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삼위일체 – 01. 꼭지 제목과 상관없는 것 같은, 하지만 엄청 상관있는 이야기

그리스도인은 뭐하는 사람인가요?

얼마 전 외부 특강을 하러 동기 강도사가 사역하고 있는 중고등부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스무명 남짓 앉아 있는 아이들과 교사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무엇하는 사람들일까요?” 전체 강의 맥락 속에서 이 질문을 통해 청중들이 관심을 환기시키기 원했던 것은 ‘대체 무엇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이게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었죠. 똑똑한 친구들이었습니다. 제 의도는 정확하게 파악한 것 같았어요. 용기있는 누군가 먼저 말문을 엽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요!” 맞습니다. 그리고 또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몸짓을 해가면서 힌트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네, 다 맞아요.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게 하나 있어요. 뭘까-요?” 더 이상 대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전 내심 놀랐습니다. 가장 먼저 나와야 할 것 같은 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스크린샷 2016-04-05 오후 12.57.39

이 일이 한 번만 있었다면 글로 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제 페친이 공유한 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기독교 방송에서 강연하고 계시는 영상 토막이었습니다. 그 분은 청중들에게 성경읽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시더군요. “여러분. 한국 교회는 그 동안 성경읽기의 HOW에 대해서는 많은 발전이 있었고 많은 말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서부터라는 듯이 잠깐 말을 멈추십니다. 비장한 목소리로 강연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WHY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 왜 읽으시나요?” 전 정말 기대했습니다. 이 문제의식에 더할나위 없이 공감했거든요. ‘왜?’라는 질문은 우리에게 행동을 하는 동기를 심어줄 뿐 아니라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총을 잘 다루는 사람들은 모두 HOW를 잘 아는 사람들이죠. 하지만 그들이 ‘왜 총을 다루는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 총을 누구에게 겨눌지가 결정됩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음 말이 목사님의 입에서 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라고요. 앞서 설명했던 특강했던 교회 학생들과 교사들이 떠올랐습니다. 믿음과 순종.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믿음과 순종’으로 주로 여겨지는구나 라는 사실을 이 때 알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네요. 불과 몇년 전만해도, 제가 지금부터 하고 싶은 ‘진짜 예수님 믿는 이유’를 알지 못했던 그 몇 년 전만해도 저도 동일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어. 이제 난 어떻게 그분을 굳건하게 믿고, 어떻게 치우치지 않고 그 뜻에 순종할 수 있을까!?” 모든 관심은 여기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지치고 힘겹고 지겨운 시간이었다는 것이었죠. 성경 읽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신앙의 의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저에겐 참 큰 짐이었습니다. 함께 의지하며 웃고 떠들더라도 진지하게 말씀과 신앙을 나누는 친구들이 있을 땐 그 모든 의무들이 즐겁고 지기 쉬운 멍에처럼 느껴졌지만, 어느덧 각자의 자리에 서서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혼자서는 도저히 버티지 못하는 내 신앙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움을 ‘믿음과 순종’이라고 대답했던 그 친구들도 아마 같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게 그다지 쉽지 않다는 걸요. 순종해야하는 걸 알지만 순종하는 삶은 사실 힘겹다는 사실을요. 아니, 사실 조금만 더 솔직해져보면 발견합니다. 실상은 별로 순종하고 싶지 않는다는 것을요.

철이는 어떻게 순이에게 사귀자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오랜 세월 동안 신학자들은 물론이고 철학자들은 논쟁했었습니다. 주의주의니 주지주의니 하면서요. 무지하게 어려운 논쟁들이 무지하게 오랜 기간 동안 무지하게 많은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졌고 무지하게 중요한 변화들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무지하게 어려우니 잠깐 심호흡을 하고 안 어려운 척하고 곁눈질하며 슬쩍 다가가봅시다. 주의주의란 건 ‘의지가 먼저다!’라는 입장입니다. 주지주의란 건 반대로 ‘아니야, 지식이 먼저지!’라는 입장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건 우리가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사랑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요?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우리 마음이 먼저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해야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아는 우리의 지식이 먼저일까요? 우리 행동을 좌우하는 건 뭘까요? 이 의문이 풀리면 바로 행동으로 돌입하면 될 것 같은데 말이죠!

