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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2주기] ‘기억’이라는 괴로움에 동참하십시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 12:15b)

아마 이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월호의 참사를 기억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한 본문일 것입니다. 본문은 수많은 세월호 유족들을 위한 좌담회나 행사의 포스터에 인용되었고, 2015년 4월에는 이 본문을 부제로 붙인 책도 출간되었으며, 수많은 젊은 목회자들의 설교에 인용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교회 밖 사람들에게도 일종의 격언처럼 유명한 말씀이 되었지요.

세월호 참사 2주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본문인 로마서 12장 15절 하반부에 대한 정성스러운 주해(성경본문에 대한 해석)적 묵상을 통하여 2주기를 기념하려고 합니다. 아마 뜬금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고통스러운 사건에 대한 당연한 반응은 연민과 동정이기에 응당 감정을 풍부히 표현하는 글이어야 하는데, 성경주해는 감성적이라기보다는 지나치게 이성적이며 합리적이기만 한 글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성경본문에 대한 주해적 묵상을 통해 세월호 2주년을 기념하기로 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향하여 사랑과 연민을 표현하는 이유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상식적이며 당연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도 응당 그래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주의 왕이신 분이 친히 내리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라는 명령이 있고, 그에 순종하기 때문에 이웃을 향해 손을 뻗어야 하는 윤리적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본문에 대한 순종으로 그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의 슬픔은 이성적 반성에 의해 더 깊어지고 견고해지기 때문입니다. 즉흥적이고 반사적인 표현만이 슬픔의 진정성을 확보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쩌면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슬픈 시(詩)인 예레미야 애가의 1, 2, 4장은 22연으로 된 히브리어 알파벳 이합체시(acrostic)입니다. 예레미야는 진정성 있는 슬픔을 간직함과 동시에 정교한 형식과 언어를 찾으며 꾸몄을 것이고, 이것은 그의 즉흥적인 슬픔이 이성적 반성에 의해 더 깊어지고 견고해지게 되었다는 것을[1] 의미하지요. 이처럼 정교한 이성적 고찰이 꼭 슬픔에 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슬픔을 깊고 풍부하게 하기도 하지요.

셋째, 본문을 더 깊이 탐구할 때에 우리는 본문의 더 풍성한 의미를 깨닫게 되고, 따라서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연민은 더 증폭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 이 본문이 단순히 슬픔과 동정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더불어 싸우라는 명령임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제가 한 주해가 정확하다면, 세월호 참사 때문에 슬퍼해야 하는 우리의 임무는 더 깊게 나아가서는 내재하는 죄와 싸우라는 주님의 명령이기도 한 것입니다.

위의 이유 때문에, 저는 본문을 주해적/신학적으로 더 깊이 고찰함으로, 세월호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슬픔을 더 깊게 파고, 진상규명을 원하는 유족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행동하며, 외면하고자 하는 우리의 잘못된 마음을 돌이키게 하려 합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다

물론 삶을 위한 권면이 로마서 12장 이후에만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2] 바울은 12장 직전까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베푸셨는지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 골몰합니다. 그리고 12장에 이르러 그는 일상생활 가운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복음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지에 대하여 말해주지요.[3] 이는 12:1–15:13의 한 섹션을 형성하는데, 바울은 이 섹션을 다음과 같은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간결하게 보여줍니다.[4]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삼아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자비는 1장부터 11장까지 끊임없이 설명한 내용,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에게 베푸신 것을 요약하는 단어일 것입니다.[5]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지금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은혜를 바탕으로 신자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12:1–15:13의 주제본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12:3이하부터 시작하는 ‘타인들과 신자들과의 관계’에[6] 대한 여러 권면들의 주제입니다. 즉, 12:3–12에 등장하는 공동체의 삶에 대한 권면들과 14–21절에 등장하는 적대적인 세상 가운데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권면들이 모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으로 요약되고 압축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입니다.

