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하는 생각

성경이 말하는 생각?

어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성경은 생각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거나, 생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보다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생각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로마서 8장에서는 쿵쾅거리는 고동소리가 들립니다. 그곳에 복음의 진수가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은 박제된 복음이 아니며 읽는 이로 하여금 무릎꿇게 하고 무릎꿇은 이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 하며 찬양하게 하며 회개하게 하는 살아 숨 쉬는 복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복음의 심장부에 쉽게 넘어가는 단어가 생각보다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생각’입니다. 5절부터 9절까지 등장하는 ‘생각’은 모두 헬라어로 프로네오phroneo에서 파생된 단어들입니다. 이 단어에서 우리는 예사롭지 않은 향기를 감지합니다.

로마서 8장에 ‘생각’이!?

 롬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5절부터 9절은 예리한 칼을 대며 두 부류의 사람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바로 육신의 일을 따르는 사람과 영의 일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문단 내내 육신의 일을 따르는 사람은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영의 일을 좇는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사도는 육신의 일을 따르는 사람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육신의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와 ‘육신의 생각’, 그리고 ‘육신에 있는 자’는 교호적으로 사용됩니다. 서로간에 등호를 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사망에 거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으며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순종하고자 한다하더라도 순종할 능력도 없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사도는 육신을 따르는 사람의 이야기만큼 영을 따르는 사람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선택지가 둘 중 하나밖에 없다면, A가 아닌 것은 자동적으로 B가 되겠죠. 회색지대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사실 사도는 육신의 일을 이야기함으로서 영의 일을 함께 이야기한 셈입니다. 육신에 거하는 자가 사망에 있는 것과 같이 영에 거하는 자는 생명과 평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설명을 사도는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니 영에 거하는 자와 영을 따르는 자, 그리고 영의 생각을 하는 자는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육신을 따르는 자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상태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생명과 평안에 거합니다. 나머지 빈칸도 채워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선택지가 둘 밖에 없다는 것을 문맥을 통해 매우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혹시나 다른 가능성이 있으면 어쩌나 걱정하지 않고 빈칸을 채워도 될 것 같습니다.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 곧 영을 따르는 사람은 육신을 따르는 사람과 달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자 할 뿐 아니라 순종할 수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살펴본 후 우리는 9절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왜 영에 있는 사람과 육에 있는 사람을 이렇게 흑과 백으로 구분했는지에 대해서는 잠시 판단을 보류하였습니다. 9절은 우리에게 그 해답을 알려줍니다. ‘사망’ 그리고 ‘생명과 평안’으로 둘을 구분했을 때부터 낌새를 알아챘습니다. 사도는 누가 육신에 있는 자이며 누가 영에 있는 자인지 말해줍니다. 영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자입니다. 육신에도 있고 영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육신에도 없고 영에도 없을 수도 없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영을 따라 행하는 자이며 영의 생각을 하는 자입니다. 그는 구원받은 자입니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M-I-N-D-S-E-T

처음에 여기서 언급된 ’생각’이 헬라어로 phroneo라는 사실을 먼저 밝힌 것은 심오한 의도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그냥 우리가 말하는 머리 속에 떠오르는 언어나 그림과 같은 생각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의미를 뜻하죠. Low&Nida 사전에 따르면 phroneo의 어근은 원래 phron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사려깊게 계획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용된 phroneo는 “사려깊은 계획을 위해 (지적) 능력을 발휘하다.특히 기저에 깔린 성향이나 마음의 상태에 강조를 둔 표현.”[1] 입니다. 또 다른 강추 사전인 Bauer도 이렇게 말합니다. “(철학적으로는 ‘관점’) 어떤 사물에 대해 생각을 고정시키는 것, 사고방식, 생각의 틀”이라고요.[2] 그리고 본문을 주석하면서 더글라스 무 선생님은 phroneo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5절의 ‘생각하다’와 6절의 ‘마음’이라는 단어들 모두 같은 어근의 헬라어에서 나온 것인데, 그 어근은 순전히 지적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게 “이성, 오성, 감정 등 영혼의 모든 기능”을 포괄하는 의지의 전체적 향방을 가리킨다.”[3]

