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 영생을 누리는 곳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요일5:13

 

1. 영생 = 영원한 삶?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 ‘영생’을 얻음을 믿습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혹시, 죽음 이후의 내세에서의 ‘영원한 삶’을 생각하지는 않으신가요? 진시황제가 영원히 살기 위해 불로초를 찾았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런 불로초를 얻게 되는 걸까요?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 마25:46

  성경은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간에 다 부활하여 영원토록 존재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은 단순한 ‘영원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전 사실 영생을 그런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뒤, 심판을 피하고 천국에서 영원히 기쁘게 살아가는 것” 정도로 영생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다분히 내세지향적입니다. 소망이 되긴 하는데, 그래도 멀리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도하고,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부분으로 여기게 되곤 합니다.

  

2. 복음의 선물인 영생

  사도 요한이 편지로 기록한 요한일서의 거의 끝부분의 말씀을 보면, 편지를 쓴 목적이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영생’에 대해서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의 초반부에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들이 함께 누리는 사귐’이 전함의 목적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 요일1:3

  사실 성경이 말하는,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값없이 받게 되는 영생은 시간과 존재의 측면에서의 ‘영원한 삶’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관계적인 측면에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때 말하는 영생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귐 – 친교’이자 더 확장해서 그 안에서 함께 누리는 ‘성도의 사귐’으로 보는 것이 더 맞는 듯 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초반에서 죄의 자백과 거룩,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점점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다루어 나갑니다.

  이런 영생의 개념은 요한복음에서도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 요17:3의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말씀에서 볼 수 있는 ‘안다’는 단순히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전인적인 앎을 이야기합니다. 결국 하나님 안에서의 사귐을 말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더 나아가서 같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b)라고 기도하심으로 그것이 성도의 하나됨으로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시편 말씀에서도 이런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 시133

  성도의 교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복이 ‘영생’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무엇인가를 다룰 때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과 그 안에서의 성도의 친밀한 교제가 영원토록 이루어지는 것’이 그 개념 속에 포함되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복음이 주는 놀라운 축복과 선물입니다.

 

3. 영생은 내세적인 것이 아니다.

  영생이 하나님과 성도 안에서의 사귐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죽음과 부활 이후에 누리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누려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고서 점점 자라가는 성화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더 알아가고 그분과의 사귐을 누려가게 됩니다. 이것이 영생을 누리게 하고 점점 더 누려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더 확장되어 그리스도의 지체로써 서로를 더 사랑하고 성도의 사귐을 통해 하나가 되어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물론 부활 이후에 영생을 완전히 누리는 것에 비하면 극히 일부일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 안의 죄성이 하나님 안에서의 온전한 사귐을 방해하고, 성도들 간의 온전한 사귐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4. 영생은 최고의 축복이다.

  이 세상의 삶에서 주로 고통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질병? 죽음? 가난?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고통은 ‘관계적인 고통’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관계’는 우리에게 매우 큰 기쁨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도 다 인정하는 기쁨인 남녀 간의 사랑도 ‘관계’입니다. 친구 간의 우정도 ‘관계’입니다. 누군가와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느끼는 놀라운 행복에 대해서 경험해보신 분들은 그 기쁨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복되신 존재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우리에게 주는 기쁨은 무엇보다도 클 것입니다. 단지.. 그것을 못 누리는 가운데 그 기쁨을 평가절하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성도가 하나되는 기쁨은, 분명 세상의 우정이나 사랑이 주는 기쁨 이상의 것입니다.

 

5. 교회 – 영생을 누리는 곳

  그러므로, 성도들은 복음이 주는 이 놀라운 선물인 영생을 누리기를 힘쓰며 동시에 그것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날을 소망하면서 살아야합니다. 더욱더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안에 거하며, 성도가 서로 사랑으로 연합하는 것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이 말하는 바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놀라운 기쁨과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참된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살아갑니다. 현대의 삶이 개인적인 것에 치중된 만큼, 교회 안에서 하나됨을 이루어가는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쉽게 교회를 옮기는 데에는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함께 영생을 이루어나가는 것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이 큰 이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과 성도의 하나됨 속에서 누리게 하시는 축복과 그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3)는 말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서 충만하게 나타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누리고 나타내는 것이 곧 영생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마땅히 소망해야하는 것일 겁니다.

 

6. 복음을 찬란히 나타내는 교회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 빌2:15,16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성도 간에 참된 사귐을 누려나가는 영생을 이루어갈 때에, 우리는 세상에 복음을 더 잘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이것이 바로 복음의 결과를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전하는 생명의 말씀을 밝혀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공동체를 갈망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스캇 펙 같은 사람들은 종교와 무관한 평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대형교회에서 탈피해서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교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고(꼭 좋은 현상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외의 다른 곳에서도 공동체를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공동체는 인간의 허무함을 채워주는 좋은 수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빠진 공동체는 값싼 진통제에 불과하고, 세상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 복음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고 주시는 영생이 무엇이며, 그것을 소망하는 가운데 참 교회, 영생을 누려나가는 참 교회,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이 그 안에서 드러나는 참 교회가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드러나기를 바라게 됩니다.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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