스크린샷 2016-04-05 오후 12.51.40어떤 사람들은 지식이 먼저라고 생각해서 많이 제대로 알면 제대로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머리가 커져갈수록 이상하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을요. 어떤 사람들은 의지가 먼저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지식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죠. 그런데 역사적으로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는 엄청 똑똑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사랑은 고사하고 신앙 자체를 무너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맙니다. 올바른 앎 위에 세운 신앙도 참 중요한 것이죠. 그런데 말이죠. 인간의 행위가 지식과 의지만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우리 행동이 해결이 잘 안 됩니다. 철이가 옆집 순이한테 이제 썸은 그만타고 사귀자고 말하고 싶은데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그 말을 하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동기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지식일까요 의지일까요? 순이가 어떤 아이인지 내가 정말 잘 알고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사실과 순이가 보일 수 있는 모든 반응을 다 따져 알게 되면 난 사귀자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아니면 내 마음 속에 강력한 의지가 불타올라서 뜻을 세우고 당당하게 카톡을… 아니, 초인종을 누르면 되는 걸까요? 글쎄요. 오히려 이런 것 아닐까요?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의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한 가지가 있으니 바로 강력한 감정인 것이죠. 순이를 너무 좋아해서 이제는 결혼을 해야할 것 같으니 진지하게 교제하자고 말할 수 있는 감정이 필요한 것이죠. 그 감정이 철이를 몰아가고 움직입니다. 순이에게 문자도 하고 괜히 방과후(몰입도를 위해 퇴근후로 바꾸셔도 문제 없습니다) 집스크린샷 2016-04-05 오후 12.49.27으로 돌아가는 타이밍과 지나가는 길을 알아뒀다가 우연히 마주친 척도 하는 주도면밀함도 보이고 말이죠. 그리고 그 감정이 심지어 자신을 타협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절대로 바꿀 수 없다던 헤어스타일도 순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바꾸고, 절대로 먹을 수 없었던 조개구이도 순이가 좋아한다니까 같이 먹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지식과 의지를 동원해서 순이에게 다가가고 교제하려는 모습이 순이는 참 좋습니다.(그래서 둘이 사귀게 됐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생각하며 범하는 실수가 하나 있습니다. 마음과 행동을 하는 나 자신만 바라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왜 믿음과 순종에 집중할까요? 왜냐하면 믿음과 순종은 ‘내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주체는 ‘나’이기에, 내가 해야하는 믿음과 순종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내 가장 큰 목표가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22:37–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결코 사랑할 수 없었던 죄인에게 성령의 생명이 부은 바 되어서 성령을 통해 주입된 사랑으로 하나님을 드디어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하는 사람인가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과 구별해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특질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며, 사랑할 수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감정’이 우리 행동을 좌우한다고 했습니다만, 사실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아니 미움이나 복수심이나 증오심이 사람을 움직이지 않나요?” 라고 질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미움과 복수심과 증오심은 사랑의 대상인 그 사람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못하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반대할 때, 우리 안에 발생하는 일은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 우리를 움직입니다.

그러고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핵심 요체로서 사랑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네요. 왜냐하면 사랑은 내가 원한다고 되는게 아니니까요. 사랑은 많이 안다고, 뜻을 강하게 세운다고 되지 않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건 어쩌면 될지 모릅니다(사실 말이 그렇지 안 된다는 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사랑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에게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그 어떤 의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으면 신앙의 어떤 것도 시작된 것이 아니고, 신앙이 시작되었다하더라도 목적지가 없이 떠돌 뿐입니다. 제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은 제가 아무리 하트 모양을 그려도 ‘사랑’이라는 말을 생각해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하트 모양을 보고도 (물론 제가 몸개그하는 줄로 알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안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왜?’라는 질문은 참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 행동의 동기와 나아갈 방향 모두를 설명해주기 때문이죠.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을 잘 읽고, 기도도 잘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야말로 사도 바울이 경계했던 경건의 능력은 없고 경건의 모양만 갖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가기 힘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굳어버린 마음의 토지에 다시금 생명이 솟아오기 위해서 우리가 살펴야 할 곳은 내 심장과 폐부의 가장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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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될 이야기

am7htsQ-disney-castle-background이렇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디즈니 궁전이 나오며 불꽃이 터지는 해피엔딩을 선사하면 너무 좋겠는데 말입니다. “누가 모르나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걸? 안 되는 걸 그래서 어쩌란 겁니까?” 라는 질문이 드는 걸 막을 길이 없죠. 그래서 앞으로 계속되는 제 컬럼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다소 익숙하지만 생소한 주제들로 풀어가볼까 합니다. 그 익숙하지만 생소한 주제들이란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몇 차례 연재할 예정인 이 꼭지의 제목입니다. “아름다움과 삼위일체”

Over de auteur

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박사 과정 중 부르심을 받고 현재 시카고 베들레헴 교회 담임 목사로도 섬기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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