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인류사 속에서 ‘사랑’만큼 많은 관심을 받은 주제도 찾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커다란 관심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명확하게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명사 Love를 강한 애정을 갖는 대상을 조국, 가족, 이성, 소유하는 기쁨, 애착하는 사람 혹은 물건 등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비교적 폭 넓게 이해라고 할 수 있겠죠. 반면 발달심리학에서는 “애정은 비교적 온화한 강도를 가진 즐거운 정서 상태로 특정한 사람, 동물 또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부드러운 애착이며 사랑은 강한 정서 상태로 보통 이성에게 향한 것이며 성적 욕망을 갖는다.”라고 정의해 보다 좁은 의미로 사랑을 정의합니다.[1] 이렇듯 ‘사랑’이라는 개념이 파편화 되었고 분야에 따라 추상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사랑’에 관한 절대적인 이해를 제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사랑 이해’의 차선책_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
만일 사랑 자체를 정의하는 것이 어렵다면 방향을 조금 우회하여 살펴보죠.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객체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아우르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사랑’을 이해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하는 주체를 우리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살펴볼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로 함축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
이 논의를 보다 흥미롭게 끌고 가기 위해 조금 러프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거나 혹은 그 사람이 앞에 있다고 가정해보시죠. 지금 보고 있는 그 사람은 정말 당신이 사랑하는 그 ‘존재’일까요? 그 존재가 육체라고 다시 가정해봅시다. 사람의 세포는 1초에 약 50만개가 사멸하고 생성됩니다. 이 글을 읽는 수 초간에도 수백만개의 세포가 바뀌었죠. 그 존재는 당신이 사랑하던 존재인가요, 아니면 과거의 존재인가요? 사람에게는 단편적인 과거와 현재만이 허락되었고 주어진 현재는 그마저도 쉼 없이 과거를 향해 흐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존재가 이 세상을 떠났다고 가정해봅시다. 당신은 아직도 그 존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그 존재는 어디에 있나요? 과거의 존재를 사랑한 것인가요? 과거 어느 지점의 존재를 사랑했던 것일까요? 만일 현재 실존하는 존재가 없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 사랑은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설령 현재 실존하는 존재라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고 사멸될 존재라면 우리는 그 존재를 향한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의 대상’에 대한 인문철학적 접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먼저 인문철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해 보도록 합시다. 탁월한 지성을 지녔던 수많은 사상가들이 있지만 그들의 사상을 다 다루기 어려우니, 인문철학에서 보편적 권위를 갖고 있는 플라톤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쿠켈멘쉬가[2] 자신의 반쪽을 찾는 것처럼 불완전한 자아를 변화시키는 인간적 본성이 ‘사랑 Eros’이라고 말합니다. 보통 육체적인 사랑이라고 알려진 이 사랑Eros은 단순하게 이성(異性)을 향한 ‘껄덕거림’만 말하는 건 아닙니다. 처음엔 이성의 아름다움에 끌려 따라가지만 결국에는 사랑의 이데아를 지향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사랑의 이데아를 지향하며 영원과 불멸을 원하는 마음이 출산을 통해 드러난다고 이야기합니다.[3]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이데아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이데아론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에 따르면 이데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어야 하며 항상 정말로 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해야 할 대상의 궁국적인 목표인 사랑의 이데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혹은 frui해야 할 대상)은 변하지 않는 참된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사랑의 대상’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
이러한 인문철학적인 ‘사랑’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을 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우구스티누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실 어떤 주제를 다룬다 한들 그를 배제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의 저서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4]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나는 당신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육신의 아름다움도 아닙니다. 질서 정연히 흐르는 시간의 리듬도 아닙니다. (중략) 당신은 내 영혼 속에 (물리적)공간으로는 붙들 수 없는 빛을 비추시고, 시간이 앗아갈 수 없는 음성을 들려주시며, 바람이 흩을 수 없는 향기를 뿜어주시고, 또 맛있는 음식을 주시되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게 하시고, 껴안아 주시되 아무리 안겨 있어도 싫증나지 않게 하시나이다. 바로 이런 것이 내가 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 때 사랑하는 것이니이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표현을 투박하게 바꿔보면 결국 “그가 사랑하는 대상인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영혼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사랑의 백서(白書)’라고 표현되는[5] 그의 또 다른 저서인 『삼위일체론』을 살펴봅시다. 그는 앞서 글 서두에서 필자가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사랑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그리고 그 둘을 엮는 사랑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이라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논의를 펼쳐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사랑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하기에 사랑하는 자(The Lover)이신 성부, 사랑 받으시는 분(The Beloved)이신 성자 그리고 사랑의 결속(The Bond of Love)이신 성령께서 사랑으로 하나 되신다고 말합니다. 즉, 사랑의 삼위일체(Trinitas Amoris)를 이루시는 것입니다.[6] 참되고 불변한 대상께서는 참되고 궁극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자신의 존재를 통해 드러내고 있으신 것입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독교에서도 “사랑해야 할 대상(혹은 frui해야 할 대상)은 변하지 않는 참된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는 같은 사상적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대상은 오직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궁극적 대상이자 참된 사랑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결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랑 혹은 누림Frui의 궁극적인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면 논의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것은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다루어 보도록 하죠.)
그러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사랑의 대상’을 논할 때, 인간은 하나님 외에 변하는 것은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요? 정답은 “그렇다”와 “아니다” 둘 다 포용될 수 있습니다. 변하는 대상이 사랑의 궁극적 대상이 된다면 그 사랑은 사랑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참된 사랑 자체의 반영으로서의 사랑Caritas이라면[7] 가능합니다.[8] 따라서,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다면 역설적으로 그는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P.S. 본 논의에서는 J. A. Lee나 R. Stenberg, Freud나 Andreas Capellanus와 같은 근/현대 심리철학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파편적 유형들로서의 사랑은 다루지 않았다. 근현대에 이르러 ‘사랑’에 대한 접근 자체가 인간의 심리적 요인,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에 국한되어 연구되었기 때문에 본 논의와 맞지 않다고 판단되었다. 사실 J. A. Lee나 R. Stenberg와 같은 학자들도 사상적 기원을 플라톤에 두고 있지만 플라톤이 Eros를 비롯한 사랑의 개념을 이야기 할 때 갖고 있던 철학적, 종교적 사상은 거의 배제되었다.
각주
- 김경희, 『발달심리학』(서울: 학문사, 1999.) 254쪽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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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gelmensch, 쿠겔멘쉬는 손과 발이 각각 네 개이며 머리 하나에 두 얼굴이 있는 사람으로 매우 강하고 빨라서 신들이 위협을 느껴 제우스가 둘로 나누어 놓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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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rsten Paprotny, Die Philosophischen Verfuhrer (Darmstadt: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2006); 조희진 역, 『철학의 유혹자_사랑을 말하다』(서울:말글빛냄, 2007), 32-58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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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Conf. 10.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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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하,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 나타난 사랑의 개념” 「대학과 선교」제15집 (2008. 12. 10): 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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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Trin. 8.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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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궁극적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에 대한 반응으로 Caritas의 사랑이 일어난다. 이 특별한 종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화로 생겨나는데 불변하고 영원한 존재인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모든 창조세계를 휘돌고(대상 – 변하는 존재) 다시 자신에게 회귀하는 사랑이다.” – 김남준 목사, 2012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개강수련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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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Trin. 8.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