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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 – 마이클 호튼

 

  ‘세계관’하면 RPG 게임의 배경설정만 떠오를 때가 있었습니다(혹시 ‘창세기전’이나 ‘영웅전설’ 같은 불후의 명작을 아시는 분들이 계시는지..ㅎㅎ). 대학교에 와서 프란시스 쉐퍼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공대생의 무지함을 따끔하게 실감한 제가 처음 읽게 된 책이 영광이가 추천한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제임스 사이어)이었습니다.

  세계관은 말하자면 일종의 안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데, 일종의 ‘가치관’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에 기초해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돕는 안경’입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은 뭘까요? 개혁주의를 ” ‘오직 성경’을 기치로 스스로를 성경에 부합하도록 항상 개혁해나가는 주의”라고 정의내릴 때,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은 ‘가장 성경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경’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호튼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호튼의 책들도 그렇지만, 이 책은 좀 더 ‘불친절한’ 책입니다. 호튼 스스로가 약간 열린 입장을 보이는 부분도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많은 것을 이야기할 뿐더러, ‘개념 정의 – 설명’ 식으로 서술한 책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기 좀 까다롭습니다;; 책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약

  머릿말을 열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생각’이 교회 안에 퍼져있으며, 그것은 창조에 잘못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호튼은 설명합니다.

  1장은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다룹니다. 호튼은 이 세상이 ‘영지주의적인 이원론’과 같이 선과 악의 영적전쟁 구도로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여있다고 말합니다. 즉, 이 세상, 창조세계는 무조건 하나님께 대적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것이며 그리스도인도 세상에서의 ‘현세적인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 호튼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정, 미술, 음악, 문학, 과학, 교육 등의 분야에서 어떻게 현세적으로 충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는지를 설명하고, 아브라함 카이퍼 등의 현대의 사례도 언급합니다.

  2장은 ‘영역주권’과 ‘그리스도와 문화와의 관계’를 다룹니다. 영역주권이라는 개념을 다루는데, 영역주권은 ‘자기가 받은 소명의 영역 안에 머물러야 하고 경계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종교 개혁가들의 주장을 카이퍼가 받아들여 수정한 것입니다. 주어진 소명의 영역을 혼동하기 때문에 혼란이 발생합니다. 올바른 세계관을 가지려면 영역을 혼동하지 않고 바르게 구분해야 합니다.

  호튼은 이 장에서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개념을 소개하면서, 1) 문화와 맞서는 그리스도(세상과의 분리, 기독교와 문화를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 2)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기독교를 특정 문화와 지나치게 동일시 하는 것), 3) 문화를 초월하는 그리스도(자신이 속한 문화를 기독교적으로 정화하려고 하지 않는 것), 4)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두 세계를 다룸, 이중시민권, 즉 분리가 아닌 구별의 개념), 5) 문화를 변혁시키는 그리스도(자기 주변 세계를 변혁하는 하나님의 대리자 개념)의 5가지를 언급합니다. 호튼은 우리에게 역설적이면서도 변혁적인 4, 5번의 개념을 적절하게 갖도록 이야기합니다. 즉, 그리스도인과 세상 문화를 분리시키면서도  또한 세상에 영향을 주는 개념이 담겨있는데, 이 개념이 이 책에서 전체적으로 다뤄집니다.

   3장은 ‘기독교와 학문’을 다루는데, 창조된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땅의 일’은 ‘하늘의 일’과 혼동하지 않아야 할 뿐, 피해야할 대상은 아닙니다. 철학은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있어 성경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세상 학문을 가치 없게 여기고 멀리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 세상적 영향(심리학과 마케팅)을 깊이 받고 있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많은 것에 대해 비판합니다. 

  창조와 구속의 영역을 혼동할 때,  1) 이 세상에서 대두되는 문제를 과소평가하는 위험(성경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서서 성경이 모든 문제의 답이 될 것처럼 생각하고 성경구절을 남용하여 복잡한 문제를 쉽게 답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2) 기독교적인 특징이 보이지 않으면 악하다고 단정짓고 창조의 영역을 과소평가하게 되는 위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성경은 모든 문제에 답을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구원과 경건 등의 구속에 대한 문제에 답을 줍니다. 성경과 이성, 양자가 다루는 영역을 분명히 이해하고 적절한 유익을 얻는 것이 중요함을 이야기합니다.

  4장에서는 ‘기독교와 예술’을 다루면서, ‘기독교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술의 훌륭함과 저급함을 판단하는 성경적인 기준은 없으며, 예술의 1차 목적은 즐거움이이라고 말합니다. 예술은 설명적인 분석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며, 예술가가 논리적이거나 사실적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기독교적이지 않은’ 예술을 쓸 데 없는 낭비로 여기는 실용주의적 관점을 비판하고, 실용적인 이유로 예술을 기독교 영역 안에 가두려고 할 때 오히려 ‘이류 예술’이 되어버린다고 말합니다. 

