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5장을 읽고나서(물론 결론이 있지만)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마치 웅장하고 긴 교향곡을 완주하여 들은 듯 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교향곡을 다 듣기 위해서는 연주하는 자들만이 아니라 듣는 자들에게도 상당한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단은 꽤 긴 시간을 앉아서 들어야 하고, 중간 중간 난해하고 어려운 부분에서는 잘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다 듣고 나서의 감동과 기쁨은 중간에 들인 수고와는 비교할 수 없을 큽니다.
이 책의 5장을 읽고 나서의 제 기분이 그랬습니다. 마음의 시원함. 두꺼운 신학책이나 청교도의 고전을 다 읽었을 때의 그런 시원함과도 비슷했습니다.
서평을 쓰려고 하지만, 아마도 이 글은 서평 보다는 ‘독서 감상문’이 될 듯 합니다. 책을 평하기 보다는 이 책을 통해 받은 은혜와 감사, 무엇보다 그 마음의 시원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이 책은 읽기가 상당히 어렵고 까다로웠습니다. 책의 추천사를 쓰신 분들이나, 주변의 몇 몇 분들의 평은 ‘어려운 신학 용어와 개념을 매우 쉽고 편안하게 풀어 준 책이다.’였습니다. 실제로 저자는 매우 어려운 개념들을 역시 어려운 신학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매우 편안하게 풀어줍니다. 신학 원서들, 특히나 조직신학 중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영어 원서들을 여러권 읽었지만, 이 책의 설명이 가장 쉽고 은혜로웠던 것 같습니다.
동시에 두 가지의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는 번역과 편집의 수고가 얼마나 컸을까라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저자가 말을 쉽게 써도 번역자와 편집자가 저자가 설명하는 신학 내용에 대해(심지어 저자는 단순히 조직신학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역사를 관통합니다. 책 중간 중간에 있는 짧은 글들과 자료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짧은 신학사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이단에 대한 교회사적 이해를 다룬 책을 함께 읽었는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해하지 못했다면 이런 결과물이 나올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하셨을지 번역자와 편집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동시에 원서를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물론 좋은 번역과 편집으로 인해 이 자체로도 충분히 그 의미와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원서에서 저자가 풀어낸 논리와 저자의 글쓰기 그 자체가 궁금했습니다. 조만간 원서를 한번 구해볼 생각입니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 이 책은 분명히 쉬운 책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어렵고 까다롭게 읽어야 했습니다. 저자가 쉽게 풀어냈다는 그 장점이 오히려 저는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신학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신학의 어려운 개념들을 쉽게 풀어냅니다. 이 과정들이 제게는 역작업이 되어 버렸습니다. 보통은 용어를 먼저 쓰고, 그 용어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개념만을 설명하고 용어를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습니다. 저는 읽으면서 저자가 밝히지 않은 바로 그 용어들이 떠올랐습니다. 저자는 쉽게 풀어썼지만 저자가 설명하는 그 개념들이, 그리고 그 개념들을 설명하는 신학 용어들이 어떤 의미이고 그것이 얼마나 지금까지 어렵게 이해했던 것들인지 역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 용어를 찾으려고 다른 책을 열어보는 일들이 이어졌습니다.
왜 그렇게 어렵고 더뎠을까요? 단순히 용어와 설명을 연결시키는 그 과정의 어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제가 알고 있고 이해한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들이 상당히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논리와 용어로 정리한 개념들이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논리 구조로 설명이 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명확하고 분명한 진리로서 제 안에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저자가 여러번 밝히듯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나, 그 거룩하심에 대한 감사와 찬송으로서 삼위일체를 이해하고 본 것이 아니라, 신학적 수사와 철학적 구조로 머리 속에서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자가 지적하는 오류들에 뜨끔하며, 혼자 얼마나 창피해하며 책을 읽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당연히 설교나 강의에서 삼위일체를 말하기가 어려워졌고, 피하게 되고, 자주 접하지 않게 되니 나 자신 역시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지는 그런 악순환이 반복된 것 같습니다.
