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가 로버트 루이스 윌켄이라는 교회사가의 저서[1]를 통해 소개받은 한 인물을 소개할까 합니다. 바로 힐라리우스라는 인물입니다. 왜 이 할아버지를 소개해드리냐면, 이 분이 어쩌다 초대교회는 유대인들에게서 물려받은 구약의 유일하신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게 되었는지를 소상하게 고찰해서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겠쥬?
힐라리우스 할아버지, 반갑습니다
일단 초면에는 얼굴부터 트는 게 좋겠죠. 이렇게 생기신 분입니다. 진짜 고생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아니면 고생한 것처럼 보이는 게 경건해 보일 것 같아서 저렇게 마르게 그렸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천국가서 확인해보도록 합시다. 이 분은 315년 갈리아 푸아티에의(현재 프랑스 서부) 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철저한 라틴어 교육을 받고 부유한 집안이라면 으레 누렸을 여러 혜택들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지난 컬럼에서 소개해드렸던 니케아 신경이 처음 작성되었던 니케아 공의회가 325년에 열렸으니까 힐라리우스가 10살 때네요. 역시 인재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기보다 영적인 삶을 추구하고자 했습니다. 출애굽기 3:14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 말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는 말씀을 듣고 강력하게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세례를 받아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태어난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아무래도 삼위일체 논쟁이 여전히 뜨거웠습니다.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고 니케아 신경이 공인되었다 할지라도 그게 무슨 국가 권력처럼 억압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논쟁은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이미 태어난 곳이었던 푸아티에의 주교로 섬기고 있었던 힐리리우스는 정치적으로 밀려서 4년 동안 추방되어 동방 학자들이랑 친하게 지내게 됩니다. (동방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로마 쪽 교회를 의미합니다. 서방은 라틴어를 썼었고요. 신학적 전통도 조금씩 차이가 있었죠.) 그 동안 이분이 「삼위일체론」이라는 책을 집필하시게 됩니다. 이 책에서 제가 이 분을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은 이유로 언급했던 ‘어쩌다 초대교회는 구약의 유일하신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독하지 않다
힐라리우스는 아주 멋드러지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고독하지 않다!” 하지만 그가 이미 이런 결론을 내려놓고 성경을 읽고 세상을 바라보며 신학을 정립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진지한 고민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는 출애굽기 3:14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설명하는 구절을 보고 충격을 받아 회심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탐구해나가는 과정 가운데 그는 “하나님을 먼저 창조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통해 알았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알게 된 후에야 하나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2]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은 고독하지 않다’라는 결론을 내린 과정을 제 나름의 논리적 흐름을 따라 재배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 중 하나는 바로 의심 많은 도마의 고백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6–28).”
생각 많은 힐라리우스 할아버지는 도마 고백의 표현과 이 고백을 한 시점에 주목했습니다. 감히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그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천장을 뜯고 지붕에서 달아내려져 예수님 눈 앞에 나타난 중풍병자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를 향해 예수님께서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고 말씀하신 것만으로도 당시 함께 자리에 있던 이스라엘 지도자들 마음 속에 ‘신성 모독이로다!(막2:7)’라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직접 예수님께 붙히는 것은 어마어마한 생각의 전환이 있지 않고는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도마를 포함해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 목숨 걸고 복음을 전했던 첫 용사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성경은 도마의 고백만을 직접 기록하고 있으나, 다른 사도들과 제자들의 삶은 그들이 도마의 고백에 전적으로 동의했음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아니고, 쉽게 말해서 다신교를 믿는 이들도 아니고 유일한 하나님을 목숨 걸고 고백했던 유대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에게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힐라리우스 할아버지는 유대인들이 기도문 쉐마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어떻게 도마는 쉐마를 가슴 깊이 동의하고 믿으면서 예수님을 동일하게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이제 도마가 이 위대한 고백을 한 시점이 중요해집니다. 언뜻 언제 도마가 이 고백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분들은 이 말씀이 요한복음 20장에 등장한다는 사실만 봐도 감이 좀 오실 겁니다. 상당히 이야기가 진행된 후인 복음서 뒷부분에 등장하는 고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성경을 꺼내 들춰보시면 이내 발견하게 됩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이 고백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도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말씀과 이적과 행동으로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 보낸 자, 또는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상하게 그 때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형에 처해지실 때 다 도망쳤고, 오늘 이 위대한 고백의 주인공인 도마는 심지어 동료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 때조차 자기 눈으로 보아야만 인정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상황은 180도 바뀝니다. 