  일상적인 것과 거룩한 것을 구분해서, 하나님 나라(구속에 속한 부분)와 문화(창조 영역)를 혼동하지 말아야합니다.  범속함과 거룩함의 개념을 구분지을 때, 종교개혁이 ‘거룩함을 선으로, 범속함을 악으로 보는 신플라톤주의의 이분법’은 거부하지만, 거룩과 범속은 구분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범속한 것은 악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범속한 것에도 복을 주시며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술은 창조물을 깊이 고찰함으로써 창조주의 진리와 아룸다움과 선을 반영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허락하신 활동이다”(128 page). 예술은 창조 영역에 속합니다. 창조 영역과 구속의 영역을 혼동하면, 신학도 아니고 문학도 아닌 것이 나와버립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담긴 글을 쓰더라도 그것이 기독교 소설임을 명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기독교적 특색을 명확히 나타내야하는 예술의 영역이 있습니다. (예: 교회 예배에서의 음악) 그러나 기독교적 예술을 하려면 지적, 예술적 측면에서 충분한 설득력을 갖춰야하며, 기독교에 동의하지 않는 불신자고 기독교적 예술의 고상함에 감동받을 수 있게 해야한다고 설명합니다. 그 예로 번연의 ‘천로역정’과 바흐, 헨델의 음악을 언급합니다. 

  우리가 거룩함과 속됨을 구분하지 못하면 ‘저급한 신학’과 ‘저급한 예술’의 기독교 예술이 그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구속보다는 창조가 예술에 어울리는 신학적 근거임을 인정하면서 문화에 참여해야하며, 예술을 대할 때 언제나 성경을 가르치거나 기독교적 목적에 기여하라고 강요하면 안됩니다.

  5장에서는 ‘어떻게 기독교인이 예술을 잘 이해할 수 있는지’를 다룹니다. 현대 예술에는 영지주의적 오만함과 엘리트주의가 숨어있음을 비판하고, 예술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설을 읽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저해하는 MTV를 끄는 것을 말합니다. (이 장은 좀 실천적(?)이죠)  예술을 종교나 윤리의 문제와 구분해서 생각할 것을 말하며, 역사적으로 시민윤리가 공통적인 합의가 가능했던 것처럼 예술의 기준을 보편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노력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또한 예술가의 입장이 부정적, 비윤리적이라더라도 그 입장에 찬성하지 않고서도 예술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 안에서는 문학적인 표현의 풍부한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다양성은 현대 기독교의 표현에서는 매우 부족하기에, 이런 다양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6장에서는 기독교와 과학에 대해서 말합니다. 개신교가 과학적 사실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기초를 제공하기에 개신교의 토양에서 과학이 촉진되 수 있었습니다. 구체적 사실이 사람을 일반원리로 이끌 것이라는 확신은 힌두교나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나올 수 없는 관점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인식체계가 전환되어 과학적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성경과 과학은 서로 모순이 없고 상충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침묵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교회도 침묵해야하며, 성경은 과학을 설명해주는 책은 아닙니다.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두 책으로, 자연과 초자연 영역을 구별해서 생각해야하고, 통상적인 측면의 섭리와 이례적인 측면인 기적으로 나누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계몽주의 과학관은 이신론을 가지고 섭리 교리를 세속화시켜서, 과학적 법칙들이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가 아닌, 그냥 일반적인 ‘원인’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칸트 이후 신앙은 이성 밖의 영역으로 밀려났고, 과학은 이성적이고 신앙은 비이성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관찰되고 검증 가능한 것만을 참으로 여기는 현대 관점에 대해 ‘상식실재론’과 ‘증거주의’의 관점을 대안으로 설명합니다. 상식실재론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추론 방식은 ‘삼단논법’ 같은 것이 아닌 ‘상식’이라고 말하며, 이성은 현실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칸트의 인식론의 영향으로 인해서 생긴) 인식주체의 내적인 관점에서 외부 세계를 파악할 뿐이라는 관점에 대해서, 외부의 증거가 내부의 생각과 전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증거주의는 우리가 실재를 알 수 있으며, 일상 생활의 결정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진리를 결정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적 관점으로 다른 사건들을 바라보듯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공정하게 바라봐야하며, 법정에서 법적인 증거를 제시하듯이 일상의 결정 방식에서 쓰이는 것처럼 변증을 다룰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외적 증거로서의 변증은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하지만, 회심을 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외적 증거는 외적 증거일 뿐 내적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호튼은 과학을 번영하게 했던 환경 조성에 일조한 종교개혁의 교리적 토대를 회복할 것과,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섭리에 대한 확신을 회복하고, (이해가능한 대상인) 물질세계를 향한 열의를 회복해서 과학을 대할 것을 말합니다.

