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무엇인가요?
“숨”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딤후 3:16).1 우리는 호흡하지 못하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숨을 통해 호흡하지 못하면, 죽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창 1:28). 우리는 하나님을 호흡하며, 하나님으로 살고, 하나님으로 움직이고, 하나님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 17:28). 따라서, 하나님의 숨(말씀)이 부재한 인간의 보편적 운명은 참된 죽음뿐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서 성경이 필요합니다. 말인즉슨, 하나님의 말씀은 생(生)과 사(死)의 문제가 됩니다. 산소가 우리 폐로 들어와 생명 유지를 위한 대사 작용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대사 작용을 합니다. 그럼, 어떻게요? 하나님의 숨결이 우리의 영적 혈관에 녹아들기 위해서는 올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그럼,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저는 개혁 신학이 주창하는 성경의 해석 원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솔라 스크립투라 (Sola Scriptura)!” 즉, “오직 성경!”입니다. 루터를 시작으로 수많은 개혁 신학자들이 견지한 이 해석의 원리는 바로 “성경이 스스로 해석한다!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입니다.2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 참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3 이것은 하나님의 숨결로 된 성경이 일관되고 상호보완적이라는 의미입니다.4 쉽게 말해, 어떤 본문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다른 본문의 도움을 받아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1-4절의 예시
마침, 오늘 저는 성경을 읽다가 이해가 잘 안되는 본문을 만났습니다. 바로 창세기 6장 1-4절입니다.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그 무렵에, 그 후에도 얼마 동안,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거인족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새번역,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2001), 창 6:1–4.
어떻습니까? 이해가 잘 되시나요? 저는 이해가 잘 안 되네요. 창세기 6:1-4은 “노아와 홍수 심판의 이야기” 직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사람들 딸들은 누구인가?,” “네피림은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본문의 내용은 무슨 뜻인가?” (제 식대로 표현하자면,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등입니다.
그럼, 우리 같이 한번 해석해 봅시다. 우리는 주어진 본문을 통해 나무(미시적 관점)를 보고, 다른 본문들을 통해 숲(거시적 관점)을 보겠습니다.
우선, 주머니칼을 꺼내 본문에서 특이하게 생긴 나무들마다 표시를 해 봅시다. 문법적으로 본문을 봤을 때, 저자가 내러티브에서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서사의 골격을 잡아주는 봐이크톨(wayyiptol)을 제외하고, 강조를 나타내는 카탈(X-qatal) 동사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5
강조된 세 부분의 한국말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1절)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3절)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거인족이 있었다.” (4절)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새번역,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2001), 창 6:1, 3, 4.
본문의 저자인 모세는 이미 1절에서 ‘인류의 인구가 늘어났다’는 기본적인 정보를 줬습니다. 그러나 굳이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부가적인 정보를 주면서 우리의 관심을 그 “딸들”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분명히 특이합니다.
다음 강조는, 저자가 이야기를 설명하는 형식에서 갑작스럽게 주님께서 화자가 되어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은 인간의 삶의 유한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부가적인 정보로서 강조점은 “인간의 연수가 (길어야) 120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 또한 특이하네요.
그리고 마지막 강조는, 4절에 “네피림이라는 거인족이 존재했다”라는 사실입니다.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인간의 딸들이 결혼하여 낳은 존재입니다. 모세는 그 네피림이 누구인지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모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원 독자들(the original readers)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네피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뒤이어 나오는 부연을 통한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네피림이 고대 영웅으로 칭송받았던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일단, 미시적 관점에서 세 나무에 체크를 해 둡시다. 즉, “인류의 딸들,” “인간의 짧은 수명,” 그리고 “네피림”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체크해 두고, 드론을 띄워 좀 더 넓은 관점으로 이동해 봅시다.
베드로후서 2장 4-5절을 통한 창세기 6장 1-4절 조명
“성경이 스스로 해석한다!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는 원리를 따라,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 베드로후서 2장의 도움을 받아 봅시다. 우선, 4-5절을 볼까요?
4.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천사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지옥에 던져서, 사슬로 묶어, 심판 때까지 어두움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5. 그는 또 옛 세계를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를 홍수로 덮으셨습니다. 그 때에 그는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인 노아와 그 가족 일곱 사람만을 살려주셨습니다.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새번역,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2001), 벧후 2:4–5.
