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이란? 제 10강 제한적 속죄

Summary 요약

 

  제한적 속죄는 칼빈의 오대강령 중 가장 논쟁이 치열한 부분이기도 하다. 제한적 속죄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미치는 효과나 가치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충분하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는 모든 이들에게 속죄의 모든 효과가 완전하고 풍성하게 부여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모든 이들에게 충분하지만, 일부에게만 유효하다. 즉, 믿는 이들에게만 구원은 주어진다는 뜻이다. 이 부분이 바로 보편구원론과 차이를 가지는 부분이다. 제한적 속죄 교리는 사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것의 원래 목적, 계획, 디자인에 대한 문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방식으로 계획하셨는가?

                       OR

  영원으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 계획 속에서 속죄하여 구원하는 방식으로 계획하셨는가?

  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R.C.Sprould은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라는 용어보다 절대적 구속definite redemption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 사역을 선택된 자들에게 구원을 주기 위한 관점에서만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제한적 속죄 교리에 대해서는 많은 반대가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존 오웬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의 사망의 죽음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에서 굉장히 자세히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벧후3:8절 이하에 등장하는 내용에 대한 반박에 대해서만 다루어보기로 한다. 

  벧후3:8~9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부분을 보면 우리가 제한적 속죄에서 주장하는 것과 다른 내용을 베드로가 가르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다양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표현을 영어로는 모두 will로만 번역한 데서 오는 문제다. 

  이 구절에서는 ‘원하시느니라 willing’과 ‘아무도 any’의 의미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뜻(영어로 will이라고 번역된 말씀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로 나뉠 수 있다. 

  주권적 하나님의 뜻 The decretive will of God 

  –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뜻하신 것은 무엇이든 달성하신다는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뜻이다.

    만약 베드로가 여기서 이런 의미로 ‘원하시느니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면 이 구절은 정확히 보편구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해석된다. 그 누구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교훈적 하나님의 뜻 The Preceptive will of God

  –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명령들을 뜻한다. 십계명과 같은 것들이 여기 속한다.

    이 구절에서 베드로가 말한 ‘원하시느니라’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라면 해석이 매우 어색해진다.

 

  의향으로서의 하나님의 뜻 God’s will of Disposition

  –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사용된 ‘원하시느니라’는 이런 의미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말씀에서 만약 ‘아무나’가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면, ‘원하시느니라’는 의향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으로밖에는 해석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맥락에서 ‘아무나’는 ‘모든 인류’를 의미하는 것 같지 않다. 영어에서 any라는 단어는 단독적으로 잘 사용되지 않으며, 사용될 때는 생략된 어떤 그룹이 있어서 ‘어느어느 그룹의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9절을 살펴보면,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문법적으로 이 문장에서 ‘아무도’는 ‘너희’와 상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베드로가 말한 ‘아무도’는 ‘너희 모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이 ‘너희’는 여기서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이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Thoughts 깊이 생각해보기
 
TULIP의 다섯 송이 꽃잎 중 우리 마음이 본성적으로 가장 거부하는 꽃잎이 아마 이 L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TULIP은 아름다워야 할 것 같은데, L만은 그다지 아름다워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백성들만을 구원하신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 운명론적인 것 같고,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만들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R.C.Sproul은 짧은 강의를 통해 존 오웬의 논의를 빌려와 제한속죄 교리를 방어합니다. 그래서 논의가 구원론이 아닌 신론으로 넘어가버리는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실제 그렇습니다. 3번에서 설명하는 바는 하나님의 뜻(또는 의지)에 대한 세 가지 서로 다른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세 가지 다른 의미와 더 깊은 논의는 R.C.Sproul의 무료 ebook인 Can I Know God’s Will?에 잘 나와있습니다. 로고스는 여기서, Kindle용은 여기서 받을 수 있습니다. 책은 $4 네요.) 이렇게 세 가지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나서 보편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요 근거 구절인 베드로후서 3:8-9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의향을 의미하는 것이지 주권적으로 세계를 다스리시며 결코 변하지 않는 그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론 논의를 신론에서 해결한 것 같지만, 구원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 논증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닙니다. 뿐만 아니라 신학함에 있어서 모든 논증이 탄탄한 신론 위에서 전개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짧은 강의 시간 탓인지 R.C.Sproul은 여기서 베드로후서 3:8-9를 통한 입증만을 시도할 뿐 논의를 더 밀고나가지는 않습니다. 아쉽죠. 그렇다고 제가 여기서 매우 길게 제한속죄 교리를 논증해나가는 것은 이 포스팅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교리를 조금 더 심도있게 소개하는 것은 다음 기회에 다른 포스팅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말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저도 TULIP 중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다른 네 가지 요소와 왜 필연적 연관성을 지닌 것인지 이해를 못한 부분이 바로 이 제한속죄 교리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네 가지 요소와의 필연적 연관성을 이해하게 되고, 이 요소 역시 다른 네 가지 요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극대화하는데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오히려 큰 은혜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제한속죄에 대해 다루게 될 포스팅에서 이런 제 생각의 변화가 잘 반영될 수 있기를 바래야겠네요.   
 
Over de auteur

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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