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견인은 성도가 스스로 끝까지 무언가 견뎌낸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물론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인내하고 견딘다. 하지만 이렇게 마지막 날까지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견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견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견인Perseverance라는 단어보다는 보호하심Preservation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견인은 하나님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성도의 견인은 아버지로 부터 택함 받고, 그리스도로 속죄함을 받았으며, 성령으로 거듭남을 받은 이가 영원히 구원받으며, 단 한 명도 중도에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그가 완성하신다. 빌립보서1:6은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만약 구원받았다면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잃었다면 결코 구원받은 적이 없는 것이다.
요일2:19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즉, 외적으로 함께 할 수는 있으나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몸, 보이지 않는 교회에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가룟유다를 생각해볼 수 있다.
마7:23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른 이를 향해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요17:12에서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이들은 한 명도 멸망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심을 말씀하신다.
물론 우리는 구원받고 나서 죄에 빠진다. 심지어 심각한 죄에 빠진다. 나는(R.C.스프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제외하고 어떤 죄도 지을 수 있다고 본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다. 이는 우리가 은혜에서 심각하게 넘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베드로는 우리의 구주인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했다. 그는 배신자였다.
이런 성도의 현실적 상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들이 심각하게 죄에 빠졌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 규정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의 교훈과 훈련은 반드시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성령은 우리를 영적 죽음에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으로 데리고 가신다. 성령은 구원을 시작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보호하신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계약금 같은 분이다. 가계약금을 지불하고 나면 계약금은 반드시 지불될 것을 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을 통해서 우리는 마지막 날에 반드시 영화의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영에 인을 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의 중보다.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를 매일매일 하나님께 중보하신다. 나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13:27)라고 하셨지만, 베드로에게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