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서평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책은 서평을 쓰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가끔 로마서를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말씀을 설명하고 풀어내고 설교하는 것이 오히려 본문의 의미를 잘 살리지 못하니,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비한다는 것이 다소 과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을 읽고 그와 비슷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읽는 것 자체는 그리 시간이 많이 들지 않았으나 서평을 쓰는 일은 꽤 많은 시간과 고민이 들었습니다. 서평에 별도의 제목을 달 필요가 없는 책입니다. 책 제목 그대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 사실을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살았고, 그로 인하여 살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살게 될 것을 이야기합니다. 너무나도 귀하고 영광스럽지만, 또 동시에 가볍게 여기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마치 당연한 듯이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닌 그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성경이 말하는 바로 그 복음의 본질을 풀어 설명해줍니다. 저자의 책을 읽었지만, 마음은 성경을 주욱 읽은 듯하며, 복음의 은혜로 충만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은 그저 ‘이 책을 사서 읽으십시오.’ 한 줄이면 될 것 같습니다.
어느덧 낯설어진 그리스도
사역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아주 의아한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교회에서, 그리고 신자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낯설어지는 일입니다. 성도가 교회를 다닌 지도 오래되었고 교회 역시 많은 일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낯설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무엇인가가 놓여 있습니다. 신자 개인은 자신의 활동과 의지, 사람들과의 사귐, 그리고 출처도 불분명한 자기 계발에 놓여있고, 교회는 그러한 신자 개인의 요구와 자의식을 지지하기 위한 프로그램과 공부들로 채워집니다. 많은 성도와 많은 사역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에게도, 교회에게도 점점 낯설어지고 희미해져갑니다. 그래서 책을 펴게 되면 처음 보게 되는 한 문장, ‘기독교는 바로 그리스도다.’라는 이 한 줄이 마음을 때립니다. 영광스럽고 놀라운 선언인 동시에 당연한 말이지만, 이 말이야말로 교회와 신자가 들어야 하는 말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집착하는 저자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주제만을 집요하게 풀어냅니다. 그의 전작들에서도 빛을 발했던 그의 장점들이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납니다. 저자는 오늘날 꼭 필요하고 귀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가장 좋은 점은 그가 성경에 집착한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마치 성경의 인용과 지지가 없으면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겠다는 듯이 성경을 인용합니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제로 꿰어 읽은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기독론’에 관한 책입니다. 기독론 역시 삼위일체만큼이나 그 안에 복잡하고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글과 책이 쓰여졌습니다. 사도신경에 기독론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에 대한 답이 곧 정통과 이단을 나누는 기준이 됩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신앙고백서들과 요리문답으로 기독론을 잘 정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늘 마음 한편에 남았던 아쉬움은 그렇게 쓰여진 책들과 신앙고백서들의 성경 인용이었습니다. 항상 성경은 각주로만 남아 있고, 그 내용들 자체를 풀어서 설명하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이런 작업은 읽는 사람들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누군가 단순히 성경의 인용에서 그치지 않고 성경의 내용 자체를 풀어 기독론으로 정리해주기를 바랐습니다. 물론 그러한 책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몇몇 신학자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그러한 유익을 주는 책들이 이미 있고, 청교도들의 저작이 가지는 가장 큰 유익과 가치 역시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저자는 성경으로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이 점에서 분명히 청교도의 뒤를 잇습니다. 책 중간 중간에 청교도의 글들을 인용해서만이 아닙니다. 사실 수많은 신학용어들과 복잡한 논리로 지쳐있는 자들에게 이 점은 큰 유익과 위로가 됩니다. 저자의 글을 애매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신학자가 보기에는 쉽고 성도들이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이 책은 애매한 것이 아니라 양쪽에게 다 유익을 줍니다. 신학 용어와 복잡한 논리로 지쳐있는 자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명료한 복음의 내용을 보게하고, 여전히 신학 용어들과 신학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전유물이라고 여기는 분들에게는 너무나 쉽고 분명하게 가장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신학을 설명해 줍니다. 어려운 언어로 점철된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언어를 성경의 아름답고 쉬우며 은혜로운 표현으로 바꾸어주고, 애매하고 흐릿한 성도들의 언어를 분명하고 정확한 말로 바꾸어 줍니다.
