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전야: 공의회주의 이야기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도 교회에서 개혁을 외치고 노력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이 위클리프나 얀 후스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개혁을 추구한 이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공의회주의자들(conciliarists)’입니다. 조금 생소한 명칭인가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온 교회를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결정을 내리는 보편공의회를 통해서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려고 했던 이들입니다. 대표적인 보편공의회가 바로 니케아 공의회입니다.

교회 내에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후스와 위클리프 말고도 15세기 초의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중세 시대를 거쳐 교황의 권력이 점점 막강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기구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기구로 여겨지면서 여러 문제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일종의 수입원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한 명이 직무에 따라 받는 성직록(Benefice)을 여러개로 중복해서 받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 말은 교회에서 사람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것으로부터 관심이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일년에 한번도 들리지 않는 지역의 성직록을 가진 성직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문제들이 생겼지만 사실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와닿는 문제는 바로 대분열(The Great Schism)이라는 문제였습니다. 교황이 둘, 더 나아가 셋이 되면서 교회가 쪼개지고 다투는 이 사건은 1378년부터 1417년까지 약 4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셋이 되어버린 교황을 일컬어 ‘축복받기는커녕 저주받은 삼위’라는 말이 유행이 되어버릴 정도였습니다.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였지만 별 소용은 없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떠오르게 된 것이 바로 공의회주의(Conciliarism)입니다.

공의회주의의 핵심은 교황보다 교회, 그리고 그 교회를 대표하는 보편 공의회의 권위가 더 높다는 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의 동의없이도 공의회는 소집이 가능하며 필요한 경우 공의회의 권위로 교황직을 박탈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주장이 나온 이유는 당시에는 교황의 권위가 굉장히 높아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충만”(plenitudo potestatis)이라는 용어는 당시에 교황이 교회내에서 최고의 사법적, 행정적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잘 묘사하는 표현이었습니다. 법적으로 공의회의 소집과 해산은 오직 교황의 권위로 가능했습니다. 교회법적으로도 교황이 직위를 박탈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긴 했지만, 그것은 교황이 ‘이단’으로 빠진 경우에나 가능한 것이었으며, 사실상 교황보다 권위가 높은 이가 아무도 없다고 여겼기에 정당하게 교황직을 박탈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도 미지수였습니다. 그렇기에 공의회주의가 등장한 것이죠. 개개인 중에서는 교황이 가장 높지만, 공의회는 더 직접적으로 교회를 대표하며 그리스도로부터 권세를 받기 때문에 교황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공의회주의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들이 제안하는 해결책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공의회가 교황보다 권위가 높기에 공의회의 결정에 교황도 따라야 한다는 것, 그리고 둘째, 공의회를 정기적으로 5년에서 10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모이는 것을 통해서 지속적인 개혁을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8)에서 선포된 두 개의 교령 ‘핵상타’(Haec sancta)와 ‘프리퀀스’(Frequens)에서 잘 드러납니다. 콘스탄스 공의회는 세 명의 교황의 직위를 모두 박탈해버리고 새 교황 마르틴 5세를 선출하는 것을 통해서 대분열을 마무리 짓는 일을 성취해냅니다. 이 때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공의회주의자들은 장 제르송(Jean Gerson)과 피에르 다이이(Pierre d’Ailly)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생각처럼 개혁이 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분열은 해결되기는 했지만, 교황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공의회를 정기적으로 열어야 한다는 ‘프리퀀스’의 지시를 따라 모인 바젤 공의회에서 곧바로 교황과 공의회주의자들의 충돌이 시작되었습니다. 초반에는 교황이 밀리기도 했지만 결국 더 뛰어난 정치적이고 외교적 능력을 보여준 교황이 세속 군주들의 지지를 얻어내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대신 세속 군주들에게 다양한 권리들을 양보하게 되면서 교황은 재정난을 겪게 되고, 이것은 우리가 종교개혁 시기에 보게 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야기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공의회주의자들의 세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속적으로 교황에게 공의회를 열자는 요청이 있었고, 종교개혁의 지척에 이른 1511년에는 프랑스 왕의 비호 아래 교황의 동의 없이 피사에서 공의회가 열려서 공의회주의는 교황권에 다시금 도전장을 던지게 됩니다. 물론 교황이 재빠르게 대응해서 라테란에서 대립 공의회를 열어서 피사에서의 공의회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변절자 공의회(conciliarbulum)’라는 명칭을 얻게 되지만요. 계산이 빠른 프랑스 왕은 피사의 공의회를 버리고 교황과 협약을 맺게 되며, 이로써 교회내에서의 공의회주의는 힘을 한풀 꺾이고 정치적인 이론으로서 세속 역사 속에서 맥을 이어갑니다. 장장 한 세기 넘게 지속된 공의회주의자들의 개혁을 위한 노력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됩니다.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는 것은 일견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섣불리 판단해서 자기 생각을 합리화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지를 고찰해보는 것은 분명 유익할 것입니다.

