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포스팅까지는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위해 힘쓴 루터와 멜란히톤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이번에는 옆쪽 동네인 스위스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스위스에서 활동한 종교개혁가 중에 우리가 아는 가장 유명한 사람은 물론 칼빈이겠지만, 그보다 먼저 츠빙글리라는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는 스위스의 취리히 지역에서 종교개혁을 이끈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1484년 1월 1일에 스위스 내의 빌트하우스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는데요, 루터와 거의 같은 나이입니다. 공식적으로 루터의 생년은 1483년으로 보는데, 1484년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츠빙글리는 바젤(Basel)과 베른(Bern), 그리고 지금의 오스트리아 지역인 비엔나 대학교 등에서 공부했고 인문주의를 접하게 됩니다. 츠빙글리는 22살의 나이에 글라루스(Glarus) 지역의 교구 사제가 됩니다. 인문주의를 접했고 관심이 많았던 그는 헬라어도 잘했는데, 사실 사제들 중에서 츠빙글리처럼 인문주의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가톨릭 체제에 의문을 갖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기존의 가톨릭 제도에 대한 의문을 들게 만드는 사건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요. 그 중 하나는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스위스는 용병으로 유명한 지역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스위스 용병들은 용맹했고 신의를 생명처럼 여겼기 때문에 군주들로부터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황 율리오 2세도 스위스 용병들로 이루어진 개인 경호 부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한창 전성기였던 스위스 용병의 기세는 츠빙글리의 시대에 카를5세와 프랑수아1세 사이의 싸움에서 독일 지역의 경쟁 용병 단체인 란츠크네흐트에게 패하면서 기울어지게 됩니다. 물론 이후에도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죽기 직전에 모든 신하들이 도망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왕을 지켰던 것은 다름아닌 스위스 용병들이었다고 하니 고용주로서는 믿음직한 용병들이긴 했습니다.
츠빙글리도 용병들인 자기 교구민들을 따라 전쟁에 함께 나가게 되는데요. 처음 참여한 1512년의 전쟁에서는 비록 승리는 했으나, 자기의 교구민들이 정복지를 약탈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1515년에는 교황과 프랑스의 전쟁 때 교황의 편에 서서 프랑수아 1세와 싸우다가 패배하고 용병들은 학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전쟁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들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기존에 갖고 있던 교황에 대한 신념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 문제는 나중에 츠빙글리가 취리히에 있을 때 더 부각되는데, 프랑스와 싸우던 교황은 어느새 다시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맺고 취리히에게 프랑스를 위한 용병 파병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츠빙글리에게 교황청에 대한 문제점을 더 인식하게 했습니다.
전쟁 외에 츠빙글리에게 영향을 줬던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츠빙글리는 1516년 에라스무스가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했을 때 그것을 구입해서 읽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을 스스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성경 해석의 권위를 가진 교황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는데, 츠빙글리는 성경에 푹 빠져들었고 그래서 신약을 거의 외우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성경 말씀이 그를 조금씩 변하게 했습니다. 츠빙글리는 루터처럼 급격한 회심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한 동안 가톨릭 교회의 체제에 남아있었고, 교황군 군종 사제로도 임명 받았었고, 교황에게서 지급된 연급도 받았습니다. 그 돈을 책을 사는데 쓰긴 했지만요.
취리히의 종교개혁가로 변화되어 가다
이렇게 성경에 빠져들었던 츠빙글리는 당시 순례지기도 했던 한 수도원의 사제로 임명되는데, 그곳에서 순례 등의 여러 선행이 구원에 유익하다는 것을 비판하고(순례지에서!), 그러한 것들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하면서 점점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츠빙글리는 점점 더 종교개혁의 노선에 서게 됩니다. 곤잘레스는 츠빙글리가 인문주의적인 성경 연구와 당시 만연한 미신, 그리고 용병과 전쟁의 경험을 통해 얻은 의문등으로 인해서 루터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아무튼 츠빙글리는 이 순례지에서 점점 유명해지고, 그 유명세로 인해서 1518년 취리히 대성당의 설교자로 임명을 받습니다. 그의 임명을 모두가 반긴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죠.
그러나 츠빙글리가 1519년 1월 1이 첫 설교에서 기존의 중세적인 방식으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을 한 구절 한 구절 강해하는 설교를 하겠다고 선언하자, 츠빙글리의 임명으로 인해 빚어졌던 혼란이 곧바로 잠재워졌다고 합니다. 츠빙글리는 이렇게 성경을 설교하는 것을 통해서 취리히의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츠빙글리가 종교개혁을 이렇게 시작한 이후에, 취리히에는 과격한 개혁을 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복음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는 말씀을 설교하는 것에 힘썼습니다.
츠빙글리가 취리히에 있을 때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취리히에 전염병이 돈 사건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거의 죽을 뻔했던 츠빙글리는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초반에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수월하게 만들어준 요소가 있었는데요. 츠빙글리가 아직 가톨릭 시스템에 남아있었다는 사실과, 또한 무엇보다도 교황에게는 스위스 용병들이 필요했다는 것이 바로 그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1523년까지는 교황도 함부로 츠빙글리를 건드리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소시지 게이트
그러다가 취리히의 개혁의 불씨를 좀 더 당기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소시지 게이트” 사건입니다. 1522년 츠빙글리는 “금식 및 금욕에 관한 교회법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게 되는데요. 당시에는 각종 절기 등으로 인해서 일년의 거의 1/3은 고기를 먹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고기 대신 생선을 먹었죠. 종교개혁이 생선 장사에 안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그런데 그에 대해 츠빙글리가 반대하는 설교를 하게 되고 나서 일이 벌어졌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아야 하는 사순절에 츠빙글리의 열 두 친구들이 모여 소시지를 먹게 된 것이죠. 비록 츠빙글리는 소시지를 먹지는 않았지만, 그는 친구들을 변호해서 사순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인간의 명령을 덧붙인 관습일 뿐이며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설교를 중보해 출판된 책에서 츠빙글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먹지 않는 한, 음식은 절대 악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음식을 먹는 시간이 음식을 악하게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음식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곧 우리 사람들이 너무 많이 먹거나 믿음 없이 먹을 때 음식을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츠빙글리 저작 선집 1, 58.)”
