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ary 요약
제한적 속죄는 칼빈의 오대강령 중 가장 논쟁이 치열한 부분이기도 하다. 제한적 속죄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미치는 효과나 가치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충분하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는 모든 이들에게 속죄의 모든 효과가 완전하고 풍성하게 부여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모든 이들에게 충분하지만, 일부에게만 유효하다. 즉, 믿는 이들에게만 구원은 주어진다는 뜻이다. 이 부분이 바로 보편구원론과 차이를 가지는 부분이다. 제한적 속죄 교리는 사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것의 원래 목적, 계획, 디자인에 대한 문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방식으로 계획하셨는가?
OR
영원으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 계획 속에서 속죄하여 구원하는 방식으로 계획하셨는가?
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R.C.Sprould은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라는 용어보다 절대적 구속definite redemption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 사역을 선택된 자들에게 구원을 주기 위한 관점에서만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제한적 속죄 교리에 대해서는 많은 반대가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존 오웬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의 사망의 죽음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에서 굉장히 자세히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벧후3:8절 이하에 등장하는 내용에 대한 반박에 대해서만 다루어보기로 한다.
벧후3:8~9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부분을 보면 우리가 제한적 속죄에서 주장하는 것과 다른 내용을 베드로가 가르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다양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표현을 영어로는 모두 will로만 번역한 데서 오는 문제다.
이 구절에서는 ‘원하시느니라 willing’과 ‘아무도 any’의 의미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뜻(영어로 will이라고 번역된 말씀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로 나뉠 수 있다.
주권적 하나님의 뜻 The decretive will of God
–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뜻하신 것은 무엇이든 달성하신다는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뜻이다.
만약 베드로가 여기서 이런 의미로 ‘원하시느니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면 이 구절은 정확히 보편구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해석된다. 그 누구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교훈적 하나님의 뜻 The Preceptive will of God
–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명령들을 뜻한다. 십계명과 같은 것들이 여기 속한다.
이 구절에서 베드로가 말한 ‘원하시느니라’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라면 해석이 매우 어색해진다.
의향으로서의 하나님의 뜻 God’s will of Disposition
–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사용된 ‘원하시느니라’는 이런 의미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말씀에서 만약 ‘아무나’가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면, ‘원하시느니라’는 의향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으로밖에는 해석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맥락에서 ‘아무나’는 ‘모든 인류’를 의미하는 것 같지 않다. 영어에서 any라는 단어는 단독적으로 잘 사용되지 않으며, 사용될 때는 생략된 어떤 그룹이 있어서 ‘어느어느 그룹의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9절을 살펴보면,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문법적으로 이 문장에서 ‘아무도’는 ‘너희’와 상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베드로가 말한 ‘아무도’는 ‘너희 모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이 ‘너희’는 여기서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이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