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by Bahman Farzad @Flikr
지난 글에서는 힐라리우스라는 분을 통해 어떻게 초대교회가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담없이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삼위일체와 아름다움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제가 전달하고자 노력했던 것은 삼위일체라는 교리는 인간의 머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지난 달까지 우리가 살펴본 모든 내용은 사실상 저의 이런 전제와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글들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이어질 두어 편의 글을 통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의 삶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시리즈의 매 편 글을 쓸 때마다 마음에 부담이 한가득입니다. 조금이라도 ‘삐끗’해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전달해드릴까봐 두렵고, 지나치게 어렵게 전달할까봐 걱정되기 때문이지요. 오늘도 키보드에 손을 올리기 전, 잠깐 기도하고 시작해봅니다.
왜 우리는 ‘하나’를 갈구할까요?
‘하나’라는 개념은 참 신비합니다. ‘하나’는 숫자로는 1이죠. 한 개체를 의미합니다. 강아지 한 마리, 핸드폰 한 개, 머리카락 한 가닥과 같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는 여러 개체가 모여 이룬 집합체 또는 공동체를 일컬을 때도 사용됩니다. 한 가족, 한 나라, 한 부부처럼 말이죠.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하나’는 줄곧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아닌 척하지만 각자 속해 있는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되기를 모두들 바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선물을 주고받고, 식사를 함께 하고,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개성이 뚜렷한 독립적 개체들이 어떻게든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묘한 믿음을 가슴 깊은 곳에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유비와 관우와 장비는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같으리라고 맹세하며 도원결의를 맺어 ‘하나’가 됩니다. 심지어 ‘어머니 지구’라는 표현을 쓰며 인격체가 아닌 자연에 인격성을 부여해서라도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이기도 하죠. 그런 면에서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자연과 소통할 수 있는 나비족의 촉수는 자연과 하나되고자 하는 인간의 오래된 염원을 눈에 보이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대 측면도 생각해볼까요? 요즘 다양한 혐오 발언이 사회적 이슈를 일으키고 있죠. 혐오 발언은 많은 가치를 뒤집어엎고 심각한 결과를 야기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의 사회’ 안에서 편협한 기준으로 서로를 잘라내고 분리시키기 때문에 큰 문제인 것이 아닐까요?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하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되는 건 요원해보이는데도 여전히 ‘하나가 될 수 있어’라는 믿음을 자기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것 같네요.
근데 말입니다. 우리 믿음대로 진짜 우린 하나가 될 수 있는 걸까요? 만약 가능하다면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면 하나되는 것이 힘들더라도 결국은 하나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이자 셋이신 하나님
이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와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조금씩 찾아보고자 합니다.
대체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목숨을 거는 것일까요? 뭐, 좀 쿨하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해주시고 사랑해주시고 나중에 영원하고도 아름다운 생명만 허락해주신다면 하나님이 한 분이시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든 상관없는 것 아닌가요? 괜히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심지어 어렵기까지 한 이 개념을 꼭 고수해야하는 이유가 뭔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요,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시면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이실 수 없으며, 구원자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사랑하고 믿는 가장 핵심적인 하나님의 모습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말이죠. 그래서 최근 제가 정말 감명깊게 읽었고, 사실 이 시리즈를 시작하게 해 준 계기가 된 책 ‘선하신 하나님’의 저자 마이클 리브스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내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간단히 말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또한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삼위일체는 모든 기독교 신앙고백을 지배하는 중심이자 다른 모든 것들을 형성하고 아름답게 하는 진리다. 삼위일체는 모든 기독교적 사고를 위한 방향타다. – P.23.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16)”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익숙하고 당연해 보이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사실 수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으잉? 어떻게 절대자가 사랑일 수 있단 말이냐!?’라면서 말이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인간은 언제나 ‘절대자’에 대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성격을 가진 존재이든 간에 이 세상을 시작하게 한 존재는 있을 테니까 말이죠. 그런데 이런 믿음엔 큰 결함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한 자가 ‘절대자’이며 ‘전능자’라면 그는 아무 것도 필요 없을 정도로 굉장한 존재이며 모든 것을 가진 자인데 대체 뭐가 아쉬워서 자기 외부에 이 세상을 창조하였느냐?는 것이었죠. 누군간 은혜롭게 말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창조하셨다.’ 듣기엔 참 좋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창조된 모든 것은 창조주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니까요. 