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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이란? 제7강 전적 타락(1/2)

Summary 요약

 

cfile3.uf@193B4F344CFF710A31FBC2.png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알미니우스와 개혁교회의 후대들 간에 논쟁이 발생했다. 도르트 신경에 논쟁이 집중되었는데, 이 신경을 통해 알미니안 교리는 정죄받았고 개혁주의 교리는 재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 주장되었다.

   이들은 외우기 쉽게 TULIP이라는 머릿말로 불리운다.

  1. Total Depravity 전적 타락
  2.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3. Limited Atonement 제한적 속죄
  4. Irresistible Grace 저항할 수 없는 은혜
  5.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견인

여기서 첫 시작점인 전적 타락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어지는 네 가지를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이다.

 

cfile25.uf@113B4F344CFF710B326740.png이 교리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중점이 되었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명하시고, 명하신 것을 주신다.Command what Thou wouldst, and grant what Thou dost command’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반박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전반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후반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을 도덕적으로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cfile6.uf@123B4F344CFF710B33D4E9.png결국 ‘전적 타락’ 교리는 개혁주의가 원죄를 어떻게 보느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죄는 첫 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담의 첫 죄로 말미암아 인류가 짊어지게 된 첫 죄의 결과를 의미한다. 첫 죄의 결과로 인류는 타락했고, 그것은 인간 본성 전체가 죄의 힘에 의해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결국 원죄라고 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타락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이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아니다. 

 

그림_4.png전적 타락은 극도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악할 대로 악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적 타락은 인류가 직면한 타락이 육체와 정신과 의지, 전 인격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전 인격이 죄의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R.C.Sproul은 전적 타락을 ‘극단적radical 타락’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본다. (비록 TULIP과 같은 멋진 첫글자 조합은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용어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인간은 원래 착하다고 생각하며 죄는 인간 본성의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타락은 인간의 중심, 곧 마음 자체의 상태다.  

  따라서 인간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는 작은 조정이나 교육, 행위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안으로부터의 변화, 곧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극단적인 타락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성령으로 중심이 변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거듭나는 것이 죄를 한 순간에 완전히 쳐부수는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완전하게 죄를 죽이게 되는 마지막은 천국에서의 영화의 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Thoughts 깊이 생각하기

  대학 시절 저는 창조-타락-구속의 관점으로 세계 모든 것을 바라보는 기독교 세계관에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제임스 사이어의 책들이나 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하는 신국원 교수님의 책 등을 많이 봤었죠. 그 때 세상 보는 눈이 정말 많이 바뀌었는데, 가장 많이 바뀌게 한 것이 바로 ‘타락’ 부분이었습니다. 전적 타락에 대해 이해하고 나자 나 자신과 타인, 그리고 지상의 교회와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깊이 생각해볼 때마다… 이 교리가 너무나 많은 진리들을 빛나게 해주는 배경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지성은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계시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아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충분히 분석이지 못하고 충분히 종합적이지 못합니다. 충분히 보편적이지 못하고 충분히 개별적이지 못합니다. 겉과 속을 모두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알고 난 이후에도 적절한 질서 가운데 그것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이 최고가 되고, 때론 자연이 최고가 되고, 내가 최고가 되고, 내가 자연이 되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립니다.

  단지 인식 영역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은 고장나버려서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무엇보다 더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아름답게 여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름답게 여기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 일하시는 것은 참 탐탁치 않습니다. 하물며 보기에도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라고 하면 살 수 있겠습니까? 힘들 겁니다.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나의 영은 더 이상 아름답지도 않고 순수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눈에 보일 때까지 깨닫지 못하고, 영영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없는 것 취급해버립니다. 그리고 영적 교제의 즐거움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아름답다고 여겨지지 않는 존재와 더 이상 아름답고 즐겁게 여겨지지 않는 대화를 나누는 건 전혀 유쾌하지 않겠죠.

  지적으로 타락하고, 입맛만 싸구려가 되버린 것이 아닙니다. 나의 육신은 참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해낼 수 없습니다. 능력이 저급해져버린 것이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뿐입니다. 병들고 지칩니다. 욕구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고 절제가 불가능하며 용솟음칠 때마다 욕구를 채움으로 육신을 달랩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타락해버린 인간은 온전히 지각(지각의 대상이 영적인 것이든 육적인 것이든)할 수 없고, 지각해도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지도 못하거나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 없게 되었으며, 어떤 것을 행할 능력도 없거나 불완전해졌습니다. 

  이 교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알게 됩니다. 이 교리를 인정할 때만 비로소 참된 의미에서 겸손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는 마음밭이 됩니다. 나 자신의 순종을 자신의 의로 여기지 않게 되며, 다른 사람의 실수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내가 아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아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잘나가고 완벽해 보이는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며 아무리 못났고 불완전해보이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죄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가난한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며, 그분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인정하고 즐거워하며 기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자명한 사실은 전적 타락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나머지 네 가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첫 번째가 인정이 되면 나머지 네 가지는 비교적 쉽게 인정됩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다음 글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Over de auteur

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Comments 3

  1. 1) 인간이 타락하긴 했지만 그 타락이 아담의 원죄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담처럼 모든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지으시기 때문입니다. 영혼창조설을 개혁주의가 믿습니다. 하나님이 각 개인의 영혼을 창조하실 때 타락하거나 원죄를 범한 영혼을 창조한다면 하나님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합니다.

    2) 만약 타락한 상태로 태어나 그 어떤 선도 택할 수 없고, 계명도 지킬 수 없는 존재라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증거이고,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인간이 원죄로 인하여 태어날 때부터 그 본성이 전적 타락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3) 더 자세한 내용은 유투브에서 조봉상 목사의 ‘원죄론’을 참고하시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2. 큰 은혜 받고 갑니다. 깔끔한 정리와 적용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외국 생활이 쉽지 않고 코로나로 힘들텐데 –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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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진 에 응답 남기기 응답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