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인류’ 또는 ‘인간’이라는 보편적 가치는 ‘나’라는 개별적 가치에 잠식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라는 건 추상적 개념입니다. ‘나’를 ‘우리’에서 제외시키는 건 너무 쉬운 일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까발린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을 달아오르는 낯을 들고 흐르는 눈물과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을 꽉 움켜쥐고 눈이 시리도록 직시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진지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서 ‘나’를 살짝 제외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세월호 사건이 ‘나의 아픔’인 이들은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유족들은, 관련이 있는 분들은 도망칠 곳이 없이 쓰나미처럼 쏟아지는 고통을 존재 전체로 받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라면… 고통하는 것이 ‘우리’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도망칠 곳은, 만들면 그만입니다. ‘우리’에서 빠져나와 그들을 옆에서 바라보며 ‘너희’라고 부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게, ‘이제 그만 잊자’라고 말하는 이들의 마음이 아닐런지요. 갈라진 틈새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우리’의 진면모를 도저히 대면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 잊자고 말하는 그대에게 고합니다.
그대여. 잊자고 말하는데, 한 번이라도 기억해본 적이 있나요?
그대여, 이제 그만 앞으로 나아가야한다고 말하는데, 한 번이라도 머물러 본 적이 있나요?
그대여, 이제 그만 아파할 때라고 말하는데 한 번이라도 고통의 갈라짐 속에서 존재가 찢어지는 것을 경험해보았나요?

우리. 우리의 고통을 허비하지 맙시다.
이 고통, 기억합시다. 의지적으로 기억합시다. 고통 자체가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며, 단순한 감상에 젖어 사는 것이 고인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월호가 우리의 어떠함을 까발렸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 잠깐 머물러 있읍시다. 지나치게 빨리 지나가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삶’이라는 존재의 총체를 살아가는 이들이지 가늘고 얇은 외줄을 타고 얼른 목적지에 도달해야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고통에 머무를 때 성장할 것입니다. 이 고통이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 조금 더 아파합시다. 지금의 아픔은 너무 두루뭉술합니다. 그냥 전체가 아픕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살펴보기 시작하면, 아픈지 몰랐던 곳까지 곪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드러난 것만해도 우리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하지 않습니까? 내버려두면 절대 안 될 것 같다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 않습니까? 보이는 것을 못본척하지 맙시다. 고통의 갈라짐을 허비하지 맙시다. 육신의 상처와 달리 정신적 상처는 잊으면 될 것 같죠.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수많은 죽음을 댓가로 깨어진, 괜찮아보였던 우리 실존의 껍데기는 내버려두면 다시 닫혀버릴 겁니다. 다시 깨뜨리려면 더 엄청난 고통으로만 깨어질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충분히 아파야 나중에 안 아픕니다.

 

그러니 제발, 시행령으로 보상금으로 상처를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그냥 잊으면 문제가 덮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이건 덮을 수 없는 문제이고 상처입니다. 진실을 밝히고 유족을 위로하며 사회적으로 이 사안에 대한 진지함을 보이는 것은 보상적 관점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죽은 이들은 돌아올 수 없고 유족들과 관련된 이들이 겪은 상처는 결코 보상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법적 보상이 합당하게 이루어진다하더라도 그렇게 세월호 참사를 매듭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세월호 참사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기억하고 관심을 가지며 작은 움직임이라도 하려고 꿈틀대는 것은 고통을 통해 알게 된 우리의 진짜 모습을 직시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당신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진보, 성장’의 참된 모습입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한 건 당신들 아니었습니까!? “열심히 하면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한 것 당신들 아니었냔 말입니다! ‘힐링’을 문화 코드라고 말한 건 당신들 아니었습니까!? 우리에게 위로와 치유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 공의와 법치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도 당신들 아니었습니까!? 자. ‘우리’가 아픕니다. ‘우리’가 아프단 말입니다. ‘너희’가 아니라,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그러니 이제

그만 잊자는 말,

그만합시다..

 

 

 

덧.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이 단원고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그린 삽화들과 유족들이 보낸 편지를 한겨레에서 만든 사이트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제가 아이들 그림을 다 내려받아서 크게 이어붙혔는데 파일 크기 때문인지 첨부가 잘 안 되네요. 해결되면 업데이트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린 항상 소외된 이들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변을 당한 이들은 단지 단원고 학생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기사에서 짧지만 다른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기억하게 해줍니다. 이런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도, 세월호를 통해 드러난 우리의 모습 아닐까요…