근데 이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말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은 피조물이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가 되니까요. 그리고 좁쌀 한 톨이라 할지라도 무언가 필요한 존재는 무언가 부족한 존재이며, 좁쌀 한 톨 사이즈라도 부족한 존재는 더 이상 전능자라고 불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사랑하는 하나님은 불완전한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뭐가 아쉬워서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를 사랑한단 말입니까? 사랑과 하나님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능자로 남아있기 위하여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으시며 사랑도 없으신 하나님으로 남아있든지, 사랑을 함으로서 인간이나 유사한 수준으로 떨어지든지 둘 중 한 가지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 한 마디면 됩니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은 혼자 하는 게 아니란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표현을 쓰려면 하나님이 사랑이 아닌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창조 후에만 사랑의 하나님이셨다면, 또는 6일째 인간을 창조한 후부터 사랑의 하나님이셨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은 사랑이셨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후에 물론 사랑이셨고,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지어 타락한 이후에도 사랑이셨으며 지금까지도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온 세상에 있는 것은 혼동과 흑암 뿐이었을 때도 사랑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그 땐 뭘 사랑하셨을까요? 어떻게 우리 하나님이 아무도 없는데 사랑의 하나님이실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주로 사랑하시는 분이시다.’도 아니고, ‘하나님은 간혹 사랑하신다.’도 아니며, ‘사랑은 하나님의 주요 속성 중 하나이다.’도 아니고, 딱 잘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놀라운 진술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사랑이 아닌 순간이 없으셔야 하며, 우리가 누리는 모든 사랑의 원천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이 우리에게 이 실마리를 해결해주었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17:24)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히1:3). 그 분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십니다(골1:1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셨고 완전히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말입니다. 물론 우리 예수님께서도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요14:31)’ 그리고 두 분은 그렇게 사랑으로 하나이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사랑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세 분의 위격을 명확하게 구분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테니까요.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이나 성령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나머지 두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위격은 섞이지 않고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부가 하나이지만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고 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남편의 팔은 여전히 남편의 팔이고 아내의 다리는 여전히 아내의 다리입니다. 그래서 마이클 리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반드시 참된 위격들로 존재해야 한다. 성부, 성자, 성령이 단지 단일한 신격의 서로 다른 측면이라면 이 사이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p.51)” 영원 전부터 서로 사랑하신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그 사랑에 참여하시고 그 사랑 자체가 되셔서 함께 그 관계를 이루시는 성령님, 세 분은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랑의 하나 됨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참 위로가 되지 않나요? 세 분의 하나 됨이 사랑의 하나 됨이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에도 사랑이 아니실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시더라도, 성경에서 어떤 모습으로 기록되었더라도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분이지 결코 사랑이 아닌 모습으로 그 일들을 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가장 위엄있고 두려운 심판주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를 갈망하는 여럿, 그 뿌리는 삼위일체
짧은 지면을 통해 제가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이 모든 창조의 근원이라는 사실과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놀라운 빛을 던져줍니다. 이제서야 우리는 우리 인생에 가득한 ‘하나’를 향한 열망의 근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서야 우리는 모상이 아닌 참된 ‘하나’의 원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우리는 ‘하나’를 진짜 하나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되고자 할 때, 우리 교회가 하나되고자 할 때, (성경적 의미에서)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고자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하며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꿈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단단하고 변치않는 근거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는 모든 기독교적 사고를 위한 방향타라고 마이클 리브스가 말한 이유이며, 제가 이 시리즈를 시작하며 삼위일체는 결코 우리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삶에 빛을 던져준다고 강조한 이유입니다.
그럼 다음 글을 통해서는 구체적으로 교회와 삼위일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더운 여름 ‘샬롬’하시길 기도하며 마침표를 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