공의회주의자들의 노력은 종교개혁이 갖는 또 다른 측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했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노력은 종교개혁에 뜻하지 않은 기여를 했습니다. 교황과 교황의 최고 권세를 주장하는 교황주의자들에게 공의회를 여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심어준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공의회주의에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개혁의 수단으로서 공의회를 열자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교황은 공의회를 열기를 당연히 꺼려했습니다. 이것은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크게 후회할 일이었습니다. 공의회를 열었다면 종교개혁의 전진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고 최소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가톨릭과 개신교가 갈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겠지만 말이죠. 공의회는 종교개혁이 시작된 1517년으로부터 28년이 지난 1545년에야 열렸습니다. 그때는 이미 일어난 개혁의 움직임을 막을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공의회주의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들은 종교개혁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사실 공의회주의자들의 개혁은 제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위클리프와 후스를 명백한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위클리프와 후스가 주장하는 개혁은 그들이 보기에는 위험하기 짝이없는 생각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그들의 개혁은 실패했고,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극단적으로, 더 총체적으로, 더 근본적으로 개혁은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2017년, 한국 교회에서는 긍정적인 모습보다는 부정적인 모습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교회의 세습문제, 목회자들의 각종 윤리적인 문제들, 그리고 교단과 교단이 속한 신학교에서 권력을 놓고 세상보다 더 교묘한 정치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모습들은 지금도 여전히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려줍니다. 그리고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을 바라보며 가슴 속 깊이 절망감을 느끼는 이들 또한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종교개혁 전야에 일어난 공의회주의자들의 절망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근본적인 개혁이 일어났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라는 섭리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개혁에 대한 논의와 노력은 항상 필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록, 아니 수포로 돌아간다고 느낄 수록 분노와 절망이 우리를 사로잡기 쉬워질 것이고, 개혁에 대한 긍정적인 원동력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개혁이 지향해야 하는 보다 근본적인 목표를 놓치게 될 수도 있겠죠.

종교개혁 전야에, 가장 어두워보이는 시기에 일어났던 공의회주의자들의 노력은 이런 면에서 우리보다 더 개혁적이시고, 더 놀라운 방법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다시금 바라보게 해줍니다.

참고문헌

Ehler, Sidney Z. and John B. Morrall, Church and State Through the Centuries: A Collection of Historic Documents with Commentaries (New York: Biblo & Tannen Publishers, 1967).

Oakley, Francis. ‘Almain and Major: Conciliar Theory on the Eve of the Reformation’.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70 (1965), 673–90.

_____________. The Conciliarist Tradition Constitutionalism in the Catholic Church, 1300–1870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Schatz, Klaus. 보편공의회사 (왜관: 분도출판사, 2005).

Tierney, Brian. Foundations of the Conciliar Theory: The Contribution of the Medieval Canonists from Gratian to the Great Sch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5).

 

* 그림 출처: By Unknown,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07475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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