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은 사랑을 증진시킨다

“양자택일이 아니다. 둘 모두다.”

수많은 상보적 개념들이 결코 연합될 수 없는 것처럼 회자됩니다. 정치적 개념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자유와 평등의 대립일 것입니다. 이 둘의 양적 균형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유와 평등이 서로 연합될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관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섞일 수 없으니 양적 균형이라도 맞추자는 것이죠. 교회를 돌아보면, 교회 역시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행위와 믿음, 나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 기쁨과 헌신, 개인과 공동체, 보편교회와 지역교회, 상징적 관계와 신비적 연합… 수많은 개념들이 도대체 섞일 수 없는 것처럼 둥둥 떠다니다 한 쪽으로 휙- 쏠려버리기 일쑤죠. 하지만 우리는 과감하게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이런 개념들을 결코 섞일 수 없는 개념으로 말씀하시는가?라고 말이죠. 어찌되었든 이렇게 본의 아니게 시소 놀이를 하게 된 개념들 중 단연 최고는 진리와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사랑을 조금 접어두더라도 칼을 대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랑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랑을 위해 진리를 조금 접어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죠. 이 짧은 글에서는 진리와 사랑을 다루는 대신, 진리와 사랑이 다소 개인적인 옷을 입게 되었을 때 불리는 표현인 지성과 사랑에 대해 말해보려 합니다. 진리와 사랑만큼이나 지성과 사랑은 어울리지 않는 한 쌍 같습니다. 하지만 존 파이퍼는 자신의 책 <생각하라> 에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양자택일이 아니다. 둘 모두다.(존 파이퍼의 생각하라, IVP, 2011. 33.)” 그러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생각에 대해 어떻게 보았는지를 짤막하게 인용합니다.

삼위일체에 뿌리를 둔 지성과 사랑의 관계

에드워즈에게 있어 지성과 사랑을 연결하는 실마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흘러보내고 반영하는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로 반영하는 것이 피조물의 창조 목적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로 반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가치있게 여기고 즐거워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아도 기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영광받으실 수 없을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것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알아도 기뻐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로 가치있게 여긴다는 사실이 진실될 수 있겠습니까?

아 그런데 잠깐. 생각의 흐름에 잠깐 브레이크를 밟아봅시다. 논의가 여기까지 흘러오기 전에 에드워즈의 머릿속에는 더 깊은 전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제 인용할 두 부분이 보여주는 바입니다.

나는 성경이 말하는 복된 삼위일체가 이러하다고 생각한다. 성부는 첫째이고, 시작이 없으며, 가장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신성, 곧 스스로 존재하는 신성이다. 성자는 성부가 생각함을 통해, 혹은 자신에 대해 관념을 가지고 그 안에 머무름으로써, 낳은 하나님이다. 성령은 행위로 존재하는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기쁨에서 흘러나오고 분출되는 신적 본질이다. 나는 온전한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사랑 양쪽 모두에 진정으로 뚜렷하게 존재하며, 그래서 삼위는 서로 구별된다고 믿는다.
존 파이퍼의 생각하라, 38에서 재인용.

 

에드워즈는 삼위 하나님의 내적 관계를 단지 신비로운 베일로 덮어두고자 하지 않았고 가능한 한 설명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 부분을 통해 삼위간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된다고 보는지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이죠. 쉽게 결론만 말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본질의 놀라운 하나이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각으로, 성령 하나님을 통해 사랑으로 드러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사랑이 없고 생각만 있으시며, 성령님은 역시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따뜻하시고 지성은 별로 없으시냐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에드워즈는 조심스럽게 끝까지 ‘온전한 하나님의 본질’을 붙든 채로 위격 간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지성과 사랑은 구별된 개념이지만 놀랍게 공존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사족이지만, 이런 게 신비 아닐까요? 신비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드러난 모습을 보았음에도 들었음에도 알 수 없어 경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자신 속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신다. (1)자신의 완전한 생각에게서 … 다시 말해, 자기 영광의 광채이신 아들에게서 자신을 나타내심으로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신다. (2)자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심으로써 무한한 기쁨이 자신을 향해, 다시 말해, 자신의 성령에게서 흘러나오게 하심으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신다.

… 그러므로 하나님은 피조물을 향해서도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신다. (1)피조물의 이해에 … 자신을 드러내심으로써 자신을 영화롭게 하신다. (2)피조물의 마음에 자신을 알리실 때, 피조물이 그분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누릴 때(이러한 기쁨과 즐거움과 누림은 하나님의 자기현현이다) …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만이 아니라 그 영광을 기뻐할 때 하나님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들이 그 영광을 기뻐할 때, 하나님은 그들이 그 영광을 보기만 할 때보다 더 큰 영광을 받으신다. 따라서 온 영혼이, 이해와 마음 양쪽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신 목적은 자신의 영광을 전하기 위해서이며, 피조물이 그분의 영광을 지성과 감성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생각을 증거하는 자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만, 그 생각을 증거하고 또한 그것을 기뻐하는 사람만은 못하다.존 파이퍼의 생각하라, 39–40에서 재인용.

 

에드워즈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비를 묵상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런 삼위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당신의 영광을 반영시키셨음을 기억해내어 거기에 적용시키기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지성과 완전한 사랑으로 온전히 피조물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이죠. 앞에서 설명했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모든 것보다 더 귀하게 여기도록,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지성과 기쁨을 온전히 활용하게 되고, 할 수밖에 없으며,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말대로 생각만하는 자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생각을 기뻐하는 사람만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은 사랑을 증진시킨다

길게 살펴 본 에드워즈의 이해를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성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렇게 안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지성과 사랑은 결코 둘이 아닙니다. 지성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에드워즈의 이해에 따르면 성자와 성령이 하나이신 것처럼 지성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둘은 분명하고도 뚜렷하게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지성은 사랑에 이바지하고, 사랑은 지성에 이바지합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든, 그것이 내 눈에 콩깍지를 씌운 킹카든, 퇴근 길마다 내 눈을 빼앗는 쇼윈도의 마네킹이 걸친 가디건이든, 채널을 돌릴 때마다 침샘을 자극하는 백주부의 레시피든,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과 지성(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영화롭게 해야 할 하나님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으며,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논의를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에 뿌리를 박은 에드워즈는 사실 힘있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성과 사랑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이죠.

데이비드 웰즈의 실종 4부작, 마크 놀의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오스 기니스의 Fit Bodies and Fat Minds 등, 많은 기독교 지성들이 사라져버린, 또는 불균형 성장이 되어버린 기독교 지성에 경종을 울렸고 지금도 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어떤 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과연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을 그렇게 아카데믹하게 알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막는 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에드워즈가 삼위일체에 대해 이렇게 깊이 생각하였던 것처럼, 그리고 세상과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올바르고 철저하고 온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알아갈 것이냐?라고 질문해야 할 때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생각’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Over de auteur

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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