성경을 통해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너무나 당연하고 분명한 방법으로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인용된 성경의 구절들의 풍성함만이 아닙니다. 단순한 성구 인용만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풀어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조망하게 됩니다. 곳곳에 인용되고 해설된 성경 본문은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한 곳이 한 두군데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은 저의 설교 사역 자체를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책을 읽으면서 설교 아이디어를 얻었을 뿐 아니라 설교 준비에 대한 직접적인 교훈들도 많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이 점은 이 저자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이런 면에 있어 저는 개인적으로 현대의 많은 저자들 중 마이클 리브스가 끼치는 영향과 유익은 어느 누구보다 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1년 동안 마태복음을 강해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강해하며 제 자신이 먼저 큰 은혜를 누립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가 무엇을 하셨는가?”라는 이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이러한 중에 읽게 된 이 책은 제게 더욱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강해하면서 한 번씩 찾아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들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살펴 볼 때에 성경이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설교의 주인공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로 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오기 위해 가졌던 마음, 열심, 수고와 헌신,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움과 덕’을 선전하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목회’라는 현실적인 요구 앞에 성도들에게 ‘도전’을 주고 그들의 ‘헌신’과 ‘열심’을 그렇게라도 끌어내고 싶은 욕심이 일어납니다.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 기록해 놓은 복음서를 읽으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심은 끝이 없고 늘 설교를 어지럽힙니다. 눈은 언제나 ‘사람들의 아름다움과 덕’을 먼저 찾게 되고 그것이 마치 내게 있는양 이야기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덕’과 ‘사람의 아름다움과 덕’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이것이 고민할 문제도 아니요, 성경이 말하는 바를 좇으면 너무나도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눈과 손은 사람의 그것을 향합니다. 이런 모습은 바리새인들의 모습 아니었던가요. 제 자신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덕’을 제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알아도 매우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것이 ‘신비한 연합’이라 하니 정말로 ‘신비한 미지의 영역’으로 묻어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성경의 교훈을 풀어내며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그의 선하신 덕을 눈 앞에 펼쳐 보여줍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귀한지, 그것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능력이 있는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죄와 구원과 구원 받은 신자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되고 그것을 감당할만한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실제’를 보여줍니다. ‘기독론’이라는 신학의 아름다운 보물을 그 어떤 설교와 교훈보다 실제적인 살아있는 신앙의 삶으로 보여줍니다.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그 길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특별히 3장과 4장을 읽으며 깊은 한숨을 쉬기도, 탄식을 내뱉기도 했습니다. 신자의 믿음과 구원, 삶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알고 있었고, 배웠고, 심지어 가르치기까지 했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영광, 그 능력의 근원에 대해서는 그저 정보로만 전달했지 그것이 어떻게 내 삶 가운데 실체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묵상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산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며 그와 연합되어 있다.’라는 신학적 진술은 있었지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자신의 아들됨을 나누신다.’라는 그 놀라운 영광과 우리가 감히 가까이 갈 수조차 없는 사실이라는 점을 마음으로 깨닫고 삶에서 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 영광과 거룩을 우리에게 풀어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무엇을 어떻게 감당하셨는지, 그리고 지금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요 능력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분명히 딱딱한 신학 용어이고 어려운 표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들이 가리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덕이며, 내 삶입니다.
