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에 대한 소고

 

내용을 담고있지 않은 형식이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음악의 형식/장르 자체가 표현하려는 메시지와 상반된 형태로 드러나는 찬양은 전 좀 그렇습니다. 마치 반어법처럼 느껴지니까요.  

요즘 이슈가 되는 “트로트 ccm/찬양” 영상에 대한 비판을 싫어하시는 분들은, 이런 비판이 찬양함에 있어서 다양성과 풍성함과 자유에 대한 폭력으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그리고 이건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당연한 반응인거 같아요). 그런데 이에 대해서 이분들에게 그것을 비판하는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주지 못하면, 진짜 그냥 편견이자 폭력일 뿐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답변을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개혁주의는, 그런 설명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조건적인 강요가 아니라요. 다만 전 음악에 대해 참 무지하고, 신학도 아직 입문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 보다 전문적이고 근거 있고 통일성있는 답을 할 수 없다는 면에서 여기에 답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러나 전 가사에 합당한 장르가 어느 정도는 정해진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범위와 질서 안에서 충분한 풍성함이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는 세상의 참된 아름다움은 진리 안에서 질서있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왕의 개선식을 할 때에는 그에 알맞은 위엄있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지, 술집에서 부르는 노래를 부리지 않습니다. 또한 반대로 나이트클럽에서 성가곡을 틀어놓지는 않습니다. 그럼 흥(?)이 떨어지니까요.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그 하나님께 합당한 표현 형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시대의 어떤 스타일이어야만 한다고 딱 못박고 싶진 않습니다(하지만 장르가 중립적이라는 주장에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찬양의 제일가는 목적인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면서 세상문화를 마구 따라가는 건 자유와 풍성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찬양에서 마땅히 드러나야할 참된 아름다움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진짜 고개를 끄덕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음악이, 그 가사가 담은 메시지에 합당한 형태로 그 가사의 내용이 우리 마음을 울리도록 풍성해지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합당한 아름다움을 돌리는 것. 그게 우리가 추구해야할 찬양이 아닐까요.

여담이지만, 요즘 학교에서 채플 때 순서가 좀 변경되었습니다. 묵도 후 다같이 일어나서, 주로 찬송가 앞쪽에 배치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송영을 예배 때마다 돌아가면서 부릅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이어서 고백하죠. 천여명이 한 목소리로 부르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찬양의 순간이 전 정말 좋습니다.

Over de auteur

재국

디자이너를 꿈꾸던 공대생 출신 신학도.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교회사를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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