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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인물탐방 칼빈 편

칼빈은 종교개혁에 있어서 루터와 더불어 가장 명성이 높은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알려져있고 국내에 출판된 책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블로그에서 지도를 함께 보면서 그의 삶을 가볍게 따라가보는 것도 나름의 유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출생 및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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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호칭을 존 칼빈, 장 칼뱅, 장 깔뱅과 같은 이름들 중에서 어떤 것을 쓰는 것이 옳으냐에 대한 말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존 칼빈이라고 하겠습니다. 칼빈은 프랑스 파리의 북쪽에 있는 지역인 누아용(Noyon)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프랑스식 이름은 장 코뱅(Jean Cauvin)이었죠.

칼빈의 아버지는 나름 중산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주교의 비서이자 참사회 감독관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칼빈이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줄 수 있었습니다. 루터의 아버지와는 달리 칼빈의 아버지는 아들을 사제로 만들고 싶었했기 때문에 12살 때 칼빈은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5년 정도 후에 칼빈의 아버지는 생각을 바꾸고 칼빈을 오를레앙에서 법을 공부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칼빈은 인문주의를 접하고 빠져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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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레앙과 이후 부르주의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칼빈은 그리스어와 분석적 사고와 논증을 통해 설득하는 방법들을 습득했습니다. 칼빈은 논증에 있어서 자신의 논점을 확신있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그래서 심지어 별명이 “목적격(the accusative case)” 별명도 참 이었다고 합니다.

칼빈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의 아버지가 1531년 죽음을 맞게 되자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가서 문학과 고전을 공부했고 신학공부도 마칩니다. 그리고 1532년에 다시 부르주로 가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때 칼빈은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책을 출판합니다.

종교개혁에 합류

칼빈의 회심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 알기란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인의 회심에 대해서도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공부를 하던 시기에 인문주의의 영향도 받고 또한 칼빈 본인이 성경과 교부들을 공부하는 것을 통해서 종교개혁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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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종교개혁과 관련해서 분위기가 악화되는 사건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1528년 과격한 개혁을 추구하는 이들이 파리에 있는 마리아와 아기의 형상에 있는 아기의 머리를 자르고 마리아상 덮개를 짓밟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종교개혁에 관대한 편이었던 프랑수아 1세는 이때부터 루터파에 대한 강경한 조치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러한 과격한 파괴 방식은 루터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게다가 1534년에는 가톨릭의 미사에 대해 비판하는 벽보가 프랑스 전역에 붙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하필이면 왕의 침실문에도 그 벽보를 붙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분노한 프랑수아 1세는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보이는 사람 36명을 화형시켜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는 종교개혁에 적대적인 분위기로 변해버렸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칼빈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과격파들을 싫어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이클 리브스는 이러한 이유로 칼빈이 쓴 첫 신학작품이 로마 가톨릭이 아닌 재세례파에 대한 반박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아무튼 좋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칼빈의 신변도 위태로워졌습니다. 1533년에 파리 대학의 새 총장이 된 니콜라 콥은 루터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연설을 했고 그 때문에 피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연설에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칼빈도 관원들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게 되죠.

1535년에 칼빈은 바젤로 피신을 하는데 이곳에서 그 유명한 『기독교강요』의 초판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프랑수아 1세에게 이 책을 헌정합니다. 사실 프랑수아 1세도 위에 언급한 안 좋은 일들 때문에 분위기가 안 좋아지긴 했지만 교회의 개혁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무엇보다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이들이 과격하고 위험한 이단이 아니라 진정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책의 인기는 엄청났습니다. 초판은 9개월만에 매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여러차례 중보되어 1560년에 최종판이 나오게 됩니다.

