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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선악과에 대한 이야기는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라해도 대부분 들어봤을 내용입니다. 그리고 단골 손님 격으로 질문받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대체 왜 선악과를 만드신거야?”라고 말이죠. 하나님께서 선악과만 안 만드셨어도, 사람들이 타락할 일은 없었지 않았겠느냐라는 질문인거죠.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전형적인 답 중의 하나는 “하나님은 사람을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의지를 주셨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대답은 아니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논의를 넓히다보면 아담의 역사성 문제와 연관해서 이 나무가 실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까지 나아가게 되겠지만, 거기까지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여기서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건으로서 이 주제를 다뤄보겠습니다(그리고 당연히 실재했다고 믿구요).

 

다양한 해석들

선악과라고 많이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עץ הדעת טוב ורע)의 열매」입니다. 이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또는 “선악의 지식의 나무”라고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나무가 대체 뭐냐?라는 것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이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성적인 자각을 하게 되어서 비로소 생식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1 그러면 이전에는 성적인 능력이 없었다는 것인데, 이런 주장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는 것이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과 모순되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금지하시기보다는 오히려 이 능력을 주신 분이십니다.2 또 다른 주장으로는, 신들이 인간을 시기해서 선악을 아는 지식과 더 나아가 문명을 그들에게 금지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3 그리고 이 선악의 지식이 인간의 번영에 관하여 독립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으로, 이것을 금지하는 것은 책임감을 갖는 성숙함에 이르지 말고 천진난만한 상태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4 이런 견해들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복을 받는 존재로 그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에, 죄인을 사랑하시어 자기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신 하나님과는 모순되는 설명입니다.

 

악마의 열매?

위에서 소개한 견해들과 더불어 오해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이 열매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에 관해 언급하지 않으며, 열매 자체보다는 열매를 먹는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보스는 “나무 자체가 마술적으로 선악의 지식을 전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유혹자/사탄이 말하는 것임을 지적합니다.5 클라인도 열매를 먹으면 새로운 능력을 얻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데 동의합니다.6 만화 원피스에서 나오는 악마의 열매처럼 먹으면 신비한 능력들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닌거죠. 물론 있으면 먹고 싶지만….

 

유혹: 하나님과 같은 지혜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었을까요?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처럼 선악을 아는 것”, 그리고 “지혜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둘은 결국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냥 선악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선악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에도 사람은 선과 악에 대한 개념과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7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이 갖고 있고 가질 수 있는 선악에 대한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수준에 이르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악을 아는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

선악을 아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선악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 자신 안에 가지신 것입니다. 하나님 외부에 어떤 선악의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 자체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따르는 것이 선하고 그에 거스르는 것이 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된 진리이시며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물론 어떤 면에서는 선악을 구분하는 지식을 본성 내에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면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선악에 대한 지식과 그 기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아는 존재입니다. 즉 인간은 선악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한에서, 그 지식에 의존하여 인간은 선악을 압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이런 측면에서 이 나무는 말 그대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입니다.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비로소 아는 것이 아니라, 동산 중앙에 서있는 그 자체로 이 나무는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해줍니다. 열매가 아니라 그 나무 자체가 선악의 지식을 이미 전달해주고 있던 것으로 여기는 것이 적절해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즉 이 열매를 먹지 않는 것이 선이며, 불순종하는 것 즉 이 열매를 먹는 것이 악이다.”라는 지식을 사람에게 알려주고 있던 것이죠. 지식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주는 나무이며, 단지 그 지식을 얻는 것에 있어 제한과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이 나무가 지식을 주는 역할에 비추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졌는데, 이런 표현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임과 동시에 “대리통치자”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격차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닮도록,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림을 행하도록 지어진 것이지 하나님처럼 되어 하나님과 동등되도록 지음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살아가는 선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나무는 쓸데없는, 악의 근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 필요한 선한 도구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이 나무를 만드셨다는 것을 가지고 비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죠.

 

율법과 계시

좀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이 나무는 그 자체로 율법이자 외적인 형태로 주어진 최초의 계시입니다. 조금 더 엄밀히 구분하면 그 율법의 계시를 가리키는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받은 언약을 행위언약이라고 합니다. 그 언약의 단 하나의 율법의 상징으로서, 이 나무는 생명의 축복과 사망의 저주를 언약 당사자 앞에 제시합니다. 마치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의 말씀들을 놓고서 이것을 따르고 안따름에 대한 축복과 저주에 관해 말한 것과도 같습니다. 최초의 유일한 율법이자 계시의 말씀으로서 동산에 외적으로 세워진-어떤 면에서는 기록된- 것이 이 나무라고 볼수 있습니다.

최초의 사람은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한 가지 율법만 지키면 되었으며 얼마든지 지킬 힘이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율법이 사람에게 주어졌고, 지금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들이 우리 사회에 세워져야 했습니다. 최초의 율법이 파기되자 수없이 많은 법들이 세워져야 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이 나무가 선악의 지식의 정점에 서서 기준의 역할을 해주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사람은 선과 악을 구분할 능력이 선험적으로 있었으나, 그를 통해 세워지는 지식은 이 나무를 통해 얻어지고 또한 조율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선악의 지식을 주는 동시에 그 정점에서 기준 역할을 하는 이 최초의 율법을 거부하고 열매를 먹음으로써 선악의 지식의 기준을 잡는 중심은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의 율법이 아닌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삼은 사람들에게는 수없이 많은 법들을 세워도 그것이 잘 유지되기 힘들어졌습니다.