삼위일체에서 시작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그가 무엇을 행하셨는가?’라는 답을 발견하고 그것을 나누는 일만큼 복되고 감사한 것이 없습니다. 복음서가 말하며, 모든 성경이 말하는 이 주제를 나누고 확인하는 것만큼 목사에게 큰 기쁨과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이클 리브스의 이 책이 바로 그 답을 우리에게 잘 설명해 줍니다.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을 저자는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책의 시작점은 그의 전작인 선하신 하나님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전에 선하신 하나님을 먼저 읽으시길 추천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는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베푸신 선함,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은혜와 사랑의 실체가 ‘구원’이기에, 당연히 우리는 그 구원을 우리 안에 실제로 이루신 그리스도를 상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이 땅 위에서 살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또한 우리가 묵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신부인 교회가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그 안에 안식을 누리는 일만큼 놀라운 일이 어디에있겠습니까? 영원 전에 이루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과 역사 가운데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그리고 지금 이 시간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총, 이 모든 은혜의 실재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은 가장 고귀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자 모든 설교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복음 전도이자 설교입니다.
아쉬운 점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제 개인적으로는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지극히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109페이지에 있는 ‘아빠!’라는 표현입니다. 물론 번역자는 111페이지에 이 ‘아빠’는 ‘Abba’라는 아람어의 발음임을 표시해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이 단어를 모두 ‘아빠’로 발음을 기록하기에 번역자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개혁한글에서는 모두 ‘아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말로 ‘아빠’보다는 ‘아버지’를 의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빠’라는 단어는 상당히 오해를 불러일으킬만 합니다. ‘Abba’라는 단어는 아버지(father)라는 의미이지, 아빠(daddy)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말과 원문 사이의 혼돈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원문의 발음이 ‘아빠’이지 의미는 ‘아버지’이니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가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아빠’로 음가가 쓰일 때 우리는 ‘아빠’(daddy)로, 그저 친근하고 편안한 이미지로만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즉, 원문의 발음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혼돈을 이용한 듯한 의미의 약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번역자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러한 오해를 다소 불러일으킬만합니다. 특별히 111페이지 맨 마지막 줄에 있는 “아빠!”는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원문의 의미를 뛰어 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라고 번역되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당장 반드시 이 책을 읽으십시오
이 글을 시작하며 ‘이 책을 읽으십시오’라는 이 한 줄이 서평으로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몇 단어를 더한다면, ‘이 책을 당장 그리고 반드시 읽으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서평을 쓸 때에 책의 내용은 그렇게 많이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 내용은 읽는 분들이 직접 읽고 이해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책에 대하여 쓸 내용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신학적인 평가를 하는 것도 아니고, 편집이나 디자인을 잘 아는 사람도 아니니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책을 읽으며 나눌 수 있는 내용은 ‘이 책이 내 삶과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느냐’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은 ‘서평’이지만, ‘독후감’ 비슷하기도 하고, 편하게 쓰는 에세이 같기도 합니다(바로 지금 그렇습니다). 이 책의 경우 더욱 그러합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신학적 내용과 설명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자가 사람의 감정을 흥분시키거나 고양시켜 어떤 결단을 이끌어내는 그런 글을 쓰는 분도 아닙니다. 사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건조한 신학 내용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저자 역시 책에서 쓴 것과 같이 이 책을 읽는 일은 ‘얼마나 흥분되는지 모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자가 ‘팔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듯이 그가 쓴 이 글을 읽는 동안에 저 역시도 흥분과 소름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오사 우리를 다스리시고 구원하시며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 외에 어떤 소식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흥분시키며 가슴을 뛰게 만들며 전율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저도 모르게 이 소식을 무덤덤하게 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무뎌진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을 다시 일으켜주고 그 마음을 보게 해준 것만으로도 저자에게 깊이 감사합니다. 어렵고 건조한 신학 내용을 다루면서도 어떤 설교와 글들보다도 흥분하게 하고 가슴 뛰게 한 것은 그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복음 안에 있는 우리의 생명을 우리가 맛 보고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이 말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말인지요!) 여러분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오늘 당장 반드시 이 책을 읽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