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담을 하지 않으면서 배우자에게 제 갈등문제를 이야기할 방법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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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3일

 

존 파이퍼 목사

인터뷰 주제: 그리스도인의 삶

즐거운 금요일, 존 파이퍼 목사님께 물어보세요 코너로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카메룬에 계신 청취자 레이첼씨가 편지로 주신 질문을 나누겠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 우리네 삶에서 누구나 대인관계에서 소통과 갈등 문제를 안고 있으며 상대가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가릴 것 없이 힘겨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자신이 겪는 갈등을, 갈등관계에 놓인 상대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분석하여 따지다 보면 비방과 험담으로 흐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배우자와 분석하여 따지는 것은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비방과 험담일까요? 파이퍼 목사님, 예를 들어 목사님이 교회 장로님과 소통이나 관계 문제가 있는 경우, 집에서 부인 노엘과 내밀히 논의하는 것이 괜찮은지요? 그것이 도움이 되는지요?”

아내와 내밀히 논의하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지요–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이 가득한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아마도 가장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은 허락을 받는 문제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화나 갈등관계에 있는 상대방에게 그저 “제 배우자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해도 될까요?”라고 허락을 구하시면 됩니다. 문제 전체가 갈등과 불화에 관한 것이므로 허락을 구한다는 것이 거북스러운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리할 때, 여러분은 어쩌면 놀랄지도 모릅니다. 이는 여러분이 원하는 누군가를 찾아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는 것을 당연시하지 않고 도리어 허락을 구한 것이기에, 상대방으로서는 자신이 존중받는다고 느낄 법한 까닭입니다. 따라서 그런 요청은 관계회복의 첫 발을 내딛는데 제법 도움이 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허락을 받았다면 여러분의 배우자와 적어도 그 상황을 이야기할 가능성을 고려하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배우자와 논의하는 것이 갈등관계를 최대한 회복시키는–당면한 갈등만이 아니라 거기에 연관될 만한 다른 이들까지–역할을 과연 할 것인가?” (Tweet)

그러나 가능성이 생겼다고 해서 아무 거칠 것 없이 이야기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로 단순화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다른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둘째로 고려하는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해야 유익하며 무엇을 이야기해야 적절한지를 분별하려고 한다면, 이 과정에서 여러분이 속속들이 잘 알고 있어야 하는 두 사람이 있는데, 바로 여러분 자신과 배우자인 것입니다.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다른 모든 면에서 허락을 받아서 배우자와 무엇인가를 나눈다고 해도 그리하는 여러분의 태도가 죄악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야고보서 4:11에서 “서로 비방하지 말라”라고 말씀하듯 타인, 특히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를 두고 성경에 아주 많은 경고가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20에서는 사도 바울이 교회 안에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합니다.

이들 구절이 성경에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 이유가, 우리에게는 남의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때 우리의 태도야말로 진짜 문제임을 경고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까닭은, 나눠도 좋다고 허락을 받은 것이라 해도 나누지 말아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순전하지 못한 동기나, 질투심이나, 지나친 분노나, 죄가 되는 두려움과 불안감이나, 복수심에 이끌려 나누려는 것이라면, 또는 미묘한 즐거움–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특히 우리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나쁜 소식이나 미심쩍은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는 데서 느끼는 그 미묘한 즐거움 때문에 소식을 나누려는 것이라면, 나눠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것일지라도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 안에 내재하는 그 같은 갈망 언저리에 선하지 않은 것이 자리하고 있는 탓입니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지침을 기억하십시오. 스스로를 시험하라. 자기자신을 알라. 자신 안에 있는 이기적인 동기는 어떤 것이든 소멸시킨 뒤에 배우자와 문제를 이야기하라.