“만약에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원한다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인간도 하나님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는 사람 자신이 만든 어떤 생각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욕망과 우리 자신이 만든 생각에 자신을 내맡겨 버리는 것입니다.(츠빙글리 저작 선집 1, 67.)”
그는 이렇게 사순절과 같은 절기에서 지키라고 명하는 것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보고 그것을 경계했습니다.
본격적인 개혁의 시작
이런 사건들과 함께, 츠빙글리를 공격하는 여러가지 소문들이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츠빙글리는 자신의 신학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그래서 루터처럼 츠빙글리도 67개조 논제를 내어놓는데,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교황이 아닌 말씀을 통해 교회를 다스리신다고 주장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진정하고도 완전한 제사가 이루어졌으므로 사제들이 거행하는 미사가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즉 사제직에 대한 도전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루터처럼 선행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츠빙글리는 가톨릭에서 사제들에 대한 독신 강요는 잘못이라고 믿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그는 결혼을 하게 되는데,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될까봐 몰래 혼인을 했다가 2년 뒤 주변 상황이 괜찮아 졌을 때 정식으로 혼인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츠방글리가 논제들을 내어놓자, 개혁은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당시 콘스탄스의 부주교가 츠빙글리를 고발하게 되고, 츠빙글리는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변호해야하게 됩니다. 그것을 토론회가 1523년 1월 29일에 열렸는데, 이 때 츠빙글리는 성경에 대한 지식을 탁월하게 드러내며 토론에서 승리했습니다. 원어도 잘 알고 있었고, 성경을 달달 외웠으니까요. 츠빙글리가 승리하자 취리히는 곧바로 성경에 부합하는 설교만이 합법이라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당시 츠빙글리의 주장에 대해 제대로 답할 수 없었던 주교의 대리인들은 그에 대해 응답하기를 거부해버렸고, 그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취리히에서 성경에 합당한 설교만이 합법이라는 것이 결정이 나게 되자, 이제 성경에 합당한 설교를 할 수 있는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츠빙글리는 그것을 위한 문법학교와 신학 대학을 세웠고, 이것은 한 세대 이후 성경과 신학에 있어 잘 준비된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것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 덕분에 성경에 대한 주석들이 많이 출판되게 되었고, 이에 더하여 1531년에는 취리히 성경도 출간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종교개혁은 수도원을 문을 닫게 했고, 각종 유물들과 성상, 미사를 위한 촛대와 제단, 그리고 사제들의 제의 등이 다 치워졌습니다. 루터와는 달리 츠빙글리는 오르간도 사용하지 않았는데요. 우상숭배를 특히나 경계했던 츠빙글리는 아름다운 음악이 사람들로 하여금 음악 자체를 우상처럼 섬기게 만들까봐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사실 츠빙글리는 악기들을 잘 다뤘다고 하는데 말이죠. 또한 성찬을 거행할 때에도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성찬을 집례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면에서 루터와 츠빙글리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종교개혁에 있어서 어떤 차이를 보였을까요? 루터는 성경에 반대되지 않는다면 전통적인 것들을 존중했지만, 이와달리 츠빙글리는 성경에서 보장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다 없애버립니다. 심지어 성찬식도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자주 거행하지 못하게 했다고 할 정도니까요.
종교개혁의 깃발을 넘겨주다
이렇게 활기차게 개혁을 진행시켜나가지만, 애석하게도 츠빙글리에게는 개혁을 할 수 있는 많은 세월이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스위스 내에서도 가톨릭을 따르는 도시들이 있었고, 그 도시들이 취리히를 공격하게 되게 때문이죠.
가톨릭을 따르는 이 도시들은 취리히와 같은 개혁파 도시들로 인해서 자기들이 카를5세가 다스리는 신성로마제국에게 핍박을 받는 사태가 일어날까봐 두려워했고, 그래서 선제 공격을 하게 된 것이었죠. 이 때 일어난 카펠에서의 전투에서 취리히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선 츠빙글리는 패하고 죽음을 맞게 됩니다. 사람들은 츠빙글리의 시신이 나중에 성물이 되지 못하게 하려고 그의 시체를 찢고 태워서 오물과 섞어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츠빙글리는 40대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불링거가 이어받게 되죠.
루터와는 다른 지점에서 다른 상황들을 통해 종교개혁을 이끌어간 츠빙글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세우시고, 역사를 이끌어가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루터와 츠빙글리는 서로 달랐지만 둘 다 성경을 통해서 종교개혁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음에는 이제 츠빙글리를 이어받아 취리히의 종교개혁을 지속한 불링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문헌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후스토 L. 곤잘레스, 『종교개혁사』
맛시모 몬타나리, 『유럽의 음식문화』
홀트라이히 츠빙글리, 『츠빙글리 저작 선집 1』
https://namu.wiki/w/스위스%20용병#s–1.3
Comments 3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