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교회를 개척하고 사역을 한지 이제 1년이 갓 넘은 목회자입니다. 사실 교회 개척에 대하여 많은 염려와 불안이 많은 요즘입니다(그러나 교회의 역사상 언제는 세상이 교회가 이 땅 위에 세워지는 일을 반겨한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저 역시도 많은 불안과 염려가 있었고, 교회 개척은 저와는 먼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저의 예상과 전혀 달랐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그리고 늘 부교역자로 생활하다 단독으로 목회를 감당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래도 물질적인 문제가 큽니다. 새롭게 살림을 시작하는 것과 같기에 ‘비용’이라는 것이 발생하고 그러한 것들을 하나씩 채워가는 일이 쉽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있어서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 가장 답이 절실한 문제는 “어떻게 교회를 이루어가느냐?”였습니다. 교회란 그저 사람의 모임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두신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 주님께서 이 땅 위에 다시 오실 때까지 주의 말씀이 선포되며 복음의 사역이 이루어지는 성도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제일 어려웠습니다. 그러한 고민의 답은 신학교에서 배웠고, 부교역자로 사역하면서 늘 들어왔던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이라는 모토였습니다. 제가 졸업한 신학교과 사역했던 교회들마다 내세웠던 것이며, 고 박윤선 목사님께서 한국 교회와 저희 교단, 신학교에 남겨주신 귀한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모토는 정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큰 문제가 또 찾아 왔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어떻게 이룰 것이냐는 문제가 제 앞에 닥쳐 왔습니다. 먼저는 오해가 있었습니다. ‘바른’이라는 말이 지금의 우리의 상태를 설명하는 말로 착각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분들의 못마땅한 시선이 참 차가웠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혹시나 그런 오해가 있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현재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지향점일 뿐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실천’의 요구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를 실천해 갈 것인가? ‘바르지 못한 지금의 모습’에서 ‘바른 신학과 교회와 생활’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향하여 갈 것인가. 이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민과 기도가 이어졌고, 그 때의 답은 ‘신학교에서 배운대로 하자.’였습니다. 개혁신학을 배웠고, 이 땅 위에 개혁교회를 이루는 일이 우리에게 가장 실천적인 문제이고 그것이 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학교에서 그리고 이전에 사역한 교회들에서도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의 연약함이 드러났습니다. 배우긴 배웠는데 그것을 이루어가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신학교에서 교수님들에게 배운 그 귀한 내용들을, 그리고 부교역자로 사역하면서 이전의 교회에서 배운 교회의 모습들을 지금 이 현장에서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 그리고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저의 모습들을 보며 실망도 하고, 또 간절히 기도도 하며 1년을 보내 온 것 같습니다.
그러한 고민과 기도 속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어떤 고리들을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그 귀한 신앙의 내용들이 왜 많은 교회들 안에서는 잊혀지고 있는 것인가? 왜 모두들 개혁주의 신학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그 내용들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부정하기 까지 하는 것인가? 왜 개혁신학의 교훈들과 교회의 현실 사이에 연결점이 없는 것인가?” 거기까지 고민이 이어졌습니다.
그 연결고리가 없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를 교회 안에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습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신앙의 개념들이 흐릿해지고 왜곡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치 사사기나 선지서들에서 보는 것과 같이 나름대로 해석하고, 나름대로 정리해서 나름대로의 신앙 개념들을 사용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믿음’을 말하지만 성경과는 상관 없는 ‘믿음’, ‘복음’을 말하지만 성경과는 전혀 상관 없는 만들어진 ‘복음’들이 가득한 현실에 우리는 처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죄’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는 설교의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죄’라는 단어조차 설교에서 사용하기를 꺼려하는 시대인 듯 합니다. 죄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고 흐려지니 당연히 ‘회개’에 대한 이해도 바르지 못합니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에 대한 반성으로 그치는 순간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회개는 죄와 죄 사함, 구원과 영생의 모든 은혜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고리입니다. 인간의 비참함을 깨닫고, 그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로 우리의 영혼이 향하게 하는, 우리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은혜의 일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모르는 자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며 구원에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회개’를 가르치는 일이 가장 급했습니다. 그것보다 급한 것은 제 자신이 ‘회개’에 대하여 먼저 바르게 아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 교회의 선배들이 이해한 회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습니다.