따라서 그 명령들 한가운데 있는 본문인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명령은 1절의 예배 명령이 포괄하고 있는 각론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웁니다. 그러므로 세월호의 고통에 직면하여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는 행동을 반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을 넘어, 반-하나님적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명령은 단순히 마음으로 슬퍼하고 괴로워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12장 1절에서 바울은 ‘몸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제사는 구약에서 있었던 것과 같이 동물의 희생제사를 드리듯 몸으로 제사를 드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라는 단어는 중요한데, 이는 단순히 정신적인 예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즉 행동의 모습으로 예배하라는 명령이지요.[7] 그리고 그 가장 강력한 증거는 3절 이하가 모두 실질적 행동들을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는 ‘교회 밖에 있는’ 자들과 더불어 울라

그렇다면 본문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어떤 자들’과 더불어서 함께 슬퍼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까? 달리 말하자면, 여기서의 ‘우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14절이 명백하게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을 의미하므로 15절 역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하며[8] 어떤 사람들은 12장이 바울의 ‘비교적 독립적인’ 여러 격언을 한데 엮어서 쓴 것이기에 시선을 교회 공동체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 기독교인 내의 형제들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합니다.[9]

하지만 바울은 지금 12:1–2의 거대주제 아래에서 논리와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지금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14절). 그리고 뿐만 아니라 그들이(박해하는 외인들) 즐거워하거든 같이 즐거워하고 슬퍼하거든 함께 슬퍼하라.”고 말하며 박해하는 외인들을 향한 축복이 진심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저주의 말을 뱉지 않고 축복을 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기뻐할 때나 슬퍼할 때 공감하지 못한다면 진심으로 축복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지금 일차적으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웃고 울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고전 12:26에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라고도 말하기 때문에 교회 내의 회중과 더불어 웃고 우는 일이 배제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10] 특히나 우리가 진심을 쏟기 어려운 사람들, 외인들을 향하여도 우리의 감정이 진실이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안산시에 살고 있지 않고 같은 교회를 다니지도 않는 유가족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진심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바울이 아마도 세상 모든 인간들과 더불어 공감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쁨과 슬픔이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랑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15절 본문의 문맥은 언급했던 대로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입니다(14절). 만일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공감해야 한다면, 급작스럽게 가족을 잃은 고통을 당한 유가족들을 향한 우리의 감정은 얼마나 더 진심이어야 하겠습니까?

우는 자들과 우는 것은 우리의 죄를 향한 싸움이다

또한, 요한 크리소스톰은 본문에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명령이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명령보다 앞선 것에 대하여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합니다.[11] 그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더 어려운 명령이기 때문에 앞에 왔다고 말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우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시기심이 생기기 때문에 함께 즐거워하지 못하게 되지요. 그래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는 자들과 더불어 우는 것도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우는 사람들을 볼 때 일시적으로 함께 웁니다. 왜냐하면 그 외에 달리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공감이 진실이 아닐 때 슬픔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슬픔이라는 감정도 굉장히 크게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 노동이기 때문이지요.

세월호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마음은, 흡사 영화 “귀향”을 보기가 꺼려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돈을 주고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즐겁기를 원하지 고통스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피해자들의 고통스러운 처지에 대하여는 이해하지만, 그리고 그들의 여한이 빨리 풀리기를 바라지만 다시 괴롭지는 않고 싶은 것이지요. 이미 한 번 눈물을 흘리고 괴로웠던 일을, 다시 기억하며 또 괴로움에 빠져드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무심함과 무정함을 부인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싸움입니다.

즉 크리소스톰과는 달리, 저는 기쁨과 슬픔의 공감 모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어떤 형제의 행복을 기뻐하지 않는 것은 시기하는 것이고, 어떤 형제의 불행에 대하여 슬퍼하지 않는 것은 비인간적이라는 것”[12]이라고 말하며 슬픔과 기쁨에의 동참이 사실상 인간 내면의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기쁨의 공감은 시기라는 내면의 죄와 싸워야 가능하고, 슬픔의 공감은 무심함이라는 내면의 죄와 싸워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죄와의 싸움은 사랑을 가능하게 합니다. 즉, 순수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지요. 그래서 더글라스 무는 자신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함께하는 신자들의 즐거움에 시기나 질투 없이 동참하게 해 줄 것이고, 이와 같이 진실한 사랑은 또한 우리를…. 친밀하게 그들의 슬픔이 우리의 슬픔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해줄 것이다.”[13]

