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죄로 물든 세상 뿐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악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경험하고 탄식하게 됩니다. 사실 이건 현 시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교회의 개혁은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재기 되어온 이슈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 개혁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교회가 늘 안고 가야할 과제라고 보면 될 거 같습니다. 하지만 세상과 교회에서 경험하는 악한 일들 때문에 낙심하게 되고, 하나님이 교회와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에 회의가 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 속한 루터파와 개혁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나라를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여기서의 ’나라’는 통치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 또는 그리스도의 통치(Regnum Christi)는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되었습니다. 영광의 나라(Regnum Gloriae), 능력의 나라(Regnum Potentiae), 은혜의 나라(Regnum Gratiae)로 말이죠. 각각 영광의 통치, 능력의 통치, 은혜의 통치라고 이해해도 괜찮습니다. 개혁파와 루터파 사이에 구체적인 용어 차이는 있지만 의미는 비슷합니다. 개혁파는 능력의 통치를 우주적 통치, 자연적 통치 등으로 지칭했고 은혜와 영광의 통치에 대해서는 인격적 통치 또는 경륜적 통치로 지칭했습니다.
영광의 나라/통치(Regnum Gloriae)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 완성될 나라입니다. 온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져서, 그리스도가 세상을 질서있게 다스리시는 아름답고 복된 나라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통치이므로, 우리가 소망해야할 나라입니다.
능력의 나라/통치(Regnum Potentiae)는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지금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그 과정과 하나님의 의도와 상세한 목적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아래에서 섭리에 따라 다스려진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으며, 이를 그리스도의 능력의 통치라고 표현합니다. 루터파와 개혁파는 여기서 섭리 가운데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가 신인(神人) – 즉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인지 또는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통치인지에 대한 이해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능력의 통치의 많은 부분, 아니 거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의도와 목적을 다 알려주시지는 않기 때문에, 함부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 많은 이들이 실수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의 통치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물론 영광의 나라의 완성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하나님께서 상세하게 우리에게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은혜의 나라/통치(Regnum Gratiae)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또는 인격적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각 사람을 감화시키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닮아 사랑에서 자라가게 하시고,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는 것 등 그리스도인의 삶을 인도하시는 통치를 가리킵니다.
이 세 가지 통치 개념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회의가 들 때 유익한 통찰을 줍니다.
첫째,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에 정면으로 대적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마음을 낙심하게 할 때, 그들도 그리스도의 능력의 통치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 악한 행동들을 허용하시는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의 통치 가운데 다스려지기에, 영광의 나라로 향하는 길목의 한 단계로 쓰여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 밖에서의 악한 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우리는 모르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기에, 이것은 믿음이 필요한 영역이기도 합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본다. 수많은 불합리, 너무나 부당한 고통, 실로 표현 못할 재난,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불공평, 그리고 누군가는 극도의 기쁨 속에서 다른 누군가는 극도의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대조들을 본다. 그렇기에 이것들을 생각하는 누구든지 다음의 둘 중 하나로 이 세상을 보도록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 세상이 사악한 신의 눈먼 의지를 따라 염세적으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보든지, 그렇지 않다면 성경에 기초하는 것과 믿음을 통해 언젠가는 이 삶의 미스테리들 가운데 충만한 천상의 빛의 여명을 드리울 그분의 절대적이고 주권적인 뜻, 우리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지혜롭고 거룩한 그분의 뜻을 의지하든지 선택해야 한다.” –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신론, 핸드릭슨 에베소서 주석(BNTC)에서 재인용.
둘째, 하나님의 능력의 통치를 신뢰하려면 은혜의 통치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의 통치는 은혜의 통치 가운데서 실재적으로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의 통치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능력의 통치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통치 밖에서 있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의 통치를 신뢰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에 회의가 생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의 한걸음을 내딛되, 그 걸음의 방향은 은혜의 통치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는 가운데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자라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은혜의 통치를 깊이 경험하는 것을 다른 이가 보고 감화된다면 더 큰 유익이 될 것이고요. 은혜의 통치 안에 거하며 능력의 통치를 신뢰하고 영광의 통치를 소망하는 것, 이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참고문헌
Richard Muller,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Grand Rapids: Baker Academics, 1985.
Hendriksen, William, and Simon J. Kistemaker. Exposition of Ephesians. Vol. 7. New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53–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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