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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인물 탐방, 멜란히톤 편

독일 종교개혁에 있어서 알아야 할 인물 중에 멜란히톤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멜란히톤은 루터와 함께 독일에서 종교개혁에 힘썼던 사람입니다. 루터의 그림자에 가려서 덜 주목받았지만 근래에는 많은 연구가 되고 있죠.

유년시대의 경험, 화해주의자

멜란히톤은 분열되고 싸우는 당시 교회의 화해를 위해서 힘썼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런 삶을 살게 한 배경에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한 몫을 했습니다.[1] 그의 본명은 필리프 슈바르체르트로, 1497년에 브레텐이라는 독일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2]

출생

루터와는 13살 정도 차이가 납니다(일반적으로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났다고 보는데 84년에 태어났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멜란히톤도 유명 인물인만큼 그가 태어난 브레텐에는 그의 이름을 딴 카페도 있고 얼굴이 새겨진 초콜릿을 팔기도 합니다. 브레텐에 있는 멜란히톤 하우스는 멜란히톤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이 있는데, 입장료는 2유로입니다.

멜란히톤하우스

멜란히톤의 아버지는 영주의 병기 관리자였는데, 영주에 의해 여기저기 불려다니다보니 가족과는 떨어져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멜란히톤은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습니다.[3] 그런데 멜란히톤이 11살쯤 되었을 때 전쟁의 여파로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4] 설상가상으로 멜란히톤과 함께 살던 할아버지마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납니다.[5] 전쟁과 함께 가족들을 잃은 경험이 멜란히톤의 삶에 영향을 마쳤을 것이라고 봅니다.

뛰어난 학문 능력

어린 멜란히톤은 아버지가 임종한 해인 1508년 포르츠하임이라는 곳에 있는 친척 집으로 가서 살게 되는데, 그 친척이 바로 요하네스 로이힐린이라는 유명한 인문주의 학자로, 독일 최초의 히브리어 교과서를 저술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6] 멜란히톤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바로 이 로이힐린입니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어로 된 이름을 지어서 사용했는데, 로이힐린도 멜란히톤에게 이렇게 이름을 지어준 것이죠.[7] 멜란히톤은 어릴적부터 공부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1509년에는 하이델베르크로가서 공부를 하게 되는데, 그의 고전어 실력은 하이델베르크 내에서도 유명해서 주변에서는 멜란히톤을 ‘그 그리스인’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8]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는 요리문답으로도 유명하고, 또한 대학도시이자 관광도시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먹어볼만한 음식점으로는 슈니첼뱅크(Schnitzelbank)가 있습니다. 슈니첼은 오스트리아식 돈까스 같은 것인데 독일에서도 많이 먹습니다. 우리나라에서와는 달리 고기를 얇게 피고 빵가루를 묻혀서 부쳐먹는 것에 가까운데, 이 식당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슈니첼이 제공됩니다. 트립어드바이저 사이트에서도 랭킹 1위이며, 인스타그램 같은 곳에서 식당을 찾은 사람들의 사진도 꽤 올라옵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가볼만한 카페로는 커피 너드(Coffee Nerd)라는 곳이 있습니다. 평가도 좋고, 독일 신문에도 소개되었으며, 바리스타들이 로망으로 삼는 에스프레소 머신 중의 하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에델베르크에서 공부한 멜란히톤은 1512년 튀빙겐 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석사 과정을 시작하게 되고, 거기서 인문주의에 대한 지식을 더욱 쌓아나갑니다.[9] 그는 특히 신학에 흥미를 느꼈는데, 처음에는 오캄의 저술들을 열정적으로 읽었지만, 그의 사촌이 성경을 선물하자, 그 성경을 밤낮으로 읽었다고 합니다.[10] 심지어 그는 교회에 갈 때 성경을 가지고 가서, 다른 사람들이 기도서를 읽고 있을 때 성경을 읽다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핍박(?)을 받기도 했습니다.[11]

멜란히톤은 강의 능력이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석사학위를 수여받은 이후에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등을 강의했는데, 학생들이 모여들어서 그의 강의를 즐거이 경청했다고 합니다.[12] 학문적 능력이 뛰어났기에 1516년 20살 정도의 나이에 고전 문학에 대한 비평서를 출판하게 되며, 1518년에는 그리스어 교과서를 집필하고 이 책은 100여년 동안 40쇄나 팔렸다고 합니다.[13] 이렇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멜란히톤은 에라스무스와도 친분을 맺게 되는데, 에라스무스는 멜란히톤의 뛰어남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이후 서신을 계속 교환합니다.[14]