유레카! 사도가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이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이제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생각만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 곧 사도의 표현에 따르면 영에 속한 우리가 맨날 영에 속한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법한 착한 생각만 하면서 살지 않는 건 우리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요. 사도가 이렇게 말했던 것은 생각 뒷편에 놓여 생각을 좌우하는 경향성 전체를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얼마나 큐티를 자주 하느냐, 성경을 많이 아느냐, 기도를 열심히 하느냐, 기도 응답을 많이 받았느냐의 차이가 아닙니다. 얼마나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았느냐의 차이도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받았느냐 구원받지 않았느냐의 차이이며, 그 차이는 곧 마음의 구조, 생각의 경향, 사물 세계 전체를 판단하는 전제에 있습니다. 영을 따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심으로 마음 전체의 구조가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이성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지키며 판단할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전제도 없이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지구 상에 존재했고 존재하며 앞으로도 수없이 태어나 존재해나갈 모든 사람들은 마음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는 구조, 경향성, 방향성이 있습니다. 모두 다르겠죠. ‘구조’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마치 명확하게 시각화된 구조로 구현해낼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그 구조가 엄청 복잡한 건 당연하고요. 하지만 본문에 따르면 그 수많은 구조를 딱 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영에 속했는지, 육에 속했는지 입니다. 영에 속한 마음은 영에 속한 방향, 경향을 가집니다. 그래서 사도는 7절과 같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육에 속한 자, 곧 구원받지 않은 자, 예수의 영이 거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려는 마음(의지)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려고 하더라도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경향을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자는 반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아름답게, 귀하게, 가치있게 여기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엥. 왠 비약? 비약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잘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그리고 21절 바로 위 문맥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실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덤입니다.

하여간 우리는 본문이 말하는 phroneo는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고 체계화해나가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경향성, 방향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그러니까…

  1. 그러니, 지성에도 방향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지성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의 지성입니다. 사랑이란 방향성을, 그것도 매우 명확한 방향성을 지닌 것이죠. ‘호불호’란 말이 괜히 있겠습니까. ‘호!’하면 달리는 겁니다. 그 사랑하는 사람/것을 향해서. ‘불호!’하면 거부하고 밀어내는 것이죠, 반대편으로요. 이런 방향은 우리의 사고 기제에서 전제로 작용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성경은 우리에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중립을 지키는 이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성’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게 편협하고 편파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각이 더 세상과 사람을 잘 이해하게 도와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니까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요3:16)’으니까요.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불어넣으셔서 ‘영을 따르는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2. 본문의 phroneo가 경향성을 의미한다고 해서 방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앞서 별 언급도 없이 ‘마음의 구조’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경향성을 지닌 우리의 내면 세계는 화살처럼 얇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고 판단해낼 수 있는 거대한 가치 체계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걸리버 여행기의 하늘 도시처럼 거대한 체계로서 특정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체계 자체를 구성하는 것도 특정한 경향성으로 이루어져있겠죠. 하여간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영에 속한 생각은, 그냥 영에 속한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을, 유형과 무형의 모든 사물을 판단하는 거대한 가치 체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실 때, 우리가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우리의 영혼을 향하여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거대한 가치 체계를 물려받은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은 우리에게 참 생명과 평안을 주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며 순종하고자 하고 순종할 수 있는 체계를 이식시켜줍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 생각과 삶이 따로 놀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3. 그리고 또 하나 무쟈게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래서 하여간 영의 생각이 무지 좋은 것 같으니까 영의 생각을 하긴 해야겠는데, 어떻게 하는 걸까요? 이게 또 반전입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이니 우리가 그리 생각하면 되는 것일까요? 영의 생각을 하는 자와 구원받은 자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싶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싶으면 순종하면 되고, 영의 생각을 하고 싶으면 영의 생각을 하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7절과 9절 말씀이 발목을 붙잡습니다. 이게 가능한 사람은 이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 의지가 무지 쎈 사람도 아니고, 무지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반전이죠. 영의 생각을 해야하는데 영의 생각을 우리가 하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영의 생각을 하려면 예수님께로 가야합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그냥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 가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해도 우리는 예수님께로 가야합니다.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십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합시다

그래서 결론은 이렇게 납니다. ‘아 그래 결국 맨날 그리스도냐!?’ 라고 하신다면, ‘죄송해요. 근데 맨날 그리스도에요.’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올바른 생각을 하실 수 있도록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완전히 새로운 가치 체계, 사고 체계를 심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빛이 되셔서 ‘빛이 있으라!’라고 해주셔야(고후4:6), 그분이 말씀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셔야(요1:14), 그분이 선생되셔서 잘 가르쳐주셔야(마13:54) 우리가 제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킵시다. 그건 우리 이성을 마비시키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지성을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죠.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간곡히 부탁합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합시다.’ 그분이 우리 생각의 디딤돌이십니다.

 


  1. Johannes P. Louw and Eugene Albert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6), 324.  ↩

  2. William Arndt, Frederick W. Danker, and Walter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1066. ↩

  3. 더글러스 무. NICNT 로마서, (서울: 솔로몬), 2011. 667.  ↩

Over de auteur

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박사 과정 중 부르심을 받고 현재 시카고 베들레헴 교회 담임 목사로도 섬기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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