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면은 나사렛에서 예수님 공생애 사역의 첫 장면을 보여준다. 3:23에서 약 30세 쯤 되었을 때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누가는 갑자기 예수님의 족보를 살핀다. 왜냐하면 이 아담의 자손이 이제 아담이 실패한 그 일에 성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4장에서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다. 물론 누가는 가버나움 등지에서 일어났던 이전 사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며 오늘 본문을 사역의 첫 사역으로 기록한다.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예수님은 오셔서 무엇을 하시는가?
둘째, 누구를 위해 오셨나?
셋째, 어떻게 그분을 받을 수 있는가?
첫째, 예수님은 오셔서 무엇을 하시는가?
두 가지를 위해 오셨다.
먼저,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 유대인 회당에서는 모인 회중 중 자격이 있는 남자라면 누구나 일어나 지정된 말씀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날 예수님이 일어나셨고 이사야가 주어졌다. 그리고 예수님이 거기서 찾아 이사야 61장 부분을 읽으신다.
이사야 61:1~2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1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누가복음 4:18~19
18 ㄹ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런데 누가는 이사야 61장의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물론 예수님의 오심에는 정죄와 심판의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신 것은 정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의 소식에서 은혜의 해만 선포된다.
이사야 61장은 출애굽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예수님과 청중 모두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장차 오실 분 메시야는 슬픔과 묶임에서 백성을 자유롭게 하시고 해방시키실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기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완전히 매듭지어버리신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그들이 아는 자들 아니었나? 당시에 흔한 이름을 가진 사람 중 하나 아니었나? 그런 청년이 ‘내가 이 메시야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중에 가장 흔한 친구가 일어나 성경을 읽고 나더니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야”라고 말한 셈이다.
둘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사명과 사역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본문은 해방신학의 핵심 본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동의하기 힘든 신학의 핵심 구절이라고 해서 우리 핵심 구절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사야 61장의 선포에서는 네 동사가 사용되었다. 1. 전파하다. 2. 보내다 3. 자유롭게 하다 4. 위로하다.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신다는 것을 위한 행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포하는 자로서 예수님이 기름 부음 받았음을 알게 된다. 물론 여러 내용을 담고 있지만 복음 선포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중심은 역시 복음의 전파와 선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축귀와 치유와 해방이 아니었다. 그리고 살펴보면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신다는 말씀에 따라 누군가를 실제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일을 예수님은 하신 적이 없었다. 세례 요한이야말로 감옥에 갇혀 해방되기를 기다리던 자가 아니었던가(요7:18-23)? 예수님은 여기서 당신의 복음을 설명하셨으나 세례 요한은 그 때도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
그러니 이사야 61장의 표현은 무엇보다 영적 차원의 문제였다. 영적으로 눈 먼 자들에 관한 것이었고 영적으로 갇힌 자들에 관한 것이었다.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을 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세 사역은 항상 있었으나 한 가지에 확실한 우선순위가 있었다. 예수님은 이동하실 때 단지 치유와 축귀 만을 위해서 어딘가를 가지 않으셨다. 가는 도중에 그 일을 행하시긴 했으나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 이유는 선포하시기 위함이었다. 온 밤이 되도록 고치셨으나 예수님은 다른 마을에서도 말씀을 선포해야 하며 이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말씀의 선포보다 다른 사역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자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물론 기쁨과 사랑으로 이 모든 일을 하셨으나 당신이 오신 목적은 아니었다. 누가복음에는 수많은 이적들이 기록되어 있으나 더 넓은 의미의 해방으로서 직접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성하실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었다.
둘째, 누구를 위해 오셨나?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오셨다. 가난하다를 의미하는 헬라어인 토코스가 만약 육신적인 의미라면 나머지 평행으로 등장하는 갇힌 자 눈 먼 자 등도 문자대로 받아야겠으나 그렇지 않다. 또한 성경을 살펴보면 실제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는 사실 상 마음이 가난하여 오히려 복음을 더 잘 받는 자로 그려진다. 따라서 여기서 가난한 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달리 말하면 영적으로 마음이 깨진 자이다. 왜? 이 말씀 뒤에 두 비유를 하시기 때문이다. 1. 사르밧 과부 이야기를 인용하신다. 그녀에게는 있는 것이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으며 마지막 것을 먹고 죽고자 했다. 절대적 빈곤을 보여준다. 2. 시리아 장군 나아만 이야기를 비유로 드신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두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나아만은 가장 부하고 가장 권위 있는 자였다. 그런데 이 둘을 함께 인용하시며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설명하신다. 사르밧 과부은 자신이 결핍된 자임을 알았고 나아만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그들은 채워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다. 이들은 자신이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조적 변화가 아니라 믿고자 하는 깨어진 마음이 가진 모든 이들을 향한 구원에 관한 복음이었다.
셋째, 어떻게 그분을 받을 수 있는가?
22절 마지막에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묻는다. “어이 이봐, 말도 잘 하고 꽤나 담대한데… 너무 튀는 거 아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하여, 딱 우리가 익숙한 만큼의 예수님만 기독교만 받아들이고 진짜를 마주하고자 하지 않지는 않은가? 우리는 예수님이 익숙해졌다. 하지만 예수님을 마주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이제 충분하다라고 그들은 말했던 것이다. 교회를 나가고 예배할 수 있으나 전혀 예수님과 일상에서의 영적 관계는 없을 수도 있다. 익숙함은 불신앙을 키울 수 있다. 단지 예수님을 놀랍게 여기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경배할만한 예수님이 필요하다.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다.
결론
첫째, 예수님의 사역과 임무는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준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 중 이 방법을 선택하셨다. 그분은 선포하고 전하셨다. 사람들은 어째서 놀랐던가? 예수님이 이야기꾼이어서였나? 너무나 지성적이셨기 때문이었나? 아니. 그분은 권세로 선포하셨기 때문이었다. 농부에게도 가서 선포하는 이유는 농부의 지성적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심기워진 생명을 가진 씨앗의 내적 능력 때문이다. 기독교를 기독교이게 하는 것, 그것은 복음이다. 기독교는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그것이 복음 전파이다. 그리스도를 전하자.
둘째, 단지 설교가 아니라 사람에 대해 알려준다. 이 메시지가 수용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해준다. 사르밧 과부와 나아만의 사회적 계층과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그들 모두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바깥에 있는 이들이었고 결코 하나님의 복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전혀 다른 정치적, 문화적, 민족적 차이를 가진 사람도 복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셋째, 단지 설교와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말해준다. 우리는 오해당할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복음을 선포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의지적으로 오해한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최고로 행하셨으나,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을 들을만했으나, 참 진리였으나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다. 예수님을 싫어하기에 당신을 싫어할 수도 있음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