(1518)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그리고 이 시기에 드디어 루터가 1517년 95개조 논제를 통해서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리게 되죠. 그리고 루터로 인해 종교개혁의 중심이 된 이 비텐베르크의 대학 교수로 멜란히톤이 가게 됩니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비텐베르크 대학을 인문주의를 실현하는 영향력있는 학교로 세우기를 원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어를 가르칠 교수가 필요했습니다.[15] 사실 프리드리히는 로이힐린이 교수로 와주기를 원했지만, 로이힐린은 자신의 조카의 아들인 멜란히톤을 추천합니다.[16] 그를 추천하면서 로이힐린은 ‘에라스무스를 제외하고 독일에 멜란히톤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고 말합니다.[17]

비텐베르크

그렇게해서 비텐베르크로 가게 되지만, 멜란히톤은 사실 왜소한 외모로 인해서 사람들의 의심과 조롱을 받게 되지만, 그런 시선은 그가 비텐베르크에 도착한지 3일 뒤 첫 강의를 하자마자 바뀌게 됩니다.[18] 그의 강의 능력에 많은 사람들은 물론 루터마저 매료되었다고 합니다.[19]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멜란히톤은 루터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그는 훗날 “나는 그(루터)에게 복음을 배웠다”라고 고백합니다.[20] 멜란히톤 자신도 성경에 대한 관심이 많았지만, 루터의 영향을 받으면서 종교개혁에 더 깊이 발을 딛게 된 것이죠.

종교개혁에 합류

그래서 멜란히톤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돕게 되는데,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루터와 에크가 논쟁을 할 때 루터를 도와주다가 에크에게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기도 합니다.[21] 물론 루터는 성경을 잘 알았지만, 에크는 중세 신학과 인문주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조예가 더 깊었을 멜란히톤이 루터를 도와주었을 것이라고 봅니다.[22]

라이프치히

이 에크는 처음에는 루터와 논쟁했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몇번이고 멜란히톤과 논쟁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아우스부르크 같은 곳에서 논쟁했을 때에는 멜란히톤에게 패배했다는 분함으로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는 말도 있습니다.

멜란히톤은 성경 번역을 하는 것에 있어서도 루터를 도왔다고 합니다.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할 때, 원어 실력이 더 뛰어났던 멜란히톤에게 루터가 조언을 구하고 작업에도 참여했다고 합니다.[23] 그리고 루터가 보름스에서 자신의 신앙을 선언한 이후 납치되어 은거하고 있을 때, 멜란히톤은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을 진행해나갑니다. 1521년에는 대학생들과 함께 빵과 포도주로 성찬을 치르기도 했습니다.[24]

(1521) 신학 총론

멜란히톤이 종교개혁에 기여한 것 중 하나는 1521년에 『신학총론(Loci Communes)』이라는 조직신학서를 저술한 것입니다. 이 책은 당시의 다른 종교개혁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세의 신학 체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저술했는데, 멜란히톤은 이 책으로 이전까지 신학 교과서였던 피터 롬바르드의 명제집을 대체하려고 했으며, 특별히 로마서를 이해하기 위해 로마서에 나오는 개념을 중심으로 주제를 배열했습니다.[25] 사변보다는 신학 연구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을 더 강조해서, 기도나 고난과 같이 삶과 경건에 관련된 주제들을 다룹니다.[26]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 예입니다.

“계속해서 회의 중에 있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는 이는 기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 기도는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한, 기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 속의 이런 어두움과 암매[ 일에 어둡다는 의미(네이버 국어사전)]는 사람들이 피난처 찾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 그는 쓸데없이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히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는 이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도하지 않는 이들은 벌하실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영예롭게 해야 한다. 나는 그의 명령을 비웃거나 가볍게 여겨서 바람에 날아가도록 해서는 안 된다. … 우리는 기도해도 좋고, 기도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자격이 있네, 없네 하는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음을 생각해야 한다.”[27]

화해와 분열 사이에서

앞에서 언급한대로 멜란히톤은 종교개혁을 추구한 동시에 교회의 화해와 연합을 추구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멜란히톤은 종교개혁의 역효과로 일어나는 폭력들에 대해서도 평화를 추구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역에서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는 수도사와 수녀들이 역으로 박해를 받을 때, 그것을 중재한 사람은 멜란히톤이었습니다.[28] 뿐만아니라 가톨릭과의 평화와 일치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제도라는 제한된 의미 내에서의 교황 제도는 어느 정도 인정하려고 하기도 했습니다.[29] 물론 성경보다 교황의 권위가 위에 있다는 것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이죠. 멜란히톤은 1529년 루터와 함께 츠빙글리를 만났을 때에도 의견의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합니다.[30] 아쉽게도 루터와 츠빙글리는 의견을 일치하지 못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점차 진행되면서 독일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진영 사이에서 화해를 위한 많은 회담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회담 속에서 멜란히톤은 종교개혁 신앙을 잘 전하고 그 안에서 화해를 이루려는 노력을 합니다. 1526년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는 제후들의 양심에 따른 종교개혁을 보장해주지만, 1529년 같은 장소에서 열린 의회에서 개혁이 다시 금지됩니다.[31] 그리고 이에 대해 종교개혁 진영의 제후들이 항의를 하게 되면서 황제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을 제시하라고 명령하고, 멜란히톤을 중심으로 신앙고백을 작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입니다.[32] 멜란히톤이 책임을 맡은 이유는 루터는 이미 추방을 당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갈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33] 그래서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는 가지 못하고 근처에만 가게 됩니다. 아쉬운 것은 이미 황제는 개신교도들의 주장을 받지 않으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고, 멜란히톤은 자신이 쓴 신앙고백이 황제 앞에서 낭독되고 있을 때 숙소에서 지친 상태로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34] 그래도 아우크스부르크에 있을 때 여러가지 회담과 협상이 이루어지긴했는데, 멜란히톤은 여기서 가톨릭과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지만, 어느 정도까지 일치가 이루어져야되는지에 대한 의견차이로 오히려 개신교 진영이 분열을 하게 됩니다.[35]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개신교 신앙고백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황제는 쉽게 개신교 진영을 건드리지는 못했습니다. 개신교 진영이 슈말카텐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방어 동맹을 맺기도 했고, 프랑스와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으로 인해 개신교 진영의 힘이 필요해서 황제가 섣불리 손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36]