제발, ‘기억’이라는 슬픔에 동참하라

저는 앞서 12:15의 명령이 12:1의 예배 명령에 종속되는 명령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웁니다. 그런데 12:1의 예배 명령은 ‘파라칼로’(Παρακαλῶ)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톰 라이트는 이 단어가 “제발 ~해 주시겠습니까?”에서처럼 ‘제발’의 뜻을 가진 단어라고 말합니다.[14] 따라서 12:1은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제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렇다면 이 ‘제발’은 12:15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바울은 같은 간절함과 열심을 가지고 명령합니다. “제발, 내가 호소하노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는 2년이 지났지만, 유가족들은 아직도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죽었고 왜 구조되지 못했는지에 대한 진실이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났다고 그들의 슬픔이 줄어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난 2년간의 분노와 억울함이 덧씌워져 깊고 견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통곡과 눈물은 줄었을지 모르나, 슬픔의 깊이는 더해졌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우는 자들로 더불어 운다는 것은, 이토록 슬퍼하는 이웃을 대하며 깊고 풍부하게, 오래도록 함께 운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것은 울고 있을 때 잠시 함께 눈물을 흘려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슬픔을 진하게 공감하여 오랫동안 함께 슬픔의 마음으로 행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무심함이라는 내적인 죄와 싸우는 지난한 성화의 과정을 동반하며, 따라서 당연히 은혜를 베푸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형제자매들이여, 제발 기억의 괴로움에서 빠져나오지 말아주십시오. 오랫동안 기억하고 생각하며 행동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우리의 이웃이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여 괴로울 때, 그들의 시선이 궁극적 위로이신 그리스도를 향할 때까지 ‘기억’이라는 괴로움을 피하지 맙시다.

참고문헌

토마스 R. 슈라이너, 배용덕역, BECNT 로마서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톰 라이트, 장용량, 최현만역, 로마서 (서울: 에클레시아북스, 2014)

C. E. B. Cranfield,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London; T&T Clark International, 2004)

Colin G. Kruse, Paul’s Letter to the Romans, ed. D. A. Carson, The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Eerdmans, 2012)

James D. G. Dunn, Romans 9–16, vol. 38B,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Incorporated, 1998)

John Calvin and John Owen, Commentary on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Romans (Bellingham, WA: Logos Bible Software, 2010)

John Chrysostom, Homilies of St. John Chrysostom, Archbishop of Constantinople, on the Epistle of St. Paul to the Romans, in Saint Chrysostom: Homilies on the Acts of the Apostles and the Epistle to the Romans, ed. Philip Schaff, trans. J. B. Morris, W. H. Simcox, and George B. Stevens, vol. 11, NPNF, First Series (New York: Christian Literature Company, 1889)

John Piper, Brothers, We Are Not Professionals: A Plea to Pastors for Radical Ministry (Nashville, TN: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2)

John R. W. Stott, The Message of Romans: God’s Good News for the World, The Bible Speaks Today (Leicester, Englan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1)

Joseph A. Fitzmyer S.J., Roman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vol. 33, Anchor Yale Bible (New Haven;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8), 655.

각주


  1. John Piper, p. 146.  ↩

  2. 슈라이너., p. 756  ↩

  3. Moo., p. 748  ↩

  4. Moo., p. 749  ↩

  5. 톰 라이트., p. 543  ↩

  6. Kruse, p. 461.  ↩

  7. 존 머리, p. 629  ↩

  8. Cranfield, Wilson, Wright,  ↩

  9. 특히, Moo. 그리고 Schreiner를 보라. 특히 본문이 시락서 7:34을 참조한 것이라는 Fitzmyer의 의견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

  10. 이러한 이유로, Dunn은 교회 안과 밖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포함한다고 본다.  ↩

  11. John Chrysostom, NPNF, p. 507  ↩

  12. John Calvin, p. 469–470.  ↩

  13. Moo. p. 782  ↩

  14. 톰 라이트. p. 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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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진짜배기 잉여 필자. 다른 필진들과는 다르게 공식적인 '저자'다. 담임 목회자이자 두 딸의 아버지. 잉여롭고 싶은데 찾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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