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적 선택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셔서 구원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실 때 그분은 어떻게 선택하시는가? 어떤 이유로 선택하시는가? 조건 선택은 하나님께서 미래를 미리 아심을 통해서 선택하신다고 가르친다. 그는 누가 믿음을 가질 지 아시고 그들을 구원으로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반대로 무조건적 선택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의 절대주권적 결정으로 당신이 원하시는 이를 선택하셔서 구원하신다고 가르친다.
로마서 9:10~13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구약의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선택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장자에게 상속권이 넘어가는 전통을 뒤집으시고 동생에게 상속권을 주신다. 바울은 이것이 분명 야곱이나 에서의 행동의 선함이나 악함에 의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롬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는(R.C.Sproul) 신학생 시절 비록 인간은 구원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음을 믿었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는 믿기 힘들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어떤 사람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주지 않으시는 것이 너무나 공평해보이지 않았다. 에드워즈나 다른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글을 읽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다만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진리라면 가르쳐야 한다는 강한 확신에 의해 가르칠 뿐이었다.
우리는 바울이 13절까지 자신의 논지를 밝힌 뒤에 14절에서 반론을 예상하고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 이 교리를 싫어하고, 이 교리를 들은 뒤에 ‘불공평해요!’라고 말할 것을 예상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우리에게 ‘그렇다고 하나님이 불의하신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롬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5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말한다. 언제, 누구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실 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적 권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 무리에게 은혜를 주기로 결정하시고, 다른 무리에게는 주지 않기로 결정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에는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그룹은 공의를 받고, 다른 한 그룹은 은혜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도 불의를 얻는 사람은 없다. ‘불공평’은 없다.
9:16~18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구원은 의지를 기초로 한다. 물론 그리고 그 의지는 자유의지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기초한다. 만약 나의 의지 위에 은혜가 서 있다면,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나를 구원하게 한 나의 의로운 행위들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말할 것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Thoughts 깊이 생각해보기
어쩌면 문제를 너무 간단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다 결정하셨다는거잖아!? 라고요.
하지만 우리는 ‘결정’이라는 단어에 너무 목숨을 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엔… 우리가 ‘결정’이라는 단어에 예민한 이유는 ‘자유’라는 말에 목숨을 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침범당하는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예민합니다. (또는 계몽주의 이후 더 예민해졌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롭게 자신이 세운 지성적 기준에 따라 의지를 행사하는 것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제 자유라는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유는 결코 침해당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 아니, 엄밀히 말해서 개인을 개인이게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수많은 ‘권리’들이 난무하게 된 것도 결국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의 자유는 이제 신성불가침의 가치가 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망가뜨릴 권리가 있다’라는 말을 신봉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펴도, 어느 누구와 잠자리를 함께 해도, 마약을 해도, 술독에 빠져 지내도, 이 말로 다 용서가 되었습니다. ‘아니 내가 책임지겠다고~ 그냥 내가 지금 이렇게 하고 싶다는데 누가 뭐라 그래~’ 라면서 말입니다. 나는 스스로가 자유를 마음껏 향유하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려하는 멋진 어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우리의 자유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 참으로 합리적이며 동시에 짜릿한 자유에 대한 신봉은 사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 또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무지에서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의 오대강령 TULIP의 시작이 T(전적타락)입니다. 논리적으로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음을 믿지 않는다면 무조건적 선택을 받아들이기 힘들 겁니다.
다음은 위에 언급한 제 사고방식의 문제점들입니다.
1.전 제게 자유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게 자유란 없었습니다. 제게 선을 행할 자유는 없었습니다. 전 죄인이었기에 죄를 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전 제가 책임질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 책임질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책임질 수는 있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죄인이라면, 죄의 삯은 사망이니(롬6:23), 내 상태를 책임지는 궁극적 방법이 죽음밖에 없는데.. 책임을 진들 나의 존재가 사라지니 책임을 지는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3.전 자유가 가장 큰 가치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사실 저는 자유라고 믿었던 그 자유를 주장함으로 저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는 내가 가장 높은 가치를 둔 것이 자유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 가장 높은 가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은 뒤집으면,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는 것이 싫었다는 뜻입니다.
4.저는 제가 자유로우면 제가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일단 저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고,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제 자신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가장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행복은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사실 가장 큰 충돌은 여기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자유를 피를 흘리며까지 지켜내려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행복과 직결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분 사실입니다. (오늘 마침 5.18이네요. 이 자리를 빌어 자유를 위해 피흘린 선배들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그런데 자유 자체가 우리의 행복을 담보해주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결정’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느끼기 전에, 다시 말해 U로 넘어오기 전에 T에 충분히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노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폭력으로 느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자유를 축소시켜서라도 우리의 자유를 자유롭게 하길 원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까지도 완전히 타락했음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죄의 삯으로 사망을 마주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공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그냥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드러나며 그분의 죄를 미워하시는 공의가 돋보이게 됩니다. 내가 건짐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공평해지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의 공의로 죽음에 처하게 내버려두었어야 했을 저를 은혜로 건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행복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죽어 있었고, 우리는 불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어떠함에 전혀 상관없이 죽었어야 할 나를 살리시기로 결정하시고 정말로 살려주신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회귀합니다.
주여, 홀로 영광받으소서.
Over de auteur
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박사 과정 중 부르심을 받고 현재 시카고 베들레헴 교회 담임 목사로도 섬기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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