도마의 위대한 고백 전과 후를 가르는 가장 큰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 책을 쓴 (힐라리우스보다는 많이 젊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할아버지인) 윌켄 할아버지는 이렇게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십니다.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나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옆구리에 손을 대라고 했을 때, 도마가 말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사람들은 ‘신기한데!’라고 말하지 않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3]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도마의 고백 속에 가장 핵심적인 단어인 ‘주’와 ‘하나님’은 모두 쉐마에 등장하는 단어들입니다. 유일한 여호와 하나님, 세상의 창조주이시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한 분이시며 모세를 포함한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분이시고 구약 성경을 선물해주신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주’와 ‘하나님’이라는 단어 속에 압축하고 압축하여 혀끝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고백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터져나온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너무나 중요하지만 심히 자주 잊고 살아가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냥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을 진짜 그리스도로 인정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이미 부활 전에 베드로가 인정했듯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실 수 있는지에 대한, 어떻게 둘이 하나이고 하나가 둘일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은 할 겨를도 없었을 겁니다. 힐라리우스의 표현에 따르면 도마는 부활을 통해서 “신앙의 모든 신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4]
힐라리우스 할아버지는 이렇게 한 하나님을 고백하던 유대인들의 놀라운 변화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풍성하고 놀랍게 변화시켜주었는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컬럼에서 제가 강조했듯이 삼위일체라는 이상한 교리를 먼저 만들고 그와 다른 교리들을 배척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리신 방식을 성경을 통해 고찰한 결과로 하나님의 복수성(한 분 이상이라는 의미에서)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쓴 윌켄 할아버지는 힐라리우스와 그의 책 「삼위일체론」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에 대한 힐라리우스의 책은 그리스도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신적 신비’를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육체를 통해서다.”[5]
이제 하나님을 머리 둘(또는 셋) 달린 괴물로 만들거나, 기독교를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다신교로 만들지 않고도 하나님은 자기 안에 관계성을 지니신 분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힐라리우스는 자신있게 외칩니다. “하나님은 고독하지 않다!”
우리 신앙의 초석,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
예수님의 부활과 삼위일체를 연관시켜 생각해보신 적, 아마 별로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또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서점에 가서 성경을 사면 구약과 신약이 붙어있었습니다. 구약만 보고 마지막에 ‘to be continued(다음 회에 계속)’라고 써놓은 것을 보고(사실 그렇게 써있지도 않고 말이죠) 발을 동동구르며 2권 신약이 언제 출간될 지 애태우며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2권인 신약 먼저 읽고 답을 다 알았다고 생각해서 1권 구약을 등한시 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죠. 그러다보니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동일한 분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합니다. 우리가 구입할 때 성경은 언제나 한 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의 등장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를 우리에게 가져왔는지 알게 되는 것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켜주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완전히 다른 것 같은데, 이상하게 붙혀놓으니 원래 하나였던 것 같은 구약과 신약, 그 해석의 열쇠는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신구약을 연결시켜주는 강력접착제이시죠. 특히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구약 전체를 통해 알아왔던 하나님의 놀라운 자기 계시를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그래서 지난 컬럼에서 제가 “사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고민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요.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사실 삼위일체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겁니다.”라고 말했었던 것이죠.
힐라리우스 할아버지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을 얼마나 놀랍도록 선명하게 드러내는지 맛을 조금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더 예수님을 사랑하고 알아가고 싶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