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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정치: Part 1. 성경이 이야기하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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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 에 대해 이야기하기 앞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과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정치’는 무엇일까요? 사실 정치라는 주제 자체가 이런 짧은 글로 다루기엔 거대한 주제입니다. 하지만 더 큰 개념에 대한 규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공통의 합의를 갖고 있어야 논의를 이어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다지 큰 이견 없이 단어를 정의내릴 수 있는 간단한 방법으로 국어사전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정치라는 단어의 뜻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치 政治 명사 :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1]

즉 정치라는 단어 자체가 국가를 전제로 하고 그 국가를 이루고 있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며 그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고 그들의 이해를 도모하며 질서를 바로잡는 활동이라는 것이지요.

더 쉬운 말로 옮겨보면, 일반적으로 정치는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사회라는 구조 안에서 국가라는 체제를 통해 질서를 가지고 살도록 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정치구조 아래 있는 사람들이 ‘잘 사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정치라는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기원에 대한 설명, 국가를 이루는 요소, 그리고 그 국가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출처와 용처에 대한 규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를 이루는 인간에 대한 논의, 그리고 그 인간의 존재에 대한 숙고, 그 존재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발생적 현상에 이르는 광범위한 논의를 포괄해야 합니다. 결국 인간론, 국가론 등의 주제와 그 내부적 역학관계에 대한 지식은 정치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지식요건이 됩니다. 간단하지요?(응?) 비록 이런 세부적인 요소들에 대해 깊이 다루지는 못해도 이런 요소들이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계속 이어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2. 정치와 국가의 연원에 대한 이론과 한계

사실 오늘날의 정치에 대한 이해가 발을 딛고 있는 이론은 거의 모든 중고등학교 교과서가 공통적으로 채택하여 복음처럼 전파하고 있는(!) 사회계약론입니다. 사회계약론은 ‘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자신의 권리를 갖고 있는 자연 상태가 있었고 그런 개인들이 특정 필요에 의해 자신의 권리를 위임하고 계약을 맺어 국가라는 조직을 성립시켰다’는 이론이라고 헐겁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2] 사회계약론은 결국 국가와 권력의 연원을 사회 구성원인 인간 스스로에게서 찾으며 구성원의 선을 위한 국가정치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합의를 통해 인간다운 삶의 구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사회계약론은 (그것의 의도와 상관없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많은 사회적 제도와 장치를 마련하는데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계약론은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전제, 즉 ‘자연적 인간의 상태가 과연 존재했느냐?“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얼버무리고 넘어갈 따름이지요. 또한 어떤 제도가 공공의 선을 정말 도모하고 있는가를 판단할 때에 가져야 하는 상대적이지 않은, 즉 절대적인 기준을 결코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론은 합리적 개인들이 있고 합리적 개인들이 있는 한 사회와 정치는 결코 부정적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애써 위안해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역사경험은 그와 같은 순진한 인간이해를 가볍게 비웃었습니다. 이 이론들은 한계를 갖고 있지만 이 이론을 대체할 이론은 쉽사리 도출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이론은 정치학의 기반을 이루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계속 다른 이론들이 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이론적 연원은 사실 여전히 규명될 수 없는 가설적 상태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i.aspx사실 사회계약론을 위시한 다양한 정치이론, 철학이론을 비롯한 근대 계몽주의 이후의 일반 학문은 객관적 학문을 위해서는 신을 배제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 도출된 산물들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진보와 인간 이성에 대한 엄청난 긍정, 인간 가능성에 대한 낙관주의로 인한 것이었지요. 그것은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 안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사회 계약론을 비롯한 인간중심적 정치이론은 현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 그리고 나아갈 바에 대한 가설적 이상을 제시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의 근거와 당위를 확고하게 제시해주지는 않습니다.

즉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정치에 대한 설명은 인간의 연원과 정치적 현실구조의 시작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그런 설명은 참다운 인간다움을 상정할 지언정 규정할 수 없고 인간이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임의로 설정할 수밖에 없으며 자연스럽게 그 안에 형성되는 질서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당위적으로 설명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신을 이야기하고 그 신이 우리의 사상적 기반이자 목적이며 그 가치를 따르며 사회정의를 관철시킨다는 것이 어리석은 이야기로 비춰지는 것은 안타깝게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하나님이 객관적 진리의 아름다움을 인간에게 허락하셨으며 인간은그 진리를 기반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은 오늘도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 학문의 영역 안에서도 주장되어야 하고 관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하나님이 객관적 진리의 아름다움을 인간에게 허락하셨으며 인간은그 진리를 기반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은 오늘도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지금의 학문적 현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와 그것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 구조 자체를 부정하며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작금의 현실에서 통용되고 있는 가치와 그것을 대변하고 있는 이론의 기본적인 틀을 바르게 파악하고 그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답을 제시하기 위한 사상적 틀과 도구를 함께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즉 가장 기초적인 부분부터 시작하는 것이 비록 지루해보일지라도 당면한 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정치의 시작 : 하나님의 통치 행위

