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ary 요약
앞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단어들을 더 알맞는 단어로 계속 바꾸어 왔는데 여기서도 그래야겠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그 누구도 저항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저항의 역사가 아닌가? 따라서 ‘효과적 은혜 effectual grace’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의 저항을 이길 만큼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가 의도하신 그 효과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에 대한 논점은 사실 믿음과 거듭남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 개혁주의 신학과 다른 신학을 역사적으로 구분하고자 한다면, 바로 믿음과 거듭남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 따르면 거듭남은 믿음에 앞선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필연적 우선순위가 논리적으로 앞선다는 의미다. A가 B에 시간적으로 앞선다면, A는 B가 등장하면서 그 효과를 잃고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믿음과 거듭남의 선후관계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믿음과 거듭남은 동시에 일어난다. 시간적 차이는 없다. 그러니 거듭남이 믿음에 앞선다는 것은 믿음이 중생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중생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더 보편적인 관점은 믿음이 거듭남보다 먼저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부분 ‘만약 당신이 믿는다면 당신은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믿는다는 거다. 이는 세미펠라기우스적 관점인데,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기신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본성적 능력이 남아있다고 보는 것이다. 타락을 인해 본성이 약해졌지만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문제의 해결책은 부패의 정도를 어느 정도로 이해하고 있느냐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요3:3에서 누구든지 거듭나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엡2:1 이하에서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선물이라고 말한다.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완성하시는 영적 부활이다. 성령은 어떤 사람을 발로 차고 윽박지르고 소리질러서, 그 사람의 의지를 완전히 거슬러서 당신의 나라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반대로 사람 안에 있는 마음의 경향성을 바꾸셔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스스로 원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온다. 하나님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안에서 은혜의 역사를 하셔야만 하나님을 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영혼에서 일하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은 일방적이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만 일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의 경향을 바꾸실 수 있는 힘을 지닌 유일한 존재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