책에서도 나오듯이 역사상 나타난 이단들, 이방 종교, 그리고 고대 그리스 철학의 구조들이(저자는 쉽게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를 사용하여 중세를 거쳐 지금도 남아있는 스콜라 신학의 이해들, 그리고 분명히 저자는 그러한 이해가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들을 풀어냅니다. 그것도 쉽게!) 제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이것이 이 책을 통해 성경의 증명으로 새롭게 정리되며, 책의 글은 분명히 쉽지만,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는 그런 책 읽기가 되어 버리고야 말았습니다. 책을 읽는 일이 그랬으니, 이 책에 대한 글을 쓰는 것 역시 만만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이 책의 신학적 내용에 대한 것보다는 목사로서,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제가 느끼고 생각한 것으로 이어가고자 합니다. 말 그대로 서평보다는 ‘독서 감상문’입니다.
제 자신을 봐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에 대하여 잘 모르거나 잘못 알거나 아예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는 신학자들의 현학적인 글쓰기가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특히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자들의 설명은 그리 친절하지 않습니다.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설명을 참조해야 하는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삼위일체 자체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고 중요한 것이기에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이 더욱 어려워지는 이유가 너무나 많은 철학적 용어와 설명들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그 많은 설명들이 성경과 분리될 때가 종종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를 극복합니다. 분명히 그는 매우 깊은 조직신학적, 역사신학적 이해와 지식이 있는 신학자이지만, 그의 설명은 성경으로 귀결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분명한 계시의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함으로 삼위일체가 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알아야하고 믿어야 하는 복된 주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가장 큰 시원함 중 하나가 이것 같습니다.
두번째 원인은 첫번째 원인에서 나온 것일 수 있는데, 목회자들의 직무유기입니다. 사실 저 자신도 이 사실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를 단순히 신학자들의 어려운 설명으로 책임을 돌리기에는 목회자들의 잘못이 너무 큽니다. 삼위일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고, 이를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를 외면했습니다. ‘어렵다’는 것이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순히 교리의 한 부분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 우리의 신앙의 대상, 신앙 교훈의 본질이 바로 이 삼위일체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와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삼위일체를 알려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삼위일체를 교회에 가르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리적 지식을 전달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고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게 되고, 하나님을 말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말하지 않으며, 기독교 신앙을 말하지만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상관 없는 종교활동의 일부로 만들어버립니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하고 금송아지를 여호와로 섬기는 일에 앞장 섰던 아론과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 점에 있어 분명히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세번째 원인은 성도들의 무관심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인이 결국 이 세 번째 원인을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날 시대 분위기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어렵고 복잡한 것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편하고 재밌고 감각적인 것을 찾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는 일, 이해하기 위한 수고를 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렵고 복잡한 신학적 지식과 목회자들의 외면이 배후의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으려고 하지 않고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바쁘고 힘든 생활 속에서 감각적인 위로와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신앙을 찾으려 할 뿐입니다. 그러니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종교생활, 혹은 문화생활로서의 신앙생활이 될 뿐입니다. 어떤 분이 하신 말씀처럼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하지만, 고백적 그리스도인은 되지 않는’ 그런 신자들이 늘어났습니다. 당연한 것이 고백의 대상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르는데 고백적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고, 활동과 감각만이 남으니 당연히 문화적 기독교인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이러한 신자들을 양산해냈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지만, 동시에 많은 기독교인들 역시 스스로 이러한 교회와 목사들만을 좇은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 세가지의 문제에 답을 제시합니다. 그 답을 제시하는 방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책은 철저히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집중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을 풀어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이야기하고, 교회를 이야기하며, 신자의 경건을 말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선포하며,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또한 이야기합니다. 어렵지 않은 설명으로 신학의 가장 높은 차원을 이야기하고, 가장 평범하면서도 직접적인 이야기들로 오늘 우리의 신앙을 이야기합니다. 신학의 가장 깊은 정수를 다루면서 동시에 가장 일상적이고 실제적인 신앙의 실체들, 교회와 성도의 경건을 풀어 설명해줍니다. 