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슬픔이라는 감정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토마스 왓슨(약 1620-1686)은 경건에 대해 말하면서 슬픔을 언급합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의 주된 특징들을 나열하면서 그 여덞 번째로 ‘눈물을 흘림’을 언급합니다. “경건한 사람은 복음주의자로서 우는 사람입니다.(토마스 왓슨, 경건, 복 있는 사람, 2015, p.90)”[1] 왓슨이 소개하는 여섯 가지 슬퍼해야 할 이유를 길게 인용하겠습니다(p.90–94).
경건한 사람이 우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 그는 우리 안에 있는 죄 곧 지체 안에 있는 또 다른 법(롬7:23) 죄가 분출해서 최초로 출현하는 그것으로 인해 웁니다. 우리의 본성은 독을 푼 샘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께 적대적인 그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므로 슬퍼합니다.
둘째, 그는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죄로 인해 웁니다. 우리가 죄를 없앨 수 있다면 위로가 되겠지만, 우리는 이 뱀을 떨쳐 낼 수 없습니다. (중략) 죄의 권세는 거두어지겠으나 죄의 생명은 한동안 연장됩니다. 그리고 죄는 살아 있는 한 우리를 괴롭힙니다. 페르시아인들은 로마의 상시적인 적으로서 빈번히 국경을 침범했습니다. 이처럼 죄는 늘 ‘영혼을 거슬러’ 싸우며 전쟁을 벌입니다(벧전2:11). 그리고 죽을 때까지 휴전은 없습니다. 눈물을 쏟아야 할 일 아닙니까?
셋째, 하나님의 자녀는 종종 죄의 힘에 굴복당함을 인하여 웁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롬7:19).” 이때의 바울은 물살에 떠밀려 가는 사람 같습니다. (중략) 죄의 간교함을 경험하고도 여전히 어리석어서 이 불덩어리를 또 다시 가슴에 품고 있음을 생각하니, 중생한 사람으로서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 경건한 사람은 더 거룩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한탄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과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괴로워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하리라. 하지만 내 사랑은 얼마나 흠이 많은가!”
다섯째, 경건한 사람은 불현듯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서 웁니다. 금은 모든 금속 가운데서 가장 순수하고 단단하지만 불에 들어가면 가장 빨리 녹습니다. 은혜로운 영혼, 곧 이 정금 같은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의 불에 닿는 순간 녹아서 눈물이 됩니다. (중략) 이것이 바로 구름이 햇살에 녹아 물이 되는 광경입니다.
여섯째, 경건한 사람은 자신이 범하는 죄가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이들의 죄보다 악하므로 웁니다. 의인의 죄는 대단히 혐오스러운데, 그 이유는 (1)그가 자신이 내세운 신념에 어긋나게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거슬러 죄를 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신념, 지식, 맹세, 기도, 희망, 경험 또한 거슬러 죄를 짓습니다. (중략) (2)의인의 죄는 대단히 혐오스러운데, 그것은 그의 죄가 배은망덕한 죄이기 때문입니다(왕상11:9).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은 사랑을 배신한 죄였습니다. (중략) 그는 말하자면 세례를 받듯 자신의 눈물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분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분노하시지만, 경건한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슬퍼하십니다. 악한 자들의 죄는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르지만 경건한 사람들의 죄는 그분의 가슴을 찌릅니다. 아내가 배신하면 남편의 가슴이 무엇보다 아픕니다. (3)의인의 죄는 혐오스러운데, 그것은 그 죄가 하나님을 더욱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는 신앙의 얼굴에 먹칠을 합니다. 우리가 보듯,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회심한 이후에도 울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청교도들은 대단히 우울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가집니다. 하지만 그들이 우울해 보였던 것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 곧 경건한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 속에 있는 자신을 깊이 파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참된 기쁨이 자신 안에 있으며, 완성된 기쁨을 미래에 얻을 것으로 바랐기 때문에 이 땅에서 누리는 잠깐의 시간 동안 우울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던 것이죠. 왜냐하면 자신의 죄악된 현 상태는 이미 안에 심기운 참된 기쁨과도 배치되는 것이며 완성된 기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니 말입니다. 왓슨도 이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죄로 인하여 슬퍼해야 할 이유에 대해 숙고한 후, 다음과 같이 이 내용을 마무리합니다.