나누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 또는 반대로 상대방이 나누는 것을 들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올바로 결정하기 위하여 아주 잘 알고 있어야 하는 다른 한 사람은, 여러분의 배우자입니다. 내가 배우자를 충동질하는 것은 아닌가–여기서 제 아내 노엘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므로 아내라고 하겠습니다–내가 아내의 마음을 충동질하여 노엽게 하거나 적의를 품게 하거나 두렵게 하는 것은 아닌가? 배우자의 정서적 기질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배우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까? 배우자는 관계 갈등 중에 자칫 말려들 수도 있는 어떤 류의 죄에 취약한가요? 아니면 우리에게 적절하게 조언해줄 수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해칠 상황 속으로는 휩쓸리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가요? 따라서 배우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상황을 나눠야 하는가의 여부에, 그리고 나눠야 한다면 무엇을 나누고 어떻게 나눠야 하는가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생각해 볼 다른 성경적 지침–이 질문을 고려하건대, 우리에게 지침이 될 만한 가장 유익한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하는–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태복음 18:15–17을 생각하고 있으며 마태복음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라. 이 말씀의 전체 요지는 무엇입니까? 제 질문이 그것입니다. 이 접근방식의 요지는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 마태복음 18장의 전체 요지는, 관계 속에서 지은 죄나 관계의 파국을 가급적 당사자에 국한해서 다루는 방식이, 관련 당사자들의 관계가 최대한 회복되는데 유익하리라는 말씀인 듯 합니다. 제가 얻은 교훈이 그것입니다.

이에 대한 적용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일 터입니다. 배우자에게 털어놓는 것이 갈등관계를 최대한–당면한 갈등 뿐 아니라 그에 연관될 만한 다른 사람들까지–회복하게 하는데 과연 기여할 것인가? 다른 방식으로 관계회복이 가능하다면 여러분은 구태여 알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지도록 하여 고통이나 갈등이 배로 커지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원칙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만약 다른 모든 면에서 문제를 공유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면 그때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이러는 것이 과연 갈등의 골을 메워줄 지혜를 원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저 상처를 달래고 있는 것인가? 내버려 둬야 할 상처의 딱지를 긁는 것은 아닌가? 내가 상처를 치료하면서 만족감 같은 것을 찾는 것은 아닌가, 그 결과 나뿐 아니라 배우자도 그 같은 죄를 짓게 하는 위험에 빠트리는 것은 아닌가?

최근 저의 삶에서 두드러진 성경 구절, 다시 말해서 동기와 가능한 행동을 걸러낼 일종의 “파이퍼 체Piper sieve”로 기능하는 두 가지 성경 구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를 언급하는 것은 이들 성경구절이 제게 무척이나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베드로전서 3:8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이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이는 놀라운 말씀으로서 같이함, 동정, 사랑, 불쌍히 여김, 겸손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따지면서 그것을 가는 체sieve로 다시 치십시오. 이 테스트를 통해서 해야 할 말을 걸러내십시오. 베드로전서 말씀에 비추어볼 때 여러분이 하려는 말은 합당합니까?

다른 하나는 야고보서 3:17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여기 그 말씀들이 다시 등장합니다–“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이것은 한데 묶어놓은 또 다른 놀라운 말씀으로서 제가 말하려는 바가 순전한가를 가늠하는 놀라운 시금석 역할을 합니다. 거기에 화평이 있는가? 관용이 있는가? 양순함이 있는가? 거기에 긍휼이 있는가? 편견이 없는가? 이것은 진정 아연실색할 만큼 놀라운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특별히 이들 두 성경구절은 최근에 제가 사람들을 대하는 데서 체로 기능하였는데, 저의 죄를 자각하게 하였으며 아주 도움이 되었던 구절들입니다.

그러므로 첫머리에서 청취자가 주신 질문에 답하자면–질문의 일부는 제가 아내와 더불어 어떻게 대처했는가라고 생각합니다–저의 33년 목회사역 가운데 한 편으로 제가 교회 문제나 개인적 문제를 두고 아내와 대화를 나눈 상황이 많이 있었고, 다른 한 편으로 그러지 않은 상황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앞에서 말씀드린 기준을 적용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내가 아내의 영혼을 위험에 빠트리는 것은 아닌가? 아내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니와 아마 내게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방식으로 아내에게 짐을 지워 아내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선하지 않은 동기를 걸러냄으로써 베드로전서 3:8과 야고보서 3:17 말씀에 순종하였는가? 이런 관점에서 토니, 저는 다만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주님, 주께서는 제가 이 기준에서 몇 차례나 성공하였으며, 몇 차례나 실패하였는지를 아십니다.

Over de auteur

주성

번역자를 꿈꾸던 시절 존 파이퍼 목사의 설교를 만나 그의 설교와 더불어 종교개혁 전통을 따르는 신앙 선배들의 유산을 어느덧 함께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현재 기업의 기술문서를 번역하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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