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립 리 – 병고침과 믿음(마8:1~13)

믿음: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뜻과 능력을 가진 이를 요청하는 것

우리가 깨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별로 걸리지도 않는다. 내게는 아이가 둘 있는데 이 녀석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실망이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당장 원하는 먹을 것이 없는 것, 2달 뒤에 가기로 한 할아버지 집에 지금 당장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아이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문제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나 해결할 수 없는 것은 (1) 원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2)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치유를 위해서는 원하면서 고칠 능력이 함께 있는 자여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 깨어짐을 고치고자 하실 뿐 아니라 고칠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믿음이란 이 원함과 능력이 함께 있는 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본문의 두 사람이 보여주는 겸손과 믿음에 집중하자.

나병환자의 믿음

첫 사건은 산상수훈 직후에 등장한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셔서 이제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신다. 산에서 내려 오시니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다. 그리고 그 중에는 한 나병환자가 있었고 그는 예수님께 와서 구한다. 이 장면을 그려본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상황에 반응했을까? 아마도 뒤로 물러서며 당황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려고 하시는지 궁금해했을 수도 있다. 당시에 이 피부병을 가진 사람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격리시키는 것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구약 율법에 의해 의식법상 불결한 자들이었다. 이 사람은 바로 이 심각한 피부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물리적 아픔이 있었으며 사회적 고립으로 아파했던 사람이다. 종교적으로 영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내가 그에게 가야겠다’고 말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담대하게 한다. 예수님이 스스로 증언하신 그 분이시며 하겠다고 하신 그 일을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그를 담대한다. 그리고 숨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말한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왜 그가 이렇게 말했을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신 가까이 오기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정말 원하시는지 여쭤야 했다. 하지만 원하시면 반드시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았다. 이것이 그가 보인 믿음이었다. 예수님에게는 능력이 있으시다. 문제는 그분이 그를 고치고자 하는 원함이 있느냐였음을 그는 알았다. ‘주여 원하시나이까?’라고 그래서 물은 것이다. 진짜 믿음은 “저 고쳐주셔야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믿음은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원하시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침 받으라고 선언하고 선포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다. 우리는 ‘주께서 원하시면’이라고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의 능력과 의지

예수님은 먼저 그를 만지심으로 치유를 시작하신다. 그가 다른 존재의 만짐을 경험한 것이 언제였을까.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은 외부에 있는 이들을 향했다. 예수님께서 이런 최악의 상황에 있는, 무리에 속할 수 없는 바깥에 있는 자에게 손을 뻗치시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우리와 같은 이에게 손을 뻗치신 것이다.

예수님은 비누가 다른 것과 달리 더러운 것에 닿아도 함께 더러워지지 않듯이 그를 만져도 함께 더러워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에게는 그를 깨끗하게 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온전히 당신이 원하셨기에, 사랑하셨기에,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셨기에, 당신의 유일한 구속사에서의 역할을 드러내고자 하셨기에 그 일을 하셨다. 그리고 곧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달리 우리는 말을 하고 다른 이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요구해야 그 일이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이 이 일을 말씀만으로 곧장 이루셨다.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의지였다.

‘나’는 질병을 가지고 있다. 하루 종일 누워있을 때도 많다. 그런데 나처럼 아픈 사람이나 가족 중 아픈 사람이 있는 사람에게 이 본문은 오히려 어려울 수 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쉬워보이기 때문이다. 믿으면 눈깜짝할 사이에 병이 낫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짓된 가르침들이 믿으면 고쳐질 것이라고, 고침을 받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가르칠 때 더 어려워진다. 문제는 왜 예수님이 고치고자 하시느냐이다. 당시 이 사건들은 구속사에서 특별한 때에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단지 그들을 고치고자 하실 뿐 아니라 당신이 누구신지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이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고칠 수 있기나 하신 건가 의심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과연 나를 고치기 원하시는가를 의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고치고자 하는 능력이 분명 있으시며 뜻하고자 하시면 고치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현재 내가 아픈 것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단지 기적을 일으키는 자라고 생각하기 원하지 않았다. 그분은 영원한 왕이시며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좌우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은 주님이시다. 주님은 그분의 별명이 아니다. 그분의 직분이다. 그분은 만물의 주인이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완전한 치유를 십자가에서 갚을 주고 사셨다. 온전한 치유가 있다. 따라서 그분이 오늘 나를 치유하시는 것은 원하시면 당장하실 수 있으며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최악은 (거절이 아니라) ’아직은 아니다’이다. 이 곳에서 완전해지지 못하더라도 종국에는 온전케 될 것이다.

백부장의 믿음

두 번째 이야기를 살펴보자.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들어가셨고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한다. 하인이 중풍으로 누웠으니 고쳐달라고 구한다. 말씀만 하시면 고치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도 나병환자와 유사하게 예수님께 나아왔다. 로마인이었을테니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하인을 위해 왔다. 그렇지만 그 태도는 유사하다. 그는 겸손하게 예수님께 나아왔다. 백부장의 거절은 참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합당한 반응이다. 세례 요한도 그랬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때 우리는 그 분 앞에서 겸손하게 된다.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얻을 만해서가 아니라 자비로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래 내 것인 것을 뒤에 감추고 계신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은혜로 혹시 필요한 것을 하나라도 더 주실까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자세다. 감사의 반대는 침묵이 아니라 내가 받을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받을만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우리를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천부장은 예수님이 그 어떤 제한도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은 어떤 것에 방해받을 수 없는 것임을 그는 믿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모든 권세를 지니신 분임을 믿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권위가 있는 분임을 알았다. 그리고 이에 예수님은 놀라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예수님은 그 밑에 있는 사람이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놀라신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보고 놀라셨다. 그의 겸손을 보고 놀라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깨어진 마음으로 겸손한 믿음을 보이기를 보이신다. 우리는 믿음을 단지 원하는 것처럼 여길 때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굉장히 다르다. 믿음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예수님께서 하겠다고 하신 일을 하시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본문을 보고 예수님이 모든 것을 고치실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우리는 오히려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 믿음을 어떻게 세워갈 것인가. 누군가와 신뢰 관계를 세워가는 방법은 그 과거 행적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적은 어떠신가? 언제나 자비와 긍휼과 신실하심을 보이신다. 우리 믿음은 이 진리를 먹고 자란다. 또한 이것이 끝을 보여준다. 만약 믿음을 단 한 번 가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믿음은 지켜가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먹여 자라게 해야한다. 때로 우리는 믿음을 조화처럼 다룬다. 그냥 1년 동안 내버려둬도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믿음은 먹여야 한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분이 누구시며 하신 일을 보아야 한다.

잔치에 참여할 자격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인데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 잔치에 민족적 정체성으로 참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오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믿음이다. 온 땅에서 모여들어 믿음을 가진 자들이 이 잔치에 함께 할 것이다.

우리의 깨어짐을 우리를 고치기 원하시며 고칠 능력이 있으신 분에게 나아가자.

백부장의 하인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때에 바로 나았다. “네 믿음 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신 말씀은 참 안식인 것 같다. 가서 무언가를 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Over de auteur

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박사 과정 중 부르심을 받고 현재 시카고 베들레헴 교회 담임 목사로도 섬기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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