다시 글의 앞 부분으로 돌아가 첫번째 질문을 다시 해보고자 합니다. 내가 배운 신학과 내가 사역하는 교회와 내가 살아가는 삶을 이어가는 연결고리가 무엇인가? 저는 그 답을 청교도에게서 찾았습니다. 청교도야 말로 교회의 역사 가운데 가장 바른 신학의 유산을 남긴 자들이며, 또 가장 실천적인 교회와 신자의 삶을 살아낸 자들입니다. 주께서 제게 주신 특별한 은혜 중 하나는 청교도들의 책을 조금 빨리, 그리고 조금 더 자주 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많은 오해와 억측, 그리고 비난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적이다. 바리새적이다라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개혁신학이 가장 멀리하고 싫어하는 율법주의와 바리새주의가 오히려 개혁신학을 비난하는 요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냐면 실제 교회와 상관 없는 듯이 신학을 위한 신학으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성령의 신학이고 교회를 위한 신학입니다. 지금 여기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개혁신학을 통해 드러나고, 그 교훈을 받은 성도들이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개혁신학과 개혁교회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개혁신학의 원래의 모습은 잃어버리고 그저 어렵고 복잡하며 정죄하기 좋아하는 학문이라는 이미지만 남은 것 같아 많이 안타깝습니다. 바로 그 교회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모습을 우리가 잘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교도 안에서 저는 그 실제를 봅니다. 개혁신학이 교회를 유익하게 하며 성도들을 자라게 하는 바로 그 은혜의 기록들을 청교도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청교도의 책들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바로 그 연결고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위대하고 아름다운 유산인 개혁주의 신학과 그 유산이 과거의 유물이 아니요 지금도 살아 숨쉬는 교회의 원동력이 되는 바로 그 실제의 모습들을 우리는 청교도와 그들의 책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게 큰 소망이 되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합니다. 바로 ‘회개’의 문제입니다. 회개에 대한 왜곡과 오해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회개를 무의미하게 봅니다. 죄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고 틀려지니 당연히 회개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회개를 모르는 것은 죄를 모르는 것이고, 죄를 모르는 것은 인간의 현실을 모르는 것이며, 이는 당연히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미,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는가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는 현실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회개와 죄에 대한 무지는 결코 거룩한 삶을 낳을 수 없습니다. 반복되는 죄를 전혀 괴로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데 거룩한 삶을 소원할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무율법주의에 빠져버립니다.
또 어떤 분들은 회개의 경험만을 너무 강조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회개라는 행위, 도덕적 삶을 회개의 전부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회개의 증거들을 강조하게 되고 결국 실제로 회개하지 않았지만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회개를 삼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보통 우리에게 일어난 회개에 대한 오해가 이 두 가지 정도입니다. 회개를 단순히 성경에 있는 철학적인 개념, 혹은 신앙 용어 정도로만 생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신학자들의 정리와 많은 책들 속에 기록된 회개의 내용은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 회개가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어떻게 이루어져가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철학의 용어, 과학의 용어들을 암기하듯이 회개를 말하지만, 회개는 하지 않는 삶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회개가 무엇인지 모르고,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왜 회개를 해야 하는지 그 회개의 이유도 모르고, 무엇이 우리의 회개를 참되게 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회개를 방해하는 방해물들을 방해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회개의 유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회개하지 않은 비참함을 유익으로 착각하여 죄에서 벗어나기 보다는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즐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회개를 바르게 설교하지 않으니, 예배 드린 성도들이 그 삶에서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기 보다는, 교회 안에서 분쟁과 미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세상에 나가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데, 세상에는 나가지 않고 교회 안에서 주님의 몸을 찢고 더럽히며, 오히려 세상의 염려거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회개’에 대한 믿음의 갱신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먼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하고,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그 지침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때에 토마스 왓슨의 ‘회개’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절실하고 적절한 책입니다. 신학과 교회를 이어주며, 신학과 실천을 연결해주며, 교회의 가르침과 성도의 삶을 이어주는 고리의 역할을 충분히 하는 책입니다. 사실 저는 이전에도 청교도들의 책으로 많은 유익을 얻었지만, 개척을 한지 1년이 된 지금 이 책을 읽음으로 얻게 된 유익은 이전보다 훨씬 큽니다. 무엇을 전해야 할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전해야 할 것을 전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저 단어의 나열들로 내가 가진 지식을 자랑하고 있는 선에서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점검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왓슨과 다른 여러 청교도들의 설교와 같이 정말 신자의 형편과 그 영혼과 삶을 모두 바라보며 이토록 실천적인 설교를, 실제적이고 적용적인 설교를 하고 있는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회개를 글로만 다루지 않습니다. 물론 이 책은 글로 쓰여졌지만, 그 안에 기록된 내용들은 우리의 영혼을 향하고 우리의 삶을 바라봅니다. 글을 읽지만 그 설교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회개를 주저하고 미루었던,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저의 부끄럽고 숨겨놓았던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가 마치 내 영혼을 살피고 간 듯합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유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목사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신자로서 내 영혼을 돌아보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회개에 대한 경고와 권면들, 5장부터 10장까지는 한번에 읽어내려갔습니다. 특히 ‘신속한 회개’에 대한 권고인 8장은 죽음의 문제를 직면하여 전하는,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하나님 앞에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목사의 설교였습니다. 지금 내게 하시는 설교였습니다.