그렇다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정치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요? 그것은 태초부터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주체로서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시고 질서를 부여하셨으며 그 환경 안에서 자유롭고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치를 힘을 가진 주체가 그 힘의 효력 아래서 사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행위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정치의 창시자는 단연 하나님이십니다. 골로새서 1장의 말씀은 이 사실을 세상에 힘차게 외치는 가장 대표적인 성경구절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로새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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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힘을 가지셨고 그 힘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규정하셨습니다. 즉 그분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3] 그 형상에 부합한 삶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명령하시고 그 규정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실제적인 능력도 허락하셨습니다.[4] 또한 하나님은 그들이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하시고 그곳을 인간에게 허락하심으로 인간을 보호하셨고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5]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의 참다운 왕이 되셨고 가장 왕다운 통치를 인간에게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권위를 가진 왕으로서 인간에게 보호와 축복을 동시에 주셨습니다. 그분의 정치행위는 정당했고 효율적이었으며 가장 완전했던 것이지요.

4. 정치 질서의 파괴

하지만 이와 같은 정치 질서는 그 구조 아래 있던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습니다. 최초의 죄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질서를 창조하려고 했던 인간의 시도였습니다.[6] 이 시도는 성공하기는커녕 인간의 참다운 인간다움을 파괴했고 그 질서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바른 통치관계 안에서 가장 행복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인간은 마땅히 누려야 할 번영의 약속에서 배제되었고 풍성함과 기쁨이 넘치는 삶에서 배제되는 저주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7]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을 향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택하시고 택하신 백성을 통해 이 땅에 있는 인간을 통치하고 보호하는 그 일을 계속해서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당신의 진리와 사랑의 법칙을 지도하시고 그들의 지성과 영혼을 구속하여 이 땅을 온전한 질서로 회복해 나가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영역에서 회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인간은 자기사랑의 질서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사랑을 확장시키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갔습니다. 결국 이렇게 인간의 사회는 하나님의 법과 인간 스스로가 만든 자기사랑의 법이라는 두 가지 질서가 대립하는 구조가 되었던 것입니다.[8] 그리고 이 구조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정치형태는 시대가 지나면서 변했을지언정 그 안에 대립하고 있는 가치는 결국 진리와 비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5. 정치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 : 성경이 이야기하는 정치 이상

사무엘상 8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의 정치지도자를 세우신 이유가 나옵니다. 원래 하나님은 피조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들의 왕으로서 바른 통치를 하기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피조물인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신들을 다스리고 통제할 눈에 보이는 지도자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정치구조를 허락하셨습니다. 처음으로 그들에게 왕정이라는 정치체제가 공식적으로 허락되었습니다. (이것은 군주정 자체를 옹호할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지도자를 통한 정치운영이 공식적으로 합법화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의 제도를 허락하실 때에 그 구조 안에서 감수해야 하는 백성들의 어려움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9] 정치라는 과정 안에서 아무 불편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구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기된 것이지요. 백성들은 국가 구조에 순응하여 세금을 내고 그 안에서 부여된 의무를 행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구조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사적 안정과 보호를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도자를 담당하는 상부구조와 지도자를 요구했던 하부구조간의 거래가 성사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정치를 실행하는 지도자들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내버려두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치 지도자가 비록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그들이 지향해야 할 이상과 지양해야 할 부당함의 경계를 정해주셨습니다. 성경은 지도자가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정치적 가치를 도처에서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공평과 정의의 실현입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왕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 (왕상 10:9)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시편 58: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45:9)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미가 3:1)

공평과 정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쉬파트”와 “체다카”입니다. 많은 경우 정의와 공의로 번역되는데 이 단어들의 의미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정치 지도자를 통해서 관철하기 원하시는 가치를 더 명증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미쉬파트는 보통 영어로 justice, judgment로 번역되는 단어로 보통 공정한 재판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이것은 재산의 유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른 외부적 환경에 구애됨 없이 엄밀하게 심판한다는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부자건 빈자건, 유식하건 무식하건, 외형이 아닌 행위와 사실에 입각하여 정확하게 심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미쉬파트가 관철되는 재판에서는 빈부 외모의 구별이 전혀 없을 뿐더러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가지고만 판결이 이뤄집니다. 이것은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법을 행하고 제도를 정하는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체다카는 보통 영어로 righteousness, justice로 번역됩니다. 이 단어는 절대적 맥락보다는 관계적 맥락으로 사용되는데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될 때는 하나님을 향해 바른 태도를 갖는 것(신실함, 의로움)을 나타내고, 다른 이웃에 대해 사용될 때는 그가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체다카로 이웃을 대할 때에 그는 부당하게 이웃을 참소하지 않고, 행악하지도 않고, 함부로 훼방하지도 않아야 합니다.(시 15:3–5) 참으로 의로운 사람은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돕는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사 58:8–9) 결국 체다카를 행한다는 것은 단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긍휼을 포함합니다. 사람의 상황에 대해 마땅히 품어야 하는 바른 마음이 바로 이 체다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 미쉬파트와 체다카, 즉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을 향해 공정하게 법이 집행되는 것과 의롭고 착한 가치를 지향하며 의롭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치를 실행하는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로 정해두신 가치이며 이것은 정치를 바라볼 때에 타협될 수 없는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10]