보세요. 4-5절은 “하나님의 아끼지 않으심”에 대한 두 가지 대상이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끼지 않으셨던 것, 하나는 “죄를 지은 천사들”이고, 다른 하나는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6 다시 말해, 4절은 하나님이 죄를 지은 천사들을 심판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고, 5절은 하나님이 죄를 지은 사람들을 홍수로 심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약성경의 헬라어 원문인 <네슬레-알렌드 28판 (Nastle-Aland 28th)>에 베드로후서 2장 4절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번역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천사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벧후 2:4, 새번역)입니다. 왼쪽에 관주를 보면, 창세기 6장 1-4절 (Gn 6, 1-4)이라고 표기되어 있네요.
즉 베드로는 창세기 6장 1-4절이 “죄를 지은 천사들과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숲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걸까요?
왜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천사”라고 했을까?
“잠깐만요, 창세기 6장 2절에는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여러분 중에 이런 질문이 생기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러게요. 기왕 질문이 나왔으니, 무슨 죄인지 알아보기 전에 이 질문부터 해결해 봅시다.
만약 베드로가 창세기 6장 1-4절을 염두에 두고 베드로후서 2장 4절을 쓰고 있다면, 그는 왜 타락의 대상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천사”라고 했을까요?
셉투아진트(Septuagint, LXX)라고도 불리는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최초의 역본입니다. 칠십인역이 가치 있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구약을 칠십인역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칠십인역은 창세기 6장 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호이 앙겔로이 투 떼우 (οἱ ἄγγελοι τοῦ θεοῦ)” 즉, 칠십인역은 “하나님의 천사들”이란 단어가 본문의 의미를 표현하기에 더 적절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두 번째 서신을 쓰는 베드로 앞에 칠십인역 파피루스가 펼쳐져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 6장 2절에 인간의 아름다운 딸들과 결혼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벗어난 천사 (유 1:6), 즉 “사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 또한 창세기 6장 1-4을 이해하는 숲이 됩니다. 자, 이제 그들의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알아 봅시다.
그들은 무엇을 잘못했을까?
“성경이 스스로 해석한다!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는 원리는 따라, 우리는 베드로후서 2:4-5을 통해 창세기 6:1-4이 “죄를 지은 천사들과 사람들의 타락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사탄들과 그를 추종하는 인간 군상의 죄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대체 그들은 무엇을 잘못한 걸까요? 혹시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는 원리를 통해 타락의 내용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베드로후서 2장 4-7절까지 보겠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천사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지옥에 던져서, 사슬로 묶어, 심판 때까지 어두움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5. 그는 또 옛 세계를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를 홍수로 덮으셨습니다. 그 때에 그는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인 노아와 그 가족 일곱 사람만을 살려주셨습니다.
6.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두 성을 잿더미로 만들어 [멸망시키셔서,] 후세에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7. 그러나 무법한 자들의 방탕한 행동 때문에 괴로움을 겪던 의로운 사람 롯은 구하여 내셨습니다.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새번역,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2001), 벧후 2:4–7.
베드로는 매우 구조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4-5절은 홍수 심판과 노아 가족의 구원이야기, 6-7절은 소돔과 고모라 심판과 롯의 구원이야기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일종의 패턴을 사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4-5a절: 타락한 천사와 인류의 심판
5b절: 노아의 구원
6절: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7절: 롯의 구원
바로, 심판과 구원의 패턴입니다. 베드로는 노아 (5b절)와 롯 (7절)의 구원을 같은 선에 두어, 심판이 임했던 두 시대 속에서 소수만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았던 공통의 이유가 본문에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인 노아 (5절, 새번역)”, 그리고 “의로운 사람 롯 (7절, 새번역)”입니다. 따라서, 노아와 롯이 구원을 받은 이유는 의로움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노아와 롯이 구원을 받은 이유가 같다면, 두 시대가 심판을 받았던 이유도 같지 않을까요? 베드로는 심판의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를 홍수로” 심판하셨다 (5절, 새번역).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두 성을 잿더미로 만들어 [멸망시키셔서,] 후세에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본보기”로 심판하셨다 (6절, 새번역). 일단 “경건하지 않았다”는 똑같은 이유가 두 시대가 심판을 받은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7절에 그 경건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인 예시를 제공합니다. “무법한 자들의 방탕한 행동 때문에 괴로움을 겪던 의로운 사람 롯”이라고 말입니다. 혹시 롯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베드로가 말하는 롯이 겪었던 괴로운 사건이 무엇인지 압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 성 사람들의 엽기적인 행각이 기록되어 있지요. 롯이 두 천사를 손님으로 맞이했을 때 (창 19:1-3), 그 소식을 들은 소돔의 모든 남성들이 떼로 몰려와 (창 19:4) 롯의 두 손님을 강간하려 합니다 (창 19:5). 이것이 소돔 사람들의 무법하고 방탕한 행동입니다. 그들은 마치 좀비처럼 “모든 것을 강간하겠다”고 달려듭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나의 육체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삼겠다는 삶의 태도입니다. 다시 말해, “음란”입니다.
