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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 – 인정받는 것에 중독된 사람들을 위한 복음의 지혜

다음은 디자이어링갓의 “존 파이퍼 목사님께 물어보기”라는 코너에서 교만&겸손이라는 주제로 존 파이퍼에게 질문한 인터뷰 내용입니다(원문링크).

존 파이퍼 목사님께 물어보기(Ask Pastor John) 팟캐스트의 애청자인 빅토리아는 이런 질문을 적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존 파이퍼 목사님! 제가 종종 궁금해하던 것인데요.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는 것에 중독된 사람에게 어떻게 조언하시나요?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항상 두려워하고, 다른 이들이 보이는 별거 아닌 냉담함에 대해 항상 염려하며 거절을 두려워하거든요.”

저는 스스로에게 제가 하는 말을 빅토리아에게 그대로 말해주고 싶네요. 이것은 전적으로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일부의 사람들만이 씨름하는 독특하거나 사소한 문제도 아닙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역설, 아이러니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거절 당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대단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사실 우리가 되길 바라는 대단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의 갈망과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른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을 우리의 가치, 아름다움, 성취를 원합니다. 우리가 불안정한 갈망과 두려움을 보인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을만한 능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고, 인정에 기대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요.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며 그렇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교만의 죄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희망의 표현 속에서 우리는 이미 교만이란 나아갈 희망이 없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증거를 매일매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실로 외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외부의 도움이란 다른 이들의 인정이 아닙니다. 외부의 도움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외부의 도움 없이도 괜찮다고 여기려고 애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일한 시도를 하고 있는 외부의 사람들의 인정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서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갈망과 두려움을 다루는 진정한 방법은 그것을 얻는 것, 즉 인정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방법이란 우리 스스로를 겸손히하고, 우리의 진정한 보증, 참된 정체성, 진정한 반석, 진실한 기쁨이 우리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하나님 중심성을 대체해 왔다는 것이며,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초점을 맞췄고,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을 자존심으로 바꿨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 C.S. 루이스가 그의 편지들 중 하나에서 한 말이 내 머리 속에 떠올랐습니다. 나는 정확히 어디에서 이 말이 나온 것인지 적진 못했습니다. 나는 그가 편지에서 이 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교만의 기쁨은 긁어서 생채기를 내는 기쁨과도 같다. 만일 가려운 부분이 있다면 긁어버리고 싶겠지만, 가렵지도 않고 긁어서 생채기를 내지도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자존심의 가려움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자화자찬의 기쁨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다음과 같은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아무 것도 없으나 대신 다른 모든 것들, 즉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들과 동물들과 정원과 하늘을 갖는 것이다. (Collected Letters, 3:429)

정말 아름다운 문장입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몰두하는 소망없는 행동을 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보물로서 물려받게 되며 게다가 온 세상을 덤으로 물려받을 것입니다. 자존심은 삶에 있어 소망이 없는 길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기만족을 느끼는 것으로 기쁨을 얻고 있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그 자기만족을 다른 이들이 바라보는 것과 그들이 이에 대해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으로 우리는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하는 것을 보지 않는 것, 또는 그들이 충분히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 또는 그들의 표정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또는 그들은 왜 응답하지 않는지 등등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항상 괴로워할 것입니다. 아, 이 얼마나 비참한 삶입니까. 우리는 항상 남을 따라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얻는 의미와 우리의 기쁨과 정체성과 가치는 끊임없이 다른 이들에게 의존된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참한 삶을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마 23:5). 아, 여러분이 스스로를 즉각적으로 표출해서 트윗을 보낼 수 있는 미디어 시대 속에서 우리에게 이것이 얼마나 필요한지요. “그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마 23:5–7.

그러나 명백히 거기에는 공허함 밖에 없습니다. 자기만족이라 불리는 것 속에는 공허함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스스로가 스스로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도록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만족을 얻는 방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일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궁극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메아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영혼 안에는 항상 비어있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가진 자원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기대야 하는 끊임없는 필요성을 가지고 만족을 얻으려고 분투하지만, 스스로는 스스로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에 문제의 핵심과 탈출구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칭찬을 갈망하는 텅빔은 하나님의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의 결핍을 알려줍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다는 평안을 주는 만족의 결핍이며, 우리의 의미이자 우리의 정체성이자 우리의 보증이고 가치이며 유용성을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외적인 시야를 결핍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 안에서의(또는 예수 안에서의) 믿음과 이와는 반대되는 인간의 찬양 받기 위한 갈망 사이를 연결하셨습니다.

저는 수년전에 요 5:44 말씀이 강력한 충격을 준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하는 가려움은 믿음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믿음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하여 베풀어진다는 것에 대해 만족해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자존심과 사람들의 인정이라는 가려움을 긁어대어 여러분의 만족을 얻으려고 구부러진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에게서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자신을 만족의 원천으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에게서 돌아서서(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하는 것임을 기뻐하며 예수님께 나아온다면(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가려움은 영생을 샘솟게 하는 우물로 대체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것과 분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제 조언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하나님이 택하신 예수님과의 견고한 관계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십시오.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이 여러분을 다치게 할 수 없으며, 사람들의 인정이 여러분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두려워하고 또 다른 이들을 갈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얻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십시오.

이것에서 여러분을 자유롭게 해주는 진리는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1).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하시면 여러분은 누가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생각하십시오. 이 진리에 푹 잠기십시오. 그리고 또 다른 진리들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을 알고, 우리 바깥으로 나와서 우리를 위해 모든 악을 이기신다는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에게 모든 만족을 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빌 3:8).

그러면 가려움이 만족될 것입니다. 자존심의 성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으로부터 오는 만족으로 말입니다.

By John Piper. © Desiring God Foundation. Website: desiringGod.org

  • 상단 이미지의 출처는 여기입니다.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Comments 1

  1. “회개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책을 통해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늘 사람들을 잘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저에게 참 귀한 글인것 같습니다.
    저를 비롯한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사람들의 인정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품안에서 만족하는 안식과 해방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귀한 번역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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