이후에도 멜란히톤은 개신교 진영과 가톨릭의 일치를 위해서 많은 힘을 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멜란히톤이 교리적 차이를 무시하는 일치를 추구한 것은 아닙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의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1541년에 있었던 보름스에서의 회담이 그런 경우였습니다.[37] 이런 멜란히톤의 노력이 결실을 맺지는 못했습니다. 루터가 죽은지 10년도 뒤에 일어난 1557년에 있었던 종교회담에서는 개신교 진영의 내부분열로 인해서 개신교 안에서 의견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38] 아쉬운 일이죠. 그리고 3년 뒤 멜란히톤은 비텐베르크에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결혼과 성품

멜란히톤의 결혼 생활은 다른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멜란히톤 본인 자체가 별로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의 건강을 염려해서 루터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강권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기에 그럴지도 모릅니다.[39] 정작 멜란히톤은 루터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반대합니다.[40] 멜란히톤의 성품은 검소했고, 없는 중에도 다른 이들을 환대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41] 성품이 좋고 화해를 추구하는 성향이었기 때문에 가톨릭 진영에서도 멜란히톤을 자신들 쪽으로 끌어오려는 시도가 많기도 했습니다.[42]

실수

하지만 멜란히톤도 항상 옳은 일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루터나 멜란히톤이 했던 일 중 가장 치명적인 실수 중의 하나는 헤센의 제후인 필리프의 중혼을 허락한 것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약점을 잡힌 필리프는 황제와 타협하여 종교개혁 진영의 힘이 크게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고, 멜란히톤은 자신이 종교개혁에 큰 손실을 끼치고 도덕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병까지 얻게 됩니다.[43] 물론 이러한 사건이 다시 멜란히톤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하게 됩니다.

나가는 글

이렇게 멜란히톤과 그의 삶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보았습니다. 멜란히톤과 같은 사람들이 함께 했기에 루터도 더 힘있게 종교개혁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종교개혁 자체가 루터가 의도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이후의 개혁에 있어서도 모든 것이 다 그들의 생각대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은 멜란히톤의 삶과 그의 노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저술과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노력에 모두의 동의와 화해를 가져오지는 못했습니다.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멜란히톤에 관한 자료는 국내에 나온 현재까지 유일한 전기인 마르틴 융의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그리고 멜란히톤이 저술한 『신학총론』 정도인 것 같습니다. 조만간 멜란히톤 전기가 국내에 새로 나온다는 말이 있으니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다른 종교개혁가에 대해서 또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2.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3.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4.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5. Karl Friedrich Ledderhose, The Life of Philip Melanchthon.  ↩

  6.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7.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8. Karl Friedrich Ledderhose, The Life of Philip Melanchthon.  ↩

  9.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10. Karl Friedrich Ledderhose, The Life of Philip Melanchthon.  ↩

  11. Karl Friedrich Ledderhose, The Life of Philip Melanchthon.  ↩

  12. Karl Friedrich Ledderhose, The Life of Philip Melanchthon.  ↩

  13.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14. Karl Friedrich Ledderhose, The Life of Philip Melanchthon.  ↩

  15.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16.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17. Karl Friedrich Ledderhose, The Life of Philip Melanchthon.  ↩

  18.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19.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20.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21. Karl Friedrich Ledderhose, The Life of Philip Melanchthon.  ↩

  22.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23.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24.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25. Whitford, D. M. (Ed.). (2012). T&T Clark Companion to Reformation Theology (pp. 426–427). London; New York: T&T Clark.  ↩

  26.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27. 멜란히톤, 신학총론, 510–511.  ↩

  28.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29.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30.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31.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32.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33.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34.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35.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36.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37.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38.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39.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40.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41.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42.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43.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

Over de auteur

재국

디자이너를 꿈꾸던 공대생 출신 신학도.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교회사를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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