‘회개’에 대한 전면적인 이해와 갱신 그리고 실천에 대한 적용점들을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곳곳에 토마스 왓슨이 영국의 현실을 때로는 강하게 질책하고, 때로는 슬퍼하며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조국교회인 영국 교회를 향한 사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사랑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실제적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제가 지금 섬기는 교회를 돌아보게 되고, 한국 교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회개’만이라도 새롭게, 그리고 성경의 교훈대로 이해되고 적용되고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 교회의 모든 목회자와 성도가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박영돈 교수님께서 책의 서두에 해설의 글에 남기신 청교도들의 두 가지 주된 관심 곧 “교회 개혁과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종교개혁이 단순히 이론과 교리로만이 아니라 교회의 제도와 직분과 실제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며, ‘신학과 경건, 교리와 삶, 객관적인 진리와 주관적인 체험 사이의 긴밀한 연합’이라는 놀라운 신앙의 경험들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길 바랍니다. 제 자신이 먼저 이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가진 정말 놀라운 장점을 하나 더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원래 책을 읽을 때 손에 연필을 들고 줄을 그어가며 체크를 해가며 봅니다. 이 책의 거의 모든 페이지를 그렇게 읽은 것 같습니다. 내용 자체의 놀라운 교훈이기도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문장 자체입니다.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흘려들었던 신앙의 격언들이 여기에 다 있었습니다. 각 페이지마다, 페이지의 줄마다 그 문장 하나 하나가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고, 잠들어 있는 영혼을 깨우치고, 지혜를 더하여 주는 놀라운 통찰을 우리에게 줍니다. 살아있는 설교문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한 가지 이 책에 대하여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성경 인용입니다. 이 책은 ‘새번역’과 ‘개역개정’ 그리고 옮긴이의 ‘사역’이 쓰였습니다. 청교도의 책들에게서 성경 인용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경우는 단지 성경의 인용만으로 내용을 채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청교도들의 성경 인용은 단순히 비슷한 구절이나 단어를 이어오는 것이 아니라, 문맥과 신학의 흐름을 따르는 인용일 때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성경 각주들이 달리고 성경의 구절들이 책 속에 인용이 됩니다. 이런 때에 필요한 것은 ‘성경의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인용된 성경들의 문체와 표현이 ‘통일’되면 좋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알기론 청교도들이 굳이 그들의 책에 그토록 많은 성경 각주를 단 것은 자신들의 글과 성경을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각주를 달지 않으면 그것이 성경의 인용인지 모르고 넘어갈 정도로 청교도들은 성경을 잘 인용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글과 성경을 구별합니다. 즉,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빌려와 자신들의 글을 쓴 것이지, 자신들의 글을 돕기 위해 성경을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성경의 메시지이며 자신들의 글은 성경의 메시지를 부연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굳이 성경 각주를 일일이 달고, 성경을 그토록 많이 인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대적인 표현들이 쓰인 성경을 인용하여 독자들이 편하게 읽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교회와 설교단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성경의 문체가 아닌 성경을 인용함으로 익숙하지 않은 표현들이 쓰임으로 낯설움을 줄 것 같습니다. 이는 지극히 제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는 일은 큰 도움이었고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제 개인의 경험과 느낌을 기록하느라 정작 책에 대한 내용들은 많이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누린 유익의 기록이야 말로 이 책에 대한 저의 가장 정직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이 책을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도 합니다. 그저 제가 받은 은혜와 유익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 제가 이 글을 쓰는 유일한 목표이고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