제네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칼빈은 지적인 논증 능력도 탁월했고 학문적 저술 능력도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이 적성에도 맞아보였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자신이 학문과 저술에 소명이 있다고 여겼죠. 그랬기에 칼빈은 조용한 곳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삶을 살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라는 지역으로 가서 조용히 공부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칼빈은 잠시 몰래 파리로 돌아갔었고 그곳에서 스트라스부르로 가려면 전쟁의 위험으로 인해서 제네바를 우회해서 가야했습니다. 그때가 1536년이었습니다. 당시 제네바는 이미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던 곳이었죠. 그곳에서 종교개혁을 이끌던 사람은 기욤 파렐이었는데 그는 종교개혁을 함께 이끌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칼빈이 제네바에 왔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죠. 그래서 곧바로 칼빈을 찾아간 파렐은 칼빈에게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자고 말합니다. 당연히 칼빈은 자신은 조용히 공부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지만 파렐은 칼빈을 놔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도망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압박을 하게 되고 결국 칼빈은 제네바에 남아 종교개혁을 돕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의도치 않게 칼빈은 제네바의 종교개혁가가 됩니다. 프랑스 출신이지만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가가 된 것이죠. 지금은 제네바는 국제적인 도시이고 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여담이지만 전 제네바에 가면 Le Relais de l’Entrecote라는 레스토랑을 가보고 싶더군요. 프랑스에도 지점이 좀 있는 이 사실이 맛을 보장해준다는 스테이크집입니다. 메인메뉴는 스테이크 단 하나라는 사실도 뭔가 맛집의 냄새가 나긴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다녀와서 블로그에 후기를 남겨놨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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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마치 억지로 제네바에 남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해서 칼빈이 사역을 대충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제네바에서 남아 종교개혁을 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여겼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비록 자신의 생각과는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이는 일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게을리 사명을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결코 수월할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제네바의 사람들은 종교개혁은 원했기는 했지만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종교개혁을 하고 싶어하지는 않았습니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이들이 원했던 것은 로마 가톨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칼빈과 파렐이 철저하게 개혁을 진행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반발했습니다. 사람들은 칼빈이 범죄자들이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을 못마땅해했고 결국 시의회와의 갈등으로 인해 칼빈과 파렐은 1538년 제네바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당시 취리히에 있던 불링거에게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결국 쫓겨나는 것이 확정되고 칼빈은 원래 목적했던 스트라스부르로 가게 됩니다.

스트라스부르

스트라스부르에 가게 된 칼빈은 원래 생각했던 대로 조용히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그곳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어가는 마틴 부처에게 붙들려 프랑스 난민교회 목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사역은 제네바와 비교할 때 매우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스트라스부르는 지금도 매우 아름다운 도시로서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있으면서 마틴 부처에게 신학과 목회사역의 방향에 대한 영향을 받게 되며 종교개혁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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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54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칼빈의 친구들이 그를 결혼시키기를 원했고 결국 두 아이가 있는 과부였던 이들레트 드 뷔르와 결혼하게 됩니다. 칼빈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지만 또한 어려운 일들도 있었습니다. 칼빈 부부의 아들은 태어난지 두 주만에 세상을 떠났고 칼빈의 부인 이들레트도 1549년 세상을 떠나게 되기 때문이죠. 이런 일들이 칼빈을 힘들게 했습니다.

제네바 복귀 및 개혁

스트라스부르에서 사역을 한지 몇년이 되지 않아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게 됩니다. 칼빈이 추방된 뒤 제네바의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그 기회를 틈타서 가톨릭 주교인 사톨레토 같은 사람이 제네바를 다시 가톨릭 진영으로 되돌리려고 편지를 보내는 등 애를 썼습니다. 결국 제네바 사람들은 칼빈에게 사톨레트의 글에 대한 반박을 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리고 칼빈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요청합니다. 물론 칼빈은 선뜻 돌아가고 싶어하지는 않았지만 파렐과 부처의 설득으로 인해 제네바로 복귀하게 됩니다.

이렇게 제네바로 복귀한 칼빈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네바 사람들은 칼빈이 복귀했을 때 그가 설교를 통해 이전에 자기를 반대했던 사람들에 대한 공격을 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전혀 개의치 않고 쫓겨날 때 마지막으로 설교했던 부분을 이어서 강해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칼빈이 어떤 사람인지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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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냉정한 독재자라는 오해를 받기는 하지만 사실 그런 여건이 되지도 못했습니다. 제네바의 시민조차 아니었기에 그는 투표권도 없었고 당연히 세속적인 공직도 맡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아무튼 칼빈은 이렇게 제네바로 돌아와 본격적인 종교개혁을 진행하게 됩니다.

칼빈은 아무 생각 없이 제네바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 교회법을 만들어서 제시했고 겸손해진 상황이었던 제네바 시의회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교회법에서 칼빈은 교회의 사역 직분을 목사, 교사(doctors), 장로, 집사들의 4가지 직분으로 나눕니다. 칼빈의 관심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 복음의 제일 큰 적은 로마의 교황이나 이단이나, 미혹케 하는 자들이나 독재자가 아니고 나쁜 기독교인들입니다.”[1]

그랬기에 칼빈은 올바른 목양이 이루어지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몇몇 목사들과 12명의 장로들로 구성된 컨시스토리라는 것을 만들어서 교회의 훈육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이 컨시스토리는 매주 목요일 만나서 일을 수행했습니다.