 

여호와 경외 – 지혜의 나무

이 나무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여호와 경외”와 연결됩니다. 이 나무는 지식의 나무이며 지혜의 나무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순종했을 때 아담과 하와에게는 생명 나무가 허락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가르치는, 참된 지혜를 알려주는 이 나무는 그 지혜를 올바로 따를 때 자신의 열매가 아닌 생명 나무의 열매로 사람을 인도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잠언은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잠 3:18)라고 가르칩니다. 여호와 경외라는 참된 지혜를 얻는 자는 생명 나무가 주어집니다. 더 나아가 복된 자들이라고 불릴 것을 말합니다. 이 나무가 말하는 율법, 이 나무가 알려주는 지혜를 붙드는 자야말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나무가 가리키는 지혜를 따르지 않고, 뱀에게 속아서 거짓된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지혜는 나무가 원래 가리켰던 바 “여호와 경외”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김희석 교수님은 잠언에 대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

“음녀가 거짓으로 따라할 수 없는 지혜의 고유한 특징은 지혜가 가진 여호와의 특별한 관계성, 그리고 피조물과의 보편적인 관계성이다. 그리고 그 행심에는 ’여호와를 경외함’이라는 기준이 존재한다. … 그러므로 지혜를 구하려 한다면 지혜를 구하려는 의도를 내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을 찾으려 해야 한다.”

그러므로 참 지혜를 가르쳐주는 나무를 악용한 것이 문제지 나무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 나무가 가르치는 선악의 지식을 잘 따랐을 때, 사람은 생명을 얻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나무와 열매

이 나무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도록 이끌어주고 참된 지혜인 여호와 경외를 가르쳐서 생명 나무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이 나무가 동산 중앙에 세워지고 무척 아름다웠어야 했던 이유를 잘 설명해줍니다. 이 나무는 동산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했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도록 도왔습니다. 이 나무는 불평의 대상이 아니라, 찬양으로 이끄는 도구였습니다. 이 나무를 보면서 사람은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존재로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순종과 찬양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무가 혐오스럽고 흉하게 생기면 문제가 있겠죠. 이 나무와 그 열매가 아름답고 탐스러운 것은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지 하나님이 죄를 짓도록 유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과 선을 악하게 사용한 것이 문제인 것이죠.

 

타락: 하나님처럼

그렇다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어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사람이 마치 하나님처럼 자신의 본성을 따라서 선악을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뱀이 유혹한대로 사람은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선악의 지식을 받아야 하는 의존적인 존재인 사람이 스스로의 기준을 따라 선악을 말하는 자율 속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였습니다. 죄를 짓고 눈이 밝아져서 본 것은 기껏해야 죄성과 죄책으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보일 수 없는 ’벌거벗은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자율 속으로 들어서서 얻은 것은 도덕적 혼란이며, 죽음의 형벌이었습니다.

 

적용점: 참된 신학과 신앙의 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인간이 지식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와 율법에 의존하고, 그것이 우리의 지식의 기초이자 중심이자 정점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주신 선악의 지식은 그 자체로 충분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좀 더 오묘하고 신비한 것을 추구하려는 그릇된 욕망은 사람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역만 탐구하더라도 그것을 다 이해하는데에는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과학이 이만큼 발전했음에도 아직 모르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제한하신 영역을 넘어서서 계시의 말씀 위에 서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헛된 욕망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겪은 것과 비슷한 유혹을 항상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생명의 길을 버리고, 세상이 보여주는 길이 나에게 행복과 기쁨을 약속한다고 여기고 그것을 따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아름다운 선악과를 먹어버렸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사용하지 않고 악용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요. 그것이 우리를 늘 비참함과 공허함으로 이끌고 가지만, 우리는 항상 속고 후회합니다.

신학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를 넘어서는 지혜를 얻으려는 유혹에 주의해야 합니다. 더 큰 지혜를 얻으려는 욕망과 계시에 대한 왜곡된 해석이 인간을 비참함으로 끌고 갔다는 것에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내리고 그 위에 다른 것을 올려놓으려는 모든 시도는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과오를 반복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이에 관하여 왈트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이 글을 마무리하는데 적절한 거 같습니다. 9

“… 인간은 반드시 선과 악을 참으로 아시는 유일한 분으로부터 주어진 계시에 의존해야 하지만(잠 30:1–6), 인간이 받는 유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이 특권을 붙잡는 것이다.”

 

각주

1: K. A. Mathews, Genesis 1–11:26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204.

2: Mathews, Genesis 1–11:26, 204.

3: Geerhardus Vos, 『성경신학』 (서울:CLC, 2000), 50–51.

4: N. M. Sarna, Genesis (Philadelphia: Jewish Publication Society; 1989), 19.

5: Geerhardus Vos, 『성경신학』, 54.

6: Meredith G. Kline, 『하나님 나라의 서막』 (서울: CLC, 2012), 152.

7: Mathews, Genesis 1–11:26, 204.

8: 김희석, “잠언 1–9장의 해석학적 기능과 신학적 함의” 「Canon&Culture」 제5권 제1호, 2011.4, 226.

9: Bruce K. Waltke and Cathi J. Fredricks, Genesis: A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67–96.

Over de auteur

재국

디자이너를 꿈꾸던 공대생 출신 신학도.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교회사를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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