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포스팅에서 살펴봤듯이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어가던 츠빙글리가 전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서 개혁을 추진해나갈 사람이 필요해졌습니다. 그 역할을 감당한 사람이 바로 하인리히 불링거였습니다.
불링거는 취리히에서 40여분 거리에 있는 브렘가르텐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사제였고 이는 엄밀히 말해 불법으로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당시 분위기에서 이런 문제는 면죄부를 사면 해결되는 정도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불링거의 아버지는 그것을 거부하고 종교개혁의 교리들을 고백했다가 직위를 잃게 됩니다. 아무튼 불링거의 아버지는 꽤 가정적인 사람이었고 취리히의 저명한 사람들과도 친분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불링거는 에머리히에 있는 수도회 학교에서 공부했고 여기서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데보티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는 14세기 말 네덜란드에서부터 독일과 프랑스와 이탈리아 지역으로 퍼져나간 부흥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리스도를 본받아』로 유명한 토마스 아 캠피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공동생활 형제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종교개혁으로 합류하게 되다
불링거가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독일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당연히 불링거도 그에 대한 소식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루터의 신학을 가톨릭의 가르침과 비교하길 원했고 그래서 그라티안과 피터 롬바르드의 글을 읽게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교부들과 신약을 공부하게 됩니다.
불링거는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수도승이 될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쾰른의 대학에 입학하게 되며 거기서 공부해서 1522년 학위를 받게 됩니다. 불링거도 다른 종교개혁가들과 비슷하게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에 대한 열정에 더욱 박차를 가하도록 한 요소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공동생활 형제단의 엄격한 경건이며 또 다른 하나는 당시에 유행하던 인문주의였습니다. 점차 불링거는 교리에 있어 성경의 우선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그래서 루터의 가르침과 츠빙글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멜란히톤의 신학총론과 루터의 글들을 읽고 그것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불링거는 1523년부터 카펠에 있는 시토 수도회의 수도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는데 사실 이때 그는 이미 종교개혁에 마음이 기울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수도사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수도원장은 불링거를 배려하여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도 수도사의 서원들을 피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었습니다. 불링거는 이 시기에 츠빙글리와 알게 되었고 당시 일어난 논쟁들에도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개신교들의 견해들에 대해 좀 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528년에는 베른에서 일어난 회의에 참여했고 여기서 개혁파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쌓게 됩니다.
츠빙글리의 뒤를 잇다
이후 1529년에 불링거는 고향인 브렘가르덴으로 가서 아버지를 이어 목회를 하게 되고 또한 수녀였던 안나라는 여인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런데 1531년에 카펠에서 일어난 전투로 인해 츠빙글리가 사망하게 되죠. 이때 불링거가 츠빙글리의 뒤를 이어 목회를 감당할 사람으로 초청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1575년까지 취리히에서 40년이 넘는 오랜 기간동안 사역을 하게 됩니다.
불링거는 츠빙글리의 뒤를 잇기에 상당히 적합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츠빙글리가 죽음을 앞두고 불링거를 지명했다는 소문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불링거는 온유했고 자기 절제를 잘 하는 사람이었으며 이는 츠빙글리가 이끈 종교개혁을 잘 보존하고 견고하게 만들어줄 사람에게 필요한 자질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불링거가 설교를 하기 위해 설교단에 올라갔을 때 많은 청중들은 츠빙글리가 무덤에서 살아돌아왔다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후 불링거는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어가면서 많은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바로 제2차 헬베틱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것입니다. 헬베틱 신앙고백서는 스위스 신앙고백서라고도 부르는데요. 사실 이것은 불링거의 개인 신앙고백서이기도 하며 자신이 죽을 때 함께 묻어 달라고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냥 개인적인 고백서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팔틴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불링거에게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필요한 신앙고백서를 써달라고 의뢰해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필립 샤프는 이 제2차 헬베틱 신앙고백서가 다른 신앙고백서들에 비해서 신학적인 면에서 으뜸이라고 평했습니다. 로날드 카멩가는 제2차 헬베틱 신앙고백서가 교회와 사회와 개인적인 삶의 다양한 영역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렇게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도록 이끈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이 신앙고백서는 부모들에게 자녀가 올바른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도록 가르치라는 내용이 있으며 또한 가정을 경영하고 돌보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하고 거룩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회자 불링거