6. 그리스도인이 정치를 향해서

정치는 일반적으로 볼 때에도 통치의 구조 아래 있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통치의 기술이며, 기독교적 가치 안에서 볼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인간의 질서가 아닌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돕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추구해야 할 것은 공평과 정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 뜻이 이 땅 가운데 임하도록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정치의 영역에서 최소한으로 명백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은 공정한 법의 집행과 공평한 선이 사람들의 삶에 관철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명백한 목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존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존재이며 사회라는 영역에서 그들의 의무는 공평과 정의를 삶을 통해 보이고 사회가 그것을 이루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치를 향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요구해야 합니다.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정치를 이루라고 말입니다.”
정치를 실행하고 있는 위정자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실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기민한 감각을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책임과 권리가 있다면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해서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펼쳐지는데에 기여해야만 합니다.

특별히 민주주의라는 구조 아래 살고 있는 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명백한 책임과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는 국민들은 직접 정치인이 되어 정치에 참여할 수도 있고 다양한 정치 행동(집회, 결사, 출판, 자기표현 등)을 통해 사회를 향해 자신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모든 사람이 정치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가진 권리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를 요구받습니다. 그에 대해 바르게 화답하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 의무를 방기하는 것은 실제로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명백한 목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존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존재이며 사회라는 영역에서 그들의 의무는 공평과 정의를 삶을 통해 보이고 사회가 그것을 이루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치를 향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요구해야 합니다.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정치를 이루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은 정치행동을 향해서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외쳐야 하며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방향을 향해서는 잘한다고 박수를 치고 지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7. 나가며 : 그리스도인, 삶에서 공평과 정의를 펼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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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고 김대중 전대통령 필리버스터(5시간 19분) 장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도 국회에서는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국민을 생각하는 참된 행동이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그것이 단순히 정부에 어깃장 놓기라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정치 사안에 대해 단순한 진보보수의 진형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그리스도인다운 평가를 내리고 바른 태도를 견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정치행동을 취하고 있는 주체가 말하는 바를 듣고, 그가 행하는 것의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의미에 대해서 가능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자신의 주관을 갖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위한 행동이라는 판단이 서면 지지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정반대에 있다고 하면 반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보의 편에서 하는 주장이냐 보수의 편에서 하는 주장이냐가 판단의 기준이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윤리와 상식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윤리도, 상식도 없을 수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참된 인간을 지향하며 참된 인간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윤리와 상식을 알고 그 일반적 윤리와 상식에 그것을 넘어서는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법을 더해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사안에 대해 스스로의 기득권과 유익, 스스로가 가진 자기만의 기준과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판단하는 사람은 그가 진보든 보수든 절대로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서,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것에 최고의 관심을 두고, 그것을 위해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내어주는 헌신과 권리포기를 실천하는 정치적 성향을 가진 그 사람이야 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이것이 너무 순진하고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어쩌면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렘 22:3)


  1.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33809400 네이버 국어사전  ↩

  2. 이 이론에 대한 바르고 정당한 이해를 위해서는 홉스의 리바이어던, 존 로크의 통치론,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출판사별 번역별 다양하게 나와 있습니다.  ↩

  3.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6)  ↩

  4.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

  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 2:15)  ↩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

  7.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 3:24)  ↩

  8. 이 부분에 대한 충분한 논변은 여기 있는 짧은 글 정도에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다행히 우리를 위해 이 내용을 잘 정리해 주었습니다. 신국론 16–22권을 참조하시길.  ↩

  9. 삼상 8:10–18  ↩

  10. 김근주, “구약에서 살펴 본 공평과 정의의 개념”, 2015 기윤실 포럼 「양극화 해소를 위한 성서적 실천」 자료집 pp 8–10.  ↩

Over de auteur

용진

개혁주의자는 아니지만 참된 개혁주의에 관심있는, 웨슬리안 계통의 학교를 졸업한 복음주의자.

Comments 3

  1. 그리스도인은 뚜렷한 목적을 기지고있기에 정치적이다… 와닿습니다. 정치는 모르지만 정당은 어떨까요.. 그 목적이 정권 획득, 즉 권력을 획득해서 목적을 달성하는 그 수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방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싶어요.

  2.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현실정치에 관련해서는 아무래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 굉장히 많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가 어떤 정치, 경제적 현실을 딛고 있는지를 다 알지 못하니까 말이지요.
    다음 글(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ㅠ) 정도에서 우리의 정치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진보와 보수라는 가치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같이 고민해보면 좋지 않을까요? 🙂

  3. 작금의 우리나라를 경험하며, 신앙인들은 세상을 바라보며 어떠한 분별력을 가져야 하나…로 시작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깊은 교제안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제 자신부터 돌아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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