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이란? 제 11강 저항할 수 없는 은혜

Summary 요약

 

  앞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단어들을 더 알맞는 단어로 계속 바꾸어 왔는데 여기서도 그래야겠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그 누구도 저항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저항의 역사가 아닌가?  따라서 ‘효과적 은혜 effectual grace’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의 저항을 이길 만큼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가 의도하신 그 효과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에 대한 논점은 사실 믿음과 거듭남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 개혁주의 신학과 다른 신학을 역사적으로 구분하고자 한다면, 바로 믿음과 거듭남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 따르면 거듭남은 믿음에 앞선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필연적 우선순위가 논리적으로 앞선다는 의미다.  A가 B에 시간적으로 앞선다면, A는 B가 등장하면서 그 효과를 잃고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믿음과 거듭남의 선후관계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믿음과 거듭남은 동시에 일어난다. 시간적 차이는 없다. 그러니 거듭남이 믿음에 앞선다는 것은 믿음이 중생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중생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더 보편적인 관점은 믿음이 거듭남보다 먼저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부분 ‘만약 당신이 믿는다면 당신은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믿는다는 거다. 이는 세미펠라기우스적 관점인데,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기신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본성적 능력이 남아있다고 보는 것이다. 타락을 인해 본성이 약해졌지만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문제의 해결책은 부패의 정도를 어느 정도로 이해하고 있느냐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요3:3에서 누구든지 거듭나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엡2:1 이하에서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선물이라고 말한다.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완성하시는 영적 부활이다. 성령은 어떤 사람을 발로 차고 윽박지르고 소리질러서, 그 사람의 의지를 완전히 거슬러서 당신의 나라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반대로 사람 안에 있는 마음의 경향성을 바꾸셔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스스로 원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온다. 하나님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안에서 은혜의 역사를 하셔야만 하나님을 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영혼에서 일하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은 일방적이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만 일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의 경향을 바꾸실 수 있는 힘을 지닌 유일한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Thoughts 깊이 생각해보기
 
  이제 칼빈의 오대강령 TULIP도 거의 끝나가네요. 다음 포스팅이면 모두 종료됩니다.  TULIP은 사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말 그대로)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동시에 인간의 죄악됨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인정한다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신학적, 그리고 성경적 전제를 인정한다면 여러 꽃잎이 한데 뭉쳐 아름답게 한 송이의 튤립을 이루는 것처럼 TULIP이라는 다섯 꽃잎은 꽤나 단단한 체계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너무도 감격스러운 교리였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 안에서 선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절망 밖에 없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나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로 일으키신다는 교리는 저에게 생소했습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저의 책임을 무시하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저의 의지의 자유를 빼앗아가는 폭력적인 교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 항상 역설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일어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추구해야하는데, 동시에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결코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으려고 하니까요. 거룩한 삶을 이미 이룬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소수 엘리트로만 보였습니다. (물론 그분들은 특별합니다.) 
 
그러다 이 교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목사님들의 책과 설교를 통해서 완전히 설복당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영혼의 구원과 같은 중대한 일이 나처럼 불완전한 인간의 선택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로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고 평안하게 됩니다. 저는 구원이 저처럼 불완전한 인간에게 맡겨진다면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깨닫게 된다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100% 일하신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감사해집니다. 나에게 0.0001%라도 구원의 책임이 주어진다면, 그러니까 0.0001%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저항할 수 있다면… 전 불안에 떨며 잠을 자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여기는 어느 날 밤 날 죽여달라고 기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구원의 확신을 가졌지만 내일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Over de auteur

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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