마치 제 가슴에 있는 이야기를 대변해준 것 같은 기고문을 소개합니다. 김훈 소설가의 특별기고문입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재즈 싱어 말로가 자신의 6집 앨범 겨울 그리고 봄 에서 세월호 추모곡을 수록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나를 잊지 말아요 다시 사월이 올 거예요
나를 잊지 말아요 다시 사월이 올 거예요
남쪽바다 멀리 따뜻한 바람이 불어올 때
노래하며 올게요 나 철부지 종달새 되어
거리마다 가득 눈부신 초록이 번져갈 때
손 흔들며 올게요 나 싱그런 이파리 되어
 
푸른 하늘 종달새 지저귀면 날 맞아주세요
푸른 거리 새 잎이 춤을 추면 날 맞아주세요
그 날엔 아무 말없이 날 위해 웃어주세요
그 웃음 속에 그대가 살고 내가 살지요
 
햇살 가득 사월이 올 때까지 그대 울지 말아요
계절이 돌고 돌듯 슬픔이 웃음으로 돌고 돌아
영원히 만날 거예요 우린 따뜻한 이별 안에서

 


 

후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제게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알기 전과 후가 결코 같을 수 없죠. 기억하는 행위는 무언가를 알기 전과 후에 겪었던 변화를 시간 속에서 길어올려 현재로 데려오는 것 같습니다. 1년 전 세월호 참사를 1년이 지난 후 기억하는 것은, 1년 전 처음 세월호 참사를 알았을 때와 다릅니다. 깊은 시간의 우물에서 기억을 길어올리면 지난 1년 만큼의 역사가 함께 달려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하아… 그 기억을 길어올렸는데, 더 슬픈 것은 어쩐 일일까요. 더 희미해져야 정상인데 더 선명해지는 건 어쩐 일일까요.

글을 쓰면서 여러가지를 다양한 각도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적 근거들과 신앙적 태도들에 대해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사건을 다루시는지, 기독교의 고전적 고민거리인 악의 문제에 대해 다룰 수도 있었습니다. 전 그리스도인만이 가져야하고 가질 수 있는 태도가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인간입니다.’라는 전제만으로 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는 하나님, 믿음 등 (소위) 기독교적 표현은 등장하지 않으며 성경 말씀도 일체 등장하지 않습니다.

Over de auteur

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Comments 4

  1. 언제까지 기억해야 하나요? 죽을 때까지 기억해야 하나요? 삼풍백화점은요? 성수대교는요? 911은요? 시리아 난민은요? 아프리카에서 지금도 굶어죽는 아이들은요? 6.25.사변은요? 인천에서 살해당한 8세 아이는요? 버스에서 질식사한 유치원 아이들은요? 언제까지 기억하죠? 누구는 기억해야하고 누구는 말아야 하나요? 얼마나 큰 사건만 기억해야 하나요? 자연재해로 돌아가신 분들도 기억해야 하나요? 아니면 인재라고 여겨지는 사고만 기억해야 하나요? 외국인은요? 내 바운더리는 어디까지인가요? 그들을 언제까지 기억해야 하나요? 리본은 언제 뗄 수 있나요? 세월호만 특별한 이유가 뭔가요? 진심 궁금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도 그리스도인이고, 저도 목회자고, 저도 두 아이를 키우는 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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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방문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주신 질문은 진심으로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해야할 문제라고 여겨지고요.

      다만 제 개인적으로 세월호는 세월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정부의 무능함이나 관료제의 유연성 없음 등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고, 각 부처의 떠넘기기나 숨기기 급급한 모습들을 보면서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체면만 생각하는구나, 좀 바뀌어야겠다라고 생각해볼 수 있었겠고요. 단지 사고로 본다면 위기 상황 대처 능력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반성해 볼 수 있는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계속 기억하자, 잊지 말자라고 (다른 분들은 모르지만 제가) 강조했던 이유는 문제를 덮어두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이들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기억함으로서 그 사건이 드러낸 우리의 적나라한 민낯을 기억하자는 것이죠.

      말씀하신 다른 문제들도 동일한 관심이 필요하며 인간 생명 외의 문제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온 지구와 우주를 위임받은 것이니까요. 다만 세월호 사건을 1주년이 지난 시점에 언급했던 것은 2010년대에 한 획을 그은 사회적 사건에 대한 민감함을 유지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세월호를 기억함으로서 오히려 Aaron님이 언급하신 다른 모든 일들을 기억할 수 있는 통로가 되지 배제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 의도기도 하고요. 혹시 제 글이 반대로 (세월호’만’ 기억하자) 읽혔다면 전적으로 제가 글을 잘 못 쓴 탓입니다.

  2. 무례한 댓글 남겨서 죄송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이 블로그를 들리게 되었는데 글을 읽다보니 의문이 생겨서 다짜고짜 따지듯이 글을 썼습니다. 인사를 먼저 드리는 글로 수정하려고 했는데 수정이나 삭제 방법을 모르겠네요. 용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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