쉽지 않은 개혁

물론 그뒤로도 제네바에서의 사역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철저한 개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제네바 사람들은 프랑스 등 각종 지역에서 제네바로 몰려온 수많은 난민들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되었는데 이 악감정은 피난민 출신인 칼빈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칼빈을 방해하기 위해서 그가 설교할 때 일부러 기침을 하거나 의자로 요란한 소리를 내는 식의 치사한 방법으로 설교를 방해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서 칼빈마저도 자신의 사역이 거의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이에 주눅들어서 물러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반전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1555년 제네바에서의 선거에서 칼빈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의원에 뽑히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에 반발한 반칼빈파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피신해서 칼빈을 적대하던 사람들이 뿌리가 뽑히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덕분에 이때부터 칼빈은 원했던 일들을 더 힘있게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칼빈이 한창 힘든 상황이었을 때 벌어진 사건이 바로 세르베투스 사건이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자사람이었기 때문에 사실 가톨릭과 종교개혁 진영 모두에게 이단이었습니다. 그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위기에 몰려있을 때 몸을 피해서 제네바로 왔는데, 체포된 이후 오히려 담대하게 칼빈을 체포할 것을 요구하고 칼빈이 처형을 당하게 되면 재산을 몰수하라는 제안마저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칼빈의 입지가 좋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네바 의회는 칼빈을 검사로 세우고 세르베투스를 사형시키게 되죠.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칼빈은 두고두고 비난을 받게 됩니다. 칼빈은 의회에 관대한 사형 방법을 요구하기도 했고 세르베투스를 설득하려고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칼빈은 사형선고에 영향을 미칠만한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윤리 기준으로는 칼빈이 확고하게 사형을 반대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과 칼빈의 상황을 균형있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칼빈이 감당한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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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 칼빈은 종교개혁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제네바에 있으면서 많은 일들을 해냈고 당시 뿐만이 아니라 이후 시대에도 서구 시민사회의 원리를 세우는 것이나 공교육과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철학에도 영향을 주는 등 많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제네바에서 칼빈이 평소에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해보겠습니다. 주일에는 예배를 인도했고 격주로 매일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매주 신학을 가르치는 것에 3시간씩 투자했고 그리고 아픈 사람들을 방문하고 목사로서 나그네들을 돌보고 사람들을 견책하는 일들도 했습니다. 목요일에는 성도들의 훈육을 위한 컨시스토리에 참여해서 그 회의를 이끌었으며 금요일에는 목사회(the congregation)라는 이름의 성경 연구 컨퍼런스를 이끌었습니다. 설교를 하지 않는 주의 주중이라고 여유가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칼빈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여러 지역에서 박해를 통해 제네바로 온 피난민들을 가르치고 권고했으며 각지에서 박해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탄원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성경 주석도 저술해서 사람들이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의 주석은 성경의 거의 대부분을 다루었고 설교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쉽고 간결명료했습니다. 아무튼 그는 정말 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했죠.

그뿐만이 아니라 칼빈은 프랑스의 종교개혁을 위해서 프랑스의 지하 교회들과 접촉하고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나 다른 지역의 개신교를 따르는 통치자들에게 조언도 하고, 난민들을 훈련시켰으며, 선교사들도 파송해서 남아메리카에도 선교사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1559년에는 목회자들을 기르기 위해서 대학과 아카데미를 열기까지 했습니다.

목회자 칼빈

이렇게 많은 일들을 감당했지만 무엇보다 칼빈은 목회자였습니다. 칼빈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교회의 목사로 여겼고 자신의 최고의 의무가 설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칼빈은 성경을 해설하고 적용하는 것을 최고의 사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로손(Lawson)은 칼빈을 설교단을 자신의 사역의 심장이라고 여기는 성경의 해설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설교하는 것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칼빈은 성경 외에는 다른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칼빈은 매일 성경을 설교했으며, 설교의 능력 아래에서 제네바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제내바의 시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고 그것에 대해 변화됨으로써, 존 녹스가 훗날 말한 것처럼 이 도시는 복음이 유럽의 남은 지역과 영국과 신세계로 뻗어나가는 시발점인 새로운 예루살렘이 되었다.”[2]