창세기 6장 1-4절의 근본적 죄도 음란?
혹시,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심판을 받은 근본적인 이유가 “음란”일까요? 베드로의 관점으로 봤을 때, 그는 노아와 롯이 구원받은 이유를 “의로움”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두 시대가 심판을 받은 공통의 이유로 “경건하지 않았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 경건하지 않은 것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창세기 19장에 음란의 사건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병렬구조로 두고 있는 우리의 본문인 창세기 6장 1-4절의 사탄과 인간의 타락 이야기도 근본적으로 음란을 의도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숲을 통해 “음란”이라는 키워드를 얻었습니다. 이제 다시, 창세기 6:1-4로 돌아와 봅시다. 앞서, 우리는 본문에서 강조하는 세 그루의 나무에 표시를 남겨 뒀습니다. “인류의 딸들,” “인간의 짧은 수명,” 그리고 “네피림”입니다. 모세가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세 가지 요소들이 과연 음란과 관련되어 있는지 봅시다. 저는 각 요소들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이 스스로 해석한다!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는 원리를 사용하여 성경의 예로 논증하겠습니다.
첫째, 인류의 딸들과 사탄 사이의 결혼은 음란입니다. 우리는 본문이 타락한 인류의 대표성을 딸들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1절). 이는 인간의 딸들과 (원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었지만 자기 자리를 떠난) 타락한 천사 사이의 “결혼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어떻게 영적 존재인 사탄과 인간의 딸들이 결혼할 수 있을까요? 분명 영적 존재인 사탄과 육적 존재인 사람이 결혼을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설명할 때 “결혼 관계”를 사용하신다는 사실과, 그 백성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음란”으로 표현하는 것이 심심치 않게 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매춘부 고멜과 결혼하라고 명령하셨던 근본적인 이유, 그 사달이 난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언약으로 관계를 맺은 신랑 하나님을 버리고 “음란”하게 행했기 때문입니다 (호 1:2).
또 다른 예로, 에스겔 16장 또한 하나님과의 언약적 결혼 관계를 떠난 것을 음란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들판에 버려져 목숨을 구걸하는 핏덩이로 묘사하십니다 (겔 16:6).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아름답게 키우고, 사랑하고, 수치를 가려주고, 맹세하고, 언약을 맺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겔 16:8, 새번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왕비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겔 16:13).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결혼하신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아무하고나 “음행”하고, 남자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들과 “음행”했다고 말씀합니다 (겔 16:15-17). 이렇듯, 성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적 결혼 관계를 떠난 상태를 음란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6장 1-4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은, 인간이 사탄과 결혼을 통하여 그와 언약적 관계에 들어가기를 소망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떠난 사탄과 결합한 인간 군상을 “음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렇다면 왜 인간은 사탄과 결혼 했을까요? 우리는 본문의 두 번째 강조점은 “주님이 강조하신 인간 생명의 유한성”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6장 3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새번역,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2001), 창 6:3.
여기 보시면, 인간 군상들이 1-2절에서 사탄과 결혼한 목적이 등장합니다. 그 목적이 무엇일까요?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 않을 것 (3절 상반절)”이라는 말씀을 뒤집어 보면, 인간은 사탄과의 결혼을 통해서 생명을 영원히 유지하기를 바랐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영생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인간이 그렇게도 바라던 영생은 허락되지 않을 것임을 명확하게 말씀하시고, 그들의 연수를 (강조하시며) 120년으로 정확하게 제한하십니다.