  7장은 ‘일과 휴식’을 다룹니다. 하나님을 영적인 영역으로 몰아내고 거룩성과 초월성을 상실한 현세의 일과 여가는 결국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평일에 일을 하는 목적은 복음전도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종사하는 삶입니다. 증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서 해방되어야하고,  오히려 직업선택에서 복음전도를 내면의 동기로 삼지 않을 때 자기 믿음을 증언하는 일에서 가장 적절한 위치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류가 세상을 다스리는 소명을 수행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일반은혜를 베푸시며, 일은 거룩함을 잃었으나 창조 영역에서 하나님이 일반은혜 가운데 주신 소명이자 선물입니다.

  또한 우리는 여가를 ‘종말론적인 관점’, 궁극적인 일(구속)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참된 구원의 안식이라는 실재를 가리키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안식일의 개념은 주의 날로 옮겨졌습니다. 주일은 세상에 나가 섬기기 위해 에너지를 교회 안에서 재충전하는 날입니다. 가정의 영역에서 주일을 어떻게 보내고 여가를 어떻게 사용해야할지도 호튼은 언급합니다. 가정을 작은 교회로 보고 가정과 결혼생활을 그 자체로 하나님의 목적으로 봅니다. 그리고 일상사의 사소한 것들을 초월적 관점으로 연결시키도록 이야기합니다. 

  8장에서는 ‘현대세계의 특징’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현대성은 르네상스, 계몽주의 시대부터 태동되었음을 이야기하며 호튼은 그것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현대성의 특징은 진보에 대한 신념(정,반,합의 변증법, 완성으로 나아가는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진보에 대한 신념)과 인식 주체가 지식의 원천이 되어 보편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성적 종교의 영역을 윤리의 영역으로 변형시키고, 계몽주의 아래서 현대성은 인간 이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세계대전이 2번이나 일어났지요..) 현대성은 사람을 진보한 기계에 불과하다고 인식하며, 뿌리없는 문화를 만들고, 대인관계의 구도를 완전히 바꿔놨습니다. 현대성의 영향력을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고 호튼은 말합니다.

  결론에서 호튼은 세상과 분리되지도 말고, 세상에 융화되지도 말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소유가 아닌 상태로 있어야하며, 그럴려면 기독교 신앙을 충분히 잘 알아야 합니다. 사업 성공을 은혜의 표시로 착각하고 재해를 정죄의 표시라고 단정하는 등의 일반은혜와 구원은혜를 혼동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성과 사람의 도성을 혼돈하지 말하야 합니다. 현대세계로 오면서 누리게 된 복들의 많은 부분이 종교개혁에 그 근원이 있었음을 말하고 신앙의 기초를 재확립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며 교리와 삶의 순결함을 회복할 것을 강조합니다.

 

생각

  쓰다보니 좀 길군요… 그냥 정리만 했을 뿐이고, 많은 부분을 생략했는데 말입니다.  읽다보면, 생각할 부분이 참 많습니다. 각 장별로 리뷰를 해도 다룰 부분이 많은데, 한번에 리뷰하기엔 사실 벅차네요. 거룩과 범속을 나누고, 창조영역과 구속영역을 구분하는데, 특히 문화와 예술 영역에 있어서는 이게 참 구분하기 힘든 영역이 있는 거 같습니다. 겹치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술의 판단 기준에 대해서도 조금 모호하게 열어놓으면서 힘써서 기준을 잡아야 할 부분으로 언급을 합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호튼은 각 영역의 고유성을 인식하고, 창조와 구속이라는 영역의 틀에서 바른 구별의 자세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지만, 주어진 위치와 자리를 바르게 잡은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결국 그 두가지의 혼돈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 있는 많은 혼란의 원인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기준을 가지면, 우리는 ‘기독교당’이라는 이름으로 정치판에 뛰어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신정국가를 완성시키도록 교회에 소명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일반 은혜 안에서 다루어지는 영역이며, 그리스도인이 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가운데 각자 자신의 소명에 따라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주위의 모든 사람을 붙들고 복음을 전하는 것에만 헌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그것에 부합되지 않는 모든 것을 가치없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 본분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회자와 선교사가 되는 것이 특별하고 하나님 앞에 고귀한 일이며 다른 것은 세속되고 뭔가 헌신되지 못한 일이라는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거룩함과 범속함의 영역 둘 다 가치있는 부분이며,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 안에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하나님께 영광되는 일입니다. 소명없는 목회자는 고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를 끼칠 뿐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대를 이어서 목사를 한다는 것이 왜 그리 복된 것이라고 여기는지 전 별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재능있는 사람을 다 교회 안의 일만 하도록 데려와서 재능을 썩히게 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계발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들보다 일을 못하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좀 더 심합니다. 일단 미국교회와 우리나라 교회들의 홈페이지만 살펴봐도 엄청난 차이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정리하기 어려운 책이긴 하지만, 읽으면서 생각할 거리를 참 많이 주는 책입니다(차마 다 정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음에 세계관 관련 책을 더 리뷰할 때, 비교하면서 다뤄보면 좋을 거 같습니다^^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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