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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이란? 제5강 – 오직 믿음(2/2)

Summary 요약

오직 믿음 1/2에서는 ’오직 믿음으로by Faith Alone’에서 ’오직 믿음’을 살펴 보았다면 이번 포스팅에서는 ’으로by’를 살펴볼 것이다.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칭의) 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그분이 보시기에 의롭다고 칭하는 것을 뜻한다.

116세기의 문제는 헬라어가 아닌 라틴어의 특성상 ’칭의 Justification’가 ’의롭게 만들다 to make righteous’라는 의미를 태생적으로 지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헬라어로는 ’의롭다고 여겨지다 account to righteous’의 의미다.
이 교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데 과연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이루어지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2그래서 로마 가톨릭은 ’고해성사’가 필요해졌다. 로마가톨릭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물)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신자에게 주입되며, 신자는 그 때부터 은혜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단, 도덕적 죄를 짓기 전까지. 하지만 죄를 짓게 되면 신자는 칭의를 가능하게 하는 은혜 Grace of Justification를 잃게 되나 그 믿음은 유지된다. 따라서 칭의Justification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고해성사Sacrament of Penance가 필요해진다.
1. 고해성사
2. 성직자의 인증Priestly Absolution: “죄를 사하노라…라는”
3. 충족시키기 위한 실제 삶 Works of Satisfaction

물론 가톨릭도 행위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일차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칭의구원의 은혜는 잃어버릴 수 있으며 인간 삶 속에서의 노력으로 이를 회복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3개혁주의자들은 칭의의 수단인은 믿음이다!(Instrumental Cause to Justification IS FAITH!)라고 외친다.(쉽게 말해서, 칭의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믿음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로마 가톨릭과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개신교와 로마가톨릭의 차이

 

 

그래서,

우리를 위해 사시고 죽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에게 내려져야 했을 진노를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동시에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취득하시고 우리에게 그 의를 옮겨주셨다. 그러니 우리를 위해 사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죽음과 우리를 위해 사신 삶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수단인(手段因)instumental cause’이 믿음인 것이다.

4Extra Nos!(우리 외부으로부터!Outside of Us!)

마틴 루터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의 의는 반드시 우리(인간) 외부에서 와야 한다고 말이다. 만약 우리 안에서 의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을 믿는 것을 뜻하는가? 지적동의만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악마도 지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1. Contents of Gospel복음의 내용
2. Intellectual Ascent지적인 동의
3. Personal Trust and Relience개인적인 확신과 의지

마지막 세 번째가 바로 악마는 가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확신과 의지를 복음의 내용에 대해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이에 따라 자동으로, 필연적으로, 필수적으로 신자는 칭의의 구원과 동시에 ’성화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믿음은 살아있는 것이고, 생사에 관련된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스스로를 믿을만한 행동들로 증거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Faith that is alive, that is vital, that shows itself by faithfulness!

 

Thoughts 더 생각하기

신학의 역사는 계속해서 진보해오기만 하지는 않았을테지요. 세상 모든 다른 학문이 그러하듯이요. 하지만 과학이 잘못된 방향이든 그렇지 않은 방향이든 사물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넓이가 부정할 수 없게 계속해서 깊어지고 커진 것을 생각해본다면, 신학도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내린 확고한 결론들은 참으로 귀한 깨달음을 주는 것 같습니다.

다만 다른 학문과 다른 점은 신학은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없다면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주어진 말씀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사역의 진정한 의미와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 담겨진 그 엄청난 의미들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의 머리 속에서 어떻게 이런 ’전가’의 개념이라던지 ’속죄’의 개념이 나올 수 있을까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존 파이퍼는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문제입니다! This is a MAAAAAASSSSIIIVEEEE problem! 라며, 그 특유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외치시곤 했습니다. ’칭의의 구원’은 결코 결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죠. 이는 그만큼 완전한 핵심에 놓여 있는 교리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살아있고, 중요하며, 믿을만한 것들이 드러나서 스스로를 증거하게 되는 믿음이라는 사실이 가장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믿음은 확신 가득한 진술이 아니며, 열정적인 끄덕임도 아니고, 치밀한 논리 체계도 아닙니다. 우리 믿음은 살아있습니다. 믿음은 생과 사의 기로에 우리를 던져놓습니다. 믿음을 가지는 것과 가지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숨을 멈추느냐 계속 쉬느냐의 차이와 같이 생과 사를 갈라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을 지닌 것이기에 믿음은 반드시 스스로를 증거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 믿음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일 것입니다.
제 삶에서 변화되지 않는 부분들을 보며 다시 믿음을 점검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성화의 열매가 잘 맺히지 않을 때, 자신을 다그치고 To-Do List를 다시 짜보는 것이 아니라 칭의의 구원을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안에 죄가 일어날 때는 성령만이 그 죄를 죽이실 수가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순종과 믿음을 사용하셔서 그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께 붙어 있으려는 올곧은 경향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지배를 받게 되면 이것이 매우 약화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은 믿음이 식은 사람들입니다.(중략) 강력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의 도움이 주어질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는 태만한 낙관이 아니라, 죄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죄의 지배에 들어가게 된 것처럼, 다시 은혜의 원리를 따라 말씀에 순종할 때 은혜를 주셔서 죄의 지배를 벗어나게 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기초로 한 믿음입니다.”[1]


  1. 김남준, 죄와 은혜의 지배, 278.  ↩
Over de auteur

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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