우리 안에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전도자에 따르면,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전 3:11, 개역개정)”고 말합니다.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는 인간 내면에 있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에 대하여 “갈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내 안에 이 세상의 어떤 경험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갈망이 있다면, 그것에 관한 가장 개연성 있는 설명은 내가 다른 세상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서울: 홍성사, 2005), 216.
루이스의 논리는 재밌습니다. 그는 모든 갈망은 그 존재를 반영한다고 주장합니다. 가령, 인간의 배고픔이라는 갈망은 음식이 실제 존재한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아직 눈도 뜨지 않은 신생아가 엄마의 젖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어떻게 먹을 수 있는지 배우지도 않았는데, 본능적으로 빠는 행동을 합니다. 신생아의 빠는 행동은 세상 어딘가에 엄마의 젖이 존재한다 사실을 반영합니다. 또 인간이 성적 갈망을 가졌다는 것은 성관계가 실제 존재한다는 것을 반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인간 내면에 “영원을 향한 갈망”이 분명히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을 충족시키는 하나님 나라가 실제 존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내면에 존재하는 영원을 향한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것들로 채우려 시도해 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강영안 저자가 자신의 책 『철학자의 신학 수업』에서 부르스 마샬의 글을 인용한 명구(名句)가 이 갈망을 매우 적나라하게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유곽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찾고 있다.”
강영안 『철학자의 신학 수업』 (서울: 복 있는 사람, 2021), 25.
유곽은 창녀들이 매음 행위를 하는 집을 일컫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지금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영원을 향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유곽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만난 우물가의 여인이 자신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꿨고, 현재 동거하고 있는 사람은 남편이 아니었던 상태와 같습니다 (요 4:18).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에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영원을 향한 근원적 갈망을 사탄과의 결혼을 통해 채워보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곽의 문을 두드리는 허무한 행동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세기 6장을 배경으로 하는 인간 군상들은 타락한 거인들을 우상 숭배하고 있습니다. 사탄과 인간이 결혼한 결과로 생산한 것이 바로 네피림입니다. 즉, 네피림은 그들의 음란한 행위에 대한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알려주는 정보대로, 네피림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4절). 이를 통해 우리는 네피림이 고대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시실은, 민수기 13:33에 보면 가나안 정탐을 하고 온 사람들이 이렇게 보고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또 네피림 자손을 보았다. 아낙 자손은 네피림의 한 분파다. 우리는 스스로가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새번역,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2001), 민 13:33.
여기서, 네피림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기골이 장대했고 고대 전쟁 영웅이었다는 점과,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입니다.
네피림이라는 단어를 좀 더 분석해 볼까요? 네피림 (נְפִילִים)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옮긴 말입니다. 이 단어는 “거인,” “괴물,” “기형아”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고, 또 다른 의미로는 “하늘로부터 던져진”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7 아울러, 이 단어의 어원은 히브리어 나팔 (נפל)이라는 동사입니다. 이 단어는 “떨어지다,” “타락하다” 등 원래의 자리로부터 추락하는 이미지를 갖기도 합니다.
성경 본문과 어원적 의미를 종합해 보면, 당시 사람들로부터 우상으로 추앙받았던 네피림은 타락의 이미지를 가진 거인족으로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컨텍스트에서 이해해 보자면, 사탄과 인간 사이에 음란의 결과는 우상 숭배로 귀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는 음란과 우상 숭배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예를 요한계시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실 때 교회 안에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한 자다.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새번역,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2001), 계 2:14.
발람의 가르침은 민수기 22-24장에 나타난 바알 브올 사건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우상 숭배 사건인 바알 브올은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란한 일을 한다”로 표현되는 것을 주목해 보세요. 이는 우상 숭배라는 것이,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진 식욕과 성욕을 충족하는 방식, 즉 하나님을 버리고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음란과 우상이 연결되었다는 또 다른 예는 에스겔에도 등장합니다.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내게서 떠나갔고, 음욕을 품은 눈으로 그들의 우상들을 따라 가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였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악행과 그 모든 혐오스러운 일을 기억하고, 스스로 몸서리를 칠 것이다 (겔 6:9, 새번역).”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음란한 마음과 음욕을 품은 눈으로 우상을 따라 갔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6:1-4에서 인간들이 네피림이라는 우상을 추앙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음란하게 자신들의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결론적으로, 창세기 6:1-4에 나타난 근본적인 죄는 음란입니다 (벧후 2:4-7). 첫째로, 사탄과 인간이 결합한 행위 자체가 음란이었습니다 (1-2절). 둘째로, 인간은 그 음란을 통해 영생을 바랐습니다 (3절). 마지막으로, 그 음란의 결과는 우상 숭배였습니다 (4절).