불링거는 종교개혁가로서만이 아니라 목회자로서 상당히 귀감이 되는 사람입니다. 설교도 많이 했는데요. 사역을 시작한 첫 해에는 일주일에 6–7회 설교했고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서는 주 2회 정도 설교했습니다. 그는 선임자였던 츠빙글리를 따라 성경 전체를 설교하려고 했고 그의 설교는 단순하고 명료하고 실천적이어서 젊은 설교자들의 귀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헌신적인 목회자라는 것은 사람들을 상담하고 위로하는 것에 힘을 썼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필립 샤프에 따르면 불링거는 전염병이 도는 중에도 사람들이 오는 것을 막지 않았으며 그의 집은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밤 늦은 시간까지도 늘 열려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얼마 없는 수입과 기부받은 돈을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망명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었으며 설사 다른 신조를 고백하는 이들이라고 쫓아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임자였던 츠빙글리의 미망인의 생계도 책임져주었고 또한 츠빙글리의 두 자녀를 자기 자녀들과 함께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종교개혁으로 인해 박해받은 형제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고 그들에게 지낼 곳과 교통 수단도 마련해주었다고 합니다. 확실히 불링거는 목회자다운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런 온유한 인품은 그가 종교개혁 신앙을 적대하는 자들에 대한 폭력이 행해지는 것을 반대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라는 면에 있어서도 불링거의 영향력은 컸습니다. 신학적으로 논쟁하는 저술들 외에도 역사서적들이나 설교집들, 그리고 많은 성경 주석들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가로서 불링거는 다른 여러 종교개혁자들, 즉 칼빈, 멜란히톤, 부처, 베자 등과도 서신을 교환했고 심지어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엘리자베스 여왕, 앙리 2세, 덴마크의 왕 크리스찬, 헤세의 필립, 팔틴의 프리드리히와 같은 많은 군주들이 그에게 조언을 구했고 서신을 교환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종교개혁가들 중에서 가장 거두라고 생각되는 칼빈조차도 불링거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합니다. 불링거와 칼빈은 1536년 바젤에서 제1 헬베틱 신앙고백을 작성하기 위한 모임이 열렸을 때 처음 만났으며 그 이후로도 칼빈은 5번 더 취리히를 찾아와서 불링거를 만났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칼빈이 더 영향력이 있는 종교개혁가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불링거의 영향력이 굉장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불링거의 제2 헬베틱 신앙고백은 개혁파 진영에서 가장 폭넓게 받아들인 고백 중 하나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불링거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불링거는 피의 메리가 잉글랜드에서 피바람을 일으킬 때 유럽 대륙으로 피난해 온 많은 이들을 보호해주었습니다. 게다가 불링거는 영국 종교개혁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불링거가 잉글랜드 사람들의 존경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 많은 잉글랜드 사람들이 슬퍼했다고 합니다.
불링거가 다른 지역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개혁교회들과 서신을 교환한 이유는 공교회, 즉 보편교회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교회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베자는 불링거를 “모든 기독교 교회들의 공통 목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불링거는 박해를 피해 온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을 받아들였고 다른 지역에서 박해를 받는 이들을 도우려고 힘썼습니다. 불링거가 보편교회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하나됨을 추구했다는 사실은 칼빈과 성찬에 있어서 합의를 이루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불링거의 선임자였던 츠빙글리는 성찬에 대한 인식이 칼빈의 견해와도 달랐고 루터와도 달랐었는데 불링거는 어느 정도 합의를 이루어낸 것이죠.
경건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불링거는 헌신적이고 온유한 목회자이자 영향력있는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뜬구름 잡는 사변가가 아니었으며 참된 경건을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불링거의 모습은 자기 아들이 다른 지역에서 신학을 공부하러 갈 때 다음과 같은 지침들을 주었던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1)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임을 기억하라.
2)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손하고,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자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앞에서 홀로 기도하라.
3)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모든 것들을 굳건히 신뢰하라.
4) 모든 것보다 사랑 안에 역사하는 강한 믿음을 위해 기도하라.
5) 하나님께서 너의 선한 이름을 보호하시고 너를 죄와 질병과 악한 이들로부터 지키시기를 기도하라.
6)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를 위해, 조국과 부모, 후원자들, 친구, 그리고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고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끝을 맺고, 아름다운 찬송인 Te Deum Laudamus를 사용하라(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으로 여겼음).
7) 말에 신중하고, 말하기보다는 기꺼이 들으려하고,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참견하지 말아라.
8) 라틴어, 역사, 철학, 그리고 학문들에 천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면히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공부하고, 특히 신약을 연구하고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성경을 매일 3장씩 읽어라.
9) 너의 몸을 깨끗하고 흠이 없게 지키고, 옷을 단정하게 하며, 무엇보다 먹고 마시는 것에 무절제하지 않도록 하라.
10) 네 말을 품위있게, 기분좋게, 온유하게, 매정하지 않게 하라 (Schaff, P., & Schaff, D. S.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8, pp. 211–212)
지침 중에서 기도하라는 내용들이 정말 많죠. 겸손함을 강조하는 부분도 눈여겨 볼 수 있습니다. 불링거가 평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글을 마치며
불링거는 다른 이들에 비해서 오랜 기간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결국 많은 일과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들이 그의 몸을 악화시켰고, 힘든 몸을 이끌고 끝까지 설교하고 글을 쓰다가 1575년 마지막으로 설교를 한 이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불링거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츠빙글리의 뒤를 이을 적임자를 놀랍게 예비해주셨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목회자이자 종교개혁가인 불링거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무엇인지도 살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가장 유명한 종교개혁가이자 신학자인 칼빈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F. L. Cross & E. A. Livingstone (Eds.), In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P.Schaff & D. S.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8.
D. M. Whitford(Ed.), T&T Clark Companion to Reformation Theology
로날드 카멩가, 박재은 역, “제2차 헬베틱신앙고백서”
박상봉, “깔뱅과 불링거:두 종교개혁자의 교류협력, 애증 그리고 대망”
“Gallery of Calvin’s Supporters and Opponents.”; Christian History Magazine-Issue 12: John Calvin: Reformer, Pastor, Theolog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