또한 로손에 의하면 칼빈이 설교할 때 우선적으로 전하는 대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대상은 위대한 이 신학자의 명성과 능력에 가장 덜 감흥을 받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칼빈은 그 대상에게 가장 강력하게 설교했고 그가 쉽게 마음을 닫게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굴까요? 바로 칼빈 자신이었습니다. 즉 목회자로서 칼빈은 설교할 때 항상 자신을 염두에 두고 설교한 것이죠. 이것은 모든 목회자들이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하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 날들

많은 일들을 감당했지만 사실 그것들을 다 해내기에 칼빈은 몸이 너무 약했습니다. 그는 굶기를 밥 먹듯 했고 하루에 한 끼를 아주 조금만 먹었다고 합니다. 몸이 약했기 때문에 더 소식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사실 칼빈이 활동하기가 조금 편해졌던 시점인 1555년부터 그의 건강은 오히려 급격히 안 좋아지게 되어서 관절염, 담석으로 인한 통증, 치질, 신장염, 신장 결석, 통풍, 담 등 정말 안 아픈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564년에 삶을 마치게 됩니다. 원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품의 사람이었던 칼빈은 죽을 때에도 자신을 평범한 묘지에 묻어서 무덤에 표시도 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자신이 원했던 길이 아니었고 자신의 기질상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음에도 칼빈은 이렇게 전심으로 자신의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주변의 방해와 공격, 그리고 몸의 약함을 안고서도 말이죠. 

칼빈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네요. 다음 포스팅에서는 이제 영국 지역에서 종교개혁을 추구한 이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후스토 L. 곤잘레스, 『종교개혁사』

S. J. Lawson, The Expository Genius of John Calvin

F. L. Cross & E. A. Livingstone (Eds.), In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이정숙, “제네바 컨시스토리”


  1. Theodore Beze, Life of Calvin; 이정숙, “제네바 컨시스토리”에서 재인용.  ↩

  2. James Montgomery Boice, Whatever Happened to the Gospel of Grace? Rediscovering the Doctrines that Shook the World; S. J. Lawson, The Expository Genius of John Calvin 에서 재인용.  ↩

Over de auteur

재국

디자이너를 꿈꾸던 공대생 출신 신학도.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교회사를 공부 중이다.

Comments 8

  1. 안녕하세요, 종교개혁에 대해 찾아보다가 칼뱅이 이동한 경로가 이렇게 잘 설명된 자료를 찾게 되어 너무 기쁜 마음에 댓글을 남깁니다ㅠㅠ 혹시 만드신 그래픽 자료를 수업시간에 사용하여도 될까요?! 수업은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와 세계- 종교개혁과 종교개혁이 미친 영향 발표입니다. (아, 그리고 저는 교수님이 아니라 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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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안녕하세요, 교파 선택 고민에 서있는 신대원 준비생입니다.
    총신대 유튜브 강의보고 알게되어 왔습니다.

    재국전도사님 소개에 심리학과 영성를 중요하는 신학에서, 개혁주의로 회심 했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이유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왜냐하면 저는 합동측 교회 출신인데, 심리학과 영성에도 관심이 있어서요. 개혁주의와 심리학, 영성신학이 문제가 있는 건지, 또 부딪치는 관계인건지도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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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확인하네요. 심리학과 영성을 좋아하다가 개혁주의로 눈을 돌렸을 때에는 아직 신학을 많이 접한 때는 아니었어요.^^
      그리고 심리학이나 영성이라는 것 자체가 꼭 개혁주의와 배격된다고 생각되진 않아요. 사람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과 신앙의 신비를 인정하는 것은 개혁주의 안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죠. 다만 그 안에 내재되어있는 전제를 잘 분별하고 성경적인 틀을 잘 세워나가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3. 안녕하세요 : ) 우연히 블로그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유익한 글과 자료가 정말 많네요!ㅎ

    저는 O.LAB 라는 기독교 크리에이티브 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학생입니다~

    이번에 교회사에 유명한 인물들을 짧게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ㅎ
    혹시 이 블로그 내 재국님의 교회사 관련 글들을 요약/참고 해서 영상의 내용으로 사용해도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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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출처만 언급해주시면 괜찮을거 같아요 ^^ 유익한 활동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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