성경이 스스로 해석한다!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성경 해석은 어렵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마치 깊은 숲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저와 같은 고민을 하신다면, 제가 창세기 6:1-4절을 해석했던 방법론을 사용해 보시기를 과감하게 제안합니다. 우선, 당신이 서 있는 현 위치에서 칼을 꺼내 가장 특이하게 생긴 나무 마다 표시를 남깁니다. 다음, 드론을 띄워 (없다면 나무라도 타야 합니다만) 숲을 관찰하기 바랍니다. 그 후, 다시 나무로 돌아와 숲의 큰 그림을 따라 당신이 표시한 나무를 면밀하게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성경이 하나님의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숨으로부터 내뱉어진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자증성(self-authentication of the Scripture)을 믿습니다. 곧 성경이 스스로를 증명한다는 원리입니다. 이를 통해, “성경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해석의 방법”이 가능하게 됩니다. 왜요? 단연 성경은 하나님의 숨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숨 쉬게 합니다. “성경이 스스로 해석한다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원리를 통해 하나님의 숨이 우리의 호흡 기관과 혈액과 온몸의 대사 작용에 생명을 부여하기를 소망합니다. 솔라 스크립투라 (Sola Scriptura) !
각주
1) 우리가 잘 아는 성경 구절인 디모데전서 3: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으로”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떼오프뉴스토스 (θεόπνευστος)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뜻하는 떼오스 (θεός)와 “숨을 내쉬다”는 의미인 프네오 (πνέω)의 합성어입니다. 원어적 생동감을 살려 직역하면, “하나님의 숨결로 된 모든 성경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Martin Luther, Assertio in omnium articulorum M. Lutheri per bullam Leonis X. novissimam damnatorum: Deutsche Übersetzung der lateinischen Originalausgabe, ed. Wolfgang Schnabel, trans. Eberhard Peusch, (Kamen, Germany: Spenner, Hartmut, 2000), 7.
3)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라는 원리가 가능한 이유는 우리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숨결로서 신적 권위 (the divine authority)를 가졌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경의 인간 저자 위에 원저자 (the original author)이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이 원리는 “성경의 자증성(self-authentication of the Scripture)”을 가능하게 합니다.
4) 성경 신학자 Vos는 성경 신학을 정의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구속 역사 속에서 유기적이고 점진적으로 연속성과 다형성적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the exhibition of the organic progress of supernatural revelation in its historic continuity and multiformity.). Geerhardus Vos, The Idea of Biblical Theology as a Science and as a Theological Discipline (North Charleston, SC: Createspace Independent Publishing Platform, 2016), 24. Vos의 정의는 성경이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5) Bergen은 히브리어의 강조를 동사 시제의 변화로 분석했습니다. 즉, 역사적 서사를 드러내는 바이크톨 (weyyiqtol) 동사에서 시제를 변화시킨 바브 카탈 (weqatal) 동사가 나타날 때, 강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Robert L. Bergen, ed. Biblical Hebrew and Discourse Linguistics (Sil International, Global Publishing, 1994), 72. 이것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Niccacci가 쓴 The Syntax of the Verb in Classical Hebrew Prose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2009.)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6) 저는 “옛 세계 (ἀρχαίου κόσμου)”를 “죄를 지은 사람들”로 바꿔 표현했습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 이 세계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고대 세계에 홍수 심판이 임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죄를 지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이는 의로 인해 방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 (노아와 그의 가족들)과 대조를 이루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즉, 직접적 심판의 대상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었습니다.
7) Ludwig Koehler et al.,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Leiden: E.J. Brill, 1994–2000), 709.
Comments 4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올려주실 때마다 유익하게 잘 읽고 있어요~^^
유익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