가장 높은 곳의 영광과 거룩이 가장 낮은 이곳에서 어떻게 그 실체를 드러내는지를 보여줍니다. 신앙의 본질과 실천을 나누지 않고 함께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그 것이 내용과 실천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바른 이해로부터 당연히 도출되어 나타나는 놀라운 성령의 열매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최근에 삼위일체를 다룬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이 책을 보기 전에 읽었습니다. 현재 활동하는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회자들, 저술가들이 각각 삼위일체를 놓고 쓴 글들을 모은 책입니다. 성부에 대하여, 성자에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 각각 쓴 글들의 모음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그 책의 내용들은 매우 유익하고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은 이미 많았고, 각 위격에 대한 설명이 따로 나뉘어 모여있다보니 오히려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일을 각 위격에 대한 이해로 분절화시키는 그런 어려움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삼위일체를 설명하려 한 많은 책들이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저자의 이 책도 각 위격을 순서를 정하여 설명해 나갑니다. 그런데 그 글 속에서 삼위일체가 따로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이미 설명했지만 저자는 삼위일체를 각 위격이 가지는 사랑과 관계성을 통해, 그리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사랑이 어떻게 외부로 나타나는지, 우리가 받아 누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외향적 사역의 은총을 설명해 줍니다.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이 성부를 말하지만, 성부만을 말하지 않고 성자와 성령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성부를 풀어 설명하는 중에 그 안에서 성자와 성령을 이야기하고, 성자와 성령에 대한 주제 역시 분명히 각 위격에 대한 설명이지만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을 함께 이해하게 해줍니다. 이 내용과 풀어가는 방식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저자의 탁월한 신학적 지식만이 아니라, 이것을 풀어내는 놀라운 글쓰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잘 풀어낸 번역자와 편집자의 수고와 노력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밝혔듯이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무겁고 어려운 신학교과서 한권, 혹은 두꺼운 청교도의 설교 한 권을 읽은 것과 같은 지적 만족으로 인한 뿌듯함만이 아니라, 위대한 음악가가 풀어낸 교향곡을 들은 것과 같은 마음의 시원함이 함께 나타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그 신성의 아름다움이 각 위격을 통하여 어떻게 우리에게 계시되었으며, 은혜로 부어졌는지, 그 거룩한(이 ‘거룩’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책을 읽은 사람은 알게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마지막에 ‘거룩’과 ‘영광’을 다룬 부분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이 책의 마지막에 교회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을 읽으며 큰 감동과 은혜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작년 말에 저는 몇 권의 책을 읽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했습니다. 그 때 읽은 책이 공교롭게도 이 저자의 전작인 “꺼지지 않는 불길”이었습니다. 다른 한권은 전에 제가 서평을 쓴 토마스 왓슨의 ‘회개’였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길’은 많은 분들의 추천이 있어서 구입에 큰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일부러 연말에 읽어야지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작년 연말에 큰 의미로 남았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길’은 책을 다 읽고나서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2014년 10월에 개척을 했고, 이제 교회의 기초를 다지는 중입니다. 그 때 이 책은 제게 정말 큰 의미가 되었습니다. 개척하는 교회와 목사에게 지금의 내 위치, 지금까지 이 신앙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왜냐면 앞으로 어디를 향하여 가야 하는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길’에서 저자는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신앙 선배들의 여정과 그들의 외침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걸음과 외침의 열매로서 지금 우리의 교회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 ‘선하신 하나님’은 그렇다면 그 본질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토록 신앙의 선배들이 돌아가고자 했던 그것, 회복하고자 했던 그것, 하나님께서 개혁자들을 통하여 교회의 역사 가운데 다시금 부흥케하셨던 바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 그 분 자신이었습니다. 그 분만이 홀로 영광 받으시며 그 거룩하심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보이시는 그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독서의 양이 적어서, 폭이 좁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기독교 강요’를 읽었을 때 만큼의 감동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기독교 강요를 읽으며 느꼈던 감동 역시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만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칼빈의 사랑이 또한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비슷한 마음이 듭니다. 저자가 교회를 너무나 사랑하고, 너무나 사랑하는 이 교회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목사의 마음, 그리고 그 가장 좋은 것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이 책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라면 이 책을 꼭 읽어야합니다. 특히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목회자라면 정말 반드시 읽어야 할 책입니다. 올 해를 좋은 책으로 시작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올 한 해, 1년만이 아니라 평생에 전할 제목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사족 – 최근에 논란이 되는 알라와 하나님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아주 중요하고 분명한 답을 줄 수 있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