경건한 사람이 이와 같이 죄로 슬퍼한다면 이 슬픔은 절망의 슬픔이 아닙니다. 그는 소망 없이 울지 않습니다. “저마다 지은 죄 감당하기에 너무 어려울 때에” 믿음이 승리합니다.
거룩한 슬픔은 아름답습니다. 경건한 사람의 슬픔과 악인의 슬픔은 단디단 샘물과 짜디짠 바닷물만큼이나 차이가 큽니다. 경건한 사람의 슬픔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거룩한 슬픔은 내적입니다. (중략) 둘째, 거룩한 슬픔은 순수합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한 불행보다는 죄 자체의 악을 더 슬퍼합니다. (중략) 셋째, 거룩한 슬픔은 감화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유익합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얼굴을 어둡게 하는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전7:3)” 거룩한 눈물은 적실 뿐 아니라 씻어 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한 사랑을 깨끗이 씻어 없애는 것입니다.
천박한 즐거움이 시대를 관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적 국가적 사회적 아픔, 달리 말하자면 보편인간으로서의 아픔이 적게든 많게든 모든 사람의 가슴을 꿰뚫고 있습니다. 마치 보편인간에 대한 인식이 그 동안은 없었다가 고통을 통해 하나로 엮어지는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 ‘뭔 슬픔이고, 뭔 개인적 경건이냐!?’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 두 가지 극단적 상황에 개인의 경건은 필수이며, 문제해결의 주춧돌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왓슨이 이야기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우울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참되고 깊은 내면적 기쁨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감각적 즐거움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일시적이고 사라질 것에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천박한 즐거움이 참된 유익을 준다면, 인간의 인간 됨 회복과 세계의 평화 등과 같은 일반영역에서도 유익을 준다면 왜 추구하지 않겠습니까. 천(淺-얕고)하고 박(薄-엷다)한 기쁨은 말 그대로 얕고 옅어서 안개와 같이 사라지고 일시적 흥분 외에 영속적이고 긍정적인 유익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개인의 경건을 추구하며 그 가운데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죄에 대해 참되게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더 기쁜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시대의 아픔이 온 땅을 뒤덮고 있는 이 때에 우리에게 개인의 경건은 오히려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집니다. 먼저, 비록 왓슨은 개인의 죄를 이야기했으나 우리는 더 넓은 죄의 의미를 생각하며 적용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죄는 단지 하나님께 개개인이 불순종한 도덕적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는 결과가 따르며 그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개인적, 가정적, 사회적, 우주적 무질서와 고통의 근원입니다. 또한, 만약 개인의 고통의 총합을 생각하며 우리가 격분해하며 공감하고 슬퍼하는 것이라면, 어찌 한 사람의 경건이 전체 무리의 평안에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구조와 개인의 문제 사이에서 수많은 고민들이 오가지만 구조와 개인은 이분법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구조는 단순히 개인의 총합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개인과 무관하게 관념적으로 그리고 억압적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개인은 구조 형성에 분명 기여한 바가 있으며, 어쩔 수 없이 구조 안에서 태어나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유의 편이를 위해 둘을 구분할 수는 있겠으나 상호 영향을 주고받음을 기억하는 것은 언제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길게 이야기를 전개해버렸네요. 어쨌든 그래서!(급수습..) 개인의 죄를 슬퍼하며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거시적 관점에서도 필수적이며, 그렇기에 시대의 아픔이 강력한 이 때에 오히려 더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언급하고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왓슨이 경건한 사람의 특징들 중 하나로 눈물을 언급한 이 장 바로 앞에 제시하는 특징은 바로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김’입니다. 죄에 대한 슬픔은 단순한 우울함이나 자해적 감정이 아닌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기 위해 우리 심령이 자연스레 이끌려가게 되는 길입니다.
오늘도 앞에서는 그리스도를 귀히 여기며, 뒤에서는 자신의 죄로 인해 눈물짓는 경건한 사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이것이 Coram Deo의 출발점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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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토마스 왓슨은 17세기 사람임으로 근현대사에 등장한 복음주의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붙잡힌 바 된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