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길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자유로우신가요?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그리 자유로와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그들이 자유롭도록 놓아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엄마 품에 안겨 가족의 편안함을 누려야할 나이 때부터 입시 경쟁에 휘둘리며 최소 10년을 넘게 달려가고, 이후에는 취업 경쟁에 뛰어듭니다. 왜 해야하는지조차 모르는 스펙을 쌓기에 정신이 없고, 스펙이 적으면 적은 것이, 많으면 많은 것이 문제가 되는 세상입니다. 정규직이 되기는 정말 어려운 시대이며, 직장을 얻더라도 지나치게 많은 야근에 시달리며 눈치를 보며 살아갑니다. 좀 쉬고 싶고, 좀 다른 것을 해보고 싶은데, 이 세상은 그럴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이 지긋지긋한 대학 입시 경쟁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취업은 보장되나요? 야근 안해도 되나요? 예수님을 믿었다고 그 모든 상황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주일에 하루 종일 교회에 있어야 하니 피곤이 가중되는 느낌이 들기까지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자유로우신가요?

하지만 성경에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과 그럴 때 진리 안에서 자유로와질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이 허튼 소리가 아닐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의 정의와 한계

일반적으로 국어 사전에서 말하는 자유의 사전적인 의미는 “외부의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1]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에 좋은대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즉 자기가 가치있고 좋게 여기는 것을 방해받지 않고 택하고 이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자유를 사용하기엔 너무 많은 외부의 제한들이 있죠. 내가 좋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걸 넘어서면 범죄죠.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몸이 따라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죠.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은 처음에 언급한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암울한 현실일 것입니다. 이 바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게 휩쓸려 살아가는 것만 같습니다.

진짜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

하지만 정말 알아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진짜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흔히 간과해버립니다.

먼저 한가지 생각을 해볼까요. 우리는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성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나에게 좋지 않은 것, 즉 내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선택”하는 건 이미 자유가 아니라고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좋.은.것.일까요?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성향”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여러가지 성향이 있죠. 그 성향은 어떤 것이 더 가치있는지, 덜 가치있는지, 더 좋은지, 덜 좋은지, 더 아름다운지, 덜 아름다운지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성향에 따라 선택을 합니다. 우리가 완전히 객관적이라고 여기는 이성도 이 성향의 영향을 받습니다. 여기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내 성향대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정말 문제는 그 성향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지배받거나 왜곡 되는 것입니다. 원래 진짜 가치있는 것이 있는데, 마음 속의 성향이 그것을 가치있게 여기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원래 좋아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외부의 영향력에 의해 그것을 좋아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면, 그런 상태에서 그 사람이 자신의 성향을 따라 선택하고 행동할 경우, 그는 자유로운 것일까요?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통해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마약에 찌든 사람은 마약이 갈급할 때 그것만큼 자신에게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을 얻었을 때의 쾌감은 말할 것도 없겠죠. 그런데 그는 과연 자유로울까요? 아니요. 그는 마약의 노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것을 단지 외적인 요소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짜 가치있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 못하도록 내 성향을 왜곡시키고 지배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듭니다. 아예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게 만들어서 참된 가치가 아닌 거짓 가치를 선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죄와 세상의 노예

성경이 우리를 죄와 세상의 노예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성향이 죄와 세상이 가리키는 대로 좋고 나쁜 것을 선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향이 왜곡되고 지배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다른 것을 더 좋아보이게 만들고 택하게 만듭니다. 진짜 좋은 것을 좋게 여기지 못하고, 진짜 아름다운 것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비참한 것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경로를 통해 이런 가치관과 성향의 왜곡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TV를 통해, 사회 구조를 통해, 경쟁을 통해, 이 사회에서 성공하고 뛰어난 외모를 갖추고 물질적인 부와 인기를 얻는 것이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세상의 가치 질서에 내 성향이 포로가 되어감에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상태를 노예의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삶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진리와 자유의 관계

그렇기에 정말 자유로운 선택을 하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정말 가치있는 것,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것을 좋다고 여기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왜곡과 억눌림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진리를 통해 가능합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가치있는 것인지, 무엇이 가장 좋고 기쁜 것인지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서 왜곡되게 퍼져나가는 가치의 질서를 바로 잡아줍니다. 그리고 진리를 통해 진짜 가치있는 것이 뭔지 깨달았을 때, 그는 진정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죄의 종입니다. 죄에 의해 성향이 짓눌리고 눈이 가리워져서 그들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가치있는지 전혀 모르고 살아가며, 죄가 가치있다고 말해주는 것만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거할 때, 그분의 제자로 살아가는 자가 경험하는 진리는 그 억압된 상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무엇이 가치있는지, 무엇이 옳은지를 비로소 깨닫게 합니다. 네, 그래서 진짜 자유가 무엇인지 경험하게 합니다. 이제 그는 가치있는 것을 사랑하는 자신의 성향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것을 영원토록 기뻐하는 삶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이것이 가치있어 보이지도, 좋아보이지도 않았지만, 진리로 인해 자유로와진 사람에게 이제 이것은 정말 달콤하고 가치있는 것이 됩니다. 그는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명료해진 영적 시야를 가지고 자유롭게 그것을 선택합니다.

외적인 한계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자

예수님이 주시는 이 진리는 내적으로 억압받던 죄의 지배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뿐더러, 처음에 언급했던 여러가지 한계들을 마주해서도 진정 우리를 자유롭게 만듭니다. 사회의 억압적인 흐름에 귀속된 상태에서, 악한 구조에 짓눌려 사는 외적 환경이 바뀌진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환경도 그 사람이 진짜 가치있게 여기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선택하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선택의 순간에도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택할 수 있으며, 어떤 외압도 그것을 방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다른 상황과 다른 제약 속에서 살아가지만 항상 그들의 위치에서 최선의 것을 자유롭게 택하고 행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택하고 실천하는 것 말이죠.

이것은 단순한 정신승리가 아닙니다. 정신승리가 비참한 상황 속에서 그저 스스로를 위로하고 헛된 합리화를 시키는 것에 가깝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로운 선택은 오히려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며(참된 가치를 깨달으며) 진짜 중요한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세상에 대해 저항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세상에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은 내적인 한계(죄의 노예됨)와 외적인 한계(세상 자원의 한계와 비참한 현실) 속에서 자유가 없이 살아가지만, 예수님께 나아가 그분의 제자가 된 이들은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고 자유롭게 그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택하는 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택하는 자는 결코 빼앗기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2]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적에게 빼앗기는 사람만이 패하였다고 한다. 사랑하는 자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만 사랑한다면, 그는 불패不敗의 인간이요 질투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그는 되도록 많은 인간이 사랑하고 획득할수록 그만큼 풍요해지는 대상만 사랑한다. 그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지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불패의 인간, 즉 마음껏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되 그것을 결코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자유인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답게 자유로우신가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자유를 누려야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이런 자유를 누리기보다는 다시금 세상의 종이 되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다시금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처럼,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참된 자유를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권리를 누려나가야 합니다.


  1.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

  2. 아우구스티누스, 성염 역, 『참된 종교』 (분도출판사), V,46,86. 블로그에는 인용